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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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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삼우 목사 (잠실중앙교회)

  2차 대전 때 유럽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은 새로운 병명을 하나 만들어내었습니다.  그 병의 이름은 ‘철조망 병’이라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포로로 잡혀서 철조망 속에 수용된 병사들 가운데 나타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극도로 우울해지고 심신이 점점 쇠약해져 가는 증세를 나타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하고 나중에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으려 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치료의 방법도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철조망 속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병이라고 해서 철조망 병(Barbed-wire sickness)이라고 불렀습니다.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고 해서 다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라는 똑 같은 환경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증세가 나타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병의 증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의관들은 어떤 사람이 이 병에 걸리고 어떤 사람이 걸리지 않는지 그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하루 종일 가시철조망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포로다.  나는 철조망에 갇혔다.  이 철조망 때문에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도 철조망을 너머를 바라보았던 사람들, 다시 말해 푸른 하늘을 보고, 철조망 밑에 핀 작은 들국화를 볼 줄 알았던 사람들, 그래서 고향을 그려보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내일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철조망에 갇혀서 철조망에 의해 꼼짝 못하고 구속되었던 사람들은 이 병에 걸렸고, 철조망에 갇혔지만 마음이 구속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철조망은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넘어갈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실의 철조망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철조망이 있고, 실패라는 철조망이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라는 철조망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도 철조망 속에 갇혀 있는 것이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이 철조망 병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 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을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했더니 그 쥐가 3시간 안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독에 쥐를 넣고 이번에는 뚜껑을 닫을 때에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놓았습니다.  이 경우의 쥐는 놀랍게도 36시간이나 살아 있습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밖에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차이는 단 하나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적은 차이가 3시간의 생명을 36시간의 생명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가지 않는 독 안의 쥐는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3시간 만에 죽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빛이 들어올 때 밖으로 나갈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이 생명의 동력이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Emile Brunner)는 ‘우리의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산소를 호홉하고 살아가듯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소망을 호흡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을 때 어떤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명절이면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올라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이 얼마나 붐볐을까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시골사람들이 모여들어 들뜬 기분으로 여기저기 구경하고 먹고 마시고 복잡했을 것입니다.  이런 명절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한 불쌍한 병자를 만나셨습니다.  사람들은 명절이라 기뻐하며 즐기지만 그 기쁨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사람들, 명절이기에 오히려 외로움과 슬픔을 더해야하는 사람들, 주님의 관심이 바로 그들에게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성탄절이나 혹은 어떤 특별한 기쁜 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는 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입니다.  명절날 주님은 사람들과 함께 들떠 기뻐하기 보다는 명절을 함께 즐길 수 없는, 아니 명절이기에 더욱 슬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양문 곁에 베데스다 못이 있었다고 했는데 양문은 양이 들어가는 문이란 뜻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성에 여러 문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문이 바로 양문이었습니다.  이 양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성전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히브리어로서 벧는 ‘집’이며 에스더는 ‘자비’라는 뜻으로서 합치면 ‘자비의 집’이란 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행각이란 햇볕을 피하고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놓은 기둥과 지붕만 있는, 우리나라의 정자같은 건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병자들이 거기 있었던 이유는 베데스다 못에 특별한 전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추측하건데 아마도 이 베데스다 못은 간헐천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간헐천이란 못 아래 땅 밑에 뜨거운 물이 있어서 그 뜨거운 물이 가끔씩 물위로 솟아오르는 연못입니다.  물이 동했다는 말이 바로 땅 밑에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병자들은 천사가 못에 내려와 불을 동하게 하는 것으로 믿었고, 이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이 낫게 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미신이었습니다.  온천이라면 피부병이나 신경통 같은 병은 나을 수 있었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낫는 사람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병자를 찾으신 것입니다.  병자를 찾으신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물으셨습니다.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질문이지 않습니까?  세상에 병 낫기를 원치 않는 환자도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건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고, 또 잘못하면 놀리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그 정도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 38년된 병자에게 그 같은 질문을 던지혔습니다.  더구나 본문을 보면 예수님 그 병자가 오래 된 줄 아시고 이렇게 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38년을 누워 있으면서 그 병자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고 절망했겠습니까?  38년을 여기 누워있었는데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지금까지 못이 동할 때 먼저 뛰어 들어가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혹시 물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지 밤낮 없이 물만 뚫어지라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행여 다른 곳 보고 있는 사이에 물이 동해 버리면 다른 사람이 먼저 보고 먼저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스스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혼자 힘으로 안 되자 누군가의 도움을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런 세월이 38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노력했고 또 얼마나 많이 불평했겠습니까?  그러한 가운데 38년이 지나갔습니다.  말이 38년이지 한 사람의 생애가 다 지나간 것입니다.  이런 형편에 아직도 소망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분명히 그는 다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기대도 원망마저도 다 메말라 버린, 그야말로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 물으신 것입니다.  “아직도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서커스 같은 것을 통해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훈련된 것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맹수들 어떻게 훈련시키는지 아십니까?  조련사가 원하는 행동을 정해놓고 그대로 하지 않을 때는 심한 고통이 오도록 장치를 해 놓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맹수가 조련사 뜻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엄청난 아픔을 당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냅니다.  오랫동안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침내 맹수는 체념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맹수가 길이 든 것입니다.  조련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학습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부릅니다.  무기력한 상태에 완전히 길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되는 패배와 절망에 익숙하다보면 학습된 무기력증 환자가 됩니다.  이제는 승리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내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가난했기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비굴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병중에 있다보니 정신까지 완전히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나중에는 실패가 마치 내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승리를 생각지 않는 자에게 승리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 삶이 달라지리라 기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새 역사를 이루실 수 없습니다.  병 낫기를 원치 않는 자의 병을 주님 고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먼저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이 질문의 핵심이 있습니다.  비록 38년을 실패했지만 다시 소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마음에 소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찾아와 병 고려 달라고 부르짖은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시각 장애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소경은 장애인이지 환자가 아닙니다.  지금 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닙니다.  환자라면 고친다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그렇게 살도록 운명지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경들은 놀랍게도 예수님께 소망을 가졌습니다.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건 보통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그들의 위대한 점입니다.  소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나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고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인생 끝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나환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낫게 해 달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결코 평범하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비록 우리는 이렇게 운명 지어졌지만 예수님 저 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예수님이라면 고칠 수 있다.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 마음에 예수님은 능력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이 시간 이 질문을 여러분 자신에게 해보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 정말 낫기를 원합니까?  주님은 낫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인격에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정말 새로운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그동안 38년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 실패해왔더라도 주님 앞에서 다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기도하고, 다시 소원하고, 다시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능력은 있지만 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져 주실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무자격하다, 나는 구제 불능이다, 나는 소망이 없다.  스스로를 학대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내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생명까지 주셨지 않습니까?  지금 38년된 병자에게 이 질문은 던지는 주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냥 장난삼아 묻는 것 아닙니다.  주님 고쳐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낫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고쳐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병자가 대답합니다.  7절 함께 읽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대답 잠깐 보십시오.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라는 말 단순히 ‘그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어로 “I have no man” ‘내게는 사람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를 도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구제를 받아야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물이 동할 때 각기 자기 병을 고치기에 혈안이 되어 앞을 다투어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남을 동정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한평생 자기의 문제만을 안고 고민하다가 발버둥치다가 한 생애를 마쳐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고독하고, 그래서 사회는 메마르고, 거칠고 어두워져 갑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회를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병자인데, 자기의 병은 그대로 놔두고 남의 병부터 고쳐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병에서 고침 받는 길은 사람이 없다고 탄식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이 진리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내 문제에 있어, 내 생의 고통에 있어 그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소용없습니다.  도움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주님에게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8,9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마침내 예수님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보세요.  병자는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못에 넣어서 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냥 말씀으로 낫게 하셨습니다.

  여기도 가만히 보면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은혜와 행위, 나아가 복음과 율법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맨 먼저 이 못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  이것이 행함이요 율법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물이 동할 때 일등으로 못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못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정도로 빠르고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각한 병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세 종류의 병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경과 지체장애인과 혈기 마른 사람들입니다.  혈기 마른 사람이란 중풍병자를 가리킵니다.  소경도 지체장애인도 혈기 마른 사람도 제일 먼저 뛰어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볼 때 사실 여기 병자들은 헛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손에 든 모든 인류의 문제입니다. 

  일 등할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 그는 건강한 사람이요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요. 지체장애인이요, 중풍병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끊임없이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소원을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원을 이루고자 할 때 내가 행한 무엇인가를 내세웁니다.  물에 먼저 달려가려는 것입니다.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세우고 소원 이루어달라고 합니다.  이제 알아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자비를 입는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긍휼을 입기만 하면 됩니다.  먼저 물에 뛰어들지 않아도 주님만 만나면 거기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냥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곧바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로 낫는 것이요, 말씀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입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역사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말씀하셨더니 38년 된 병자가 그냥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능력이요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소망을 가집시다.  진실로 주님의 긍휼을 사모하십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의 능력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심령에 역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절망적 현실 속에서 소망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던 저희들이 다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예, 주님, 주님은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제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주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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