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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행복의 본질 (마음의 가난)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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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삼철 목사 (천호교회)

시작하는 말 

행복(Happiness)은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인간에 주어지는 바 즐겁고 복된 상태"를 카리키는 용어입니다.

행복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ashre"로 표현됩니다. 또한 70인 역과 신약 성경에서는 헬라어 "Makarios"라는 용어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역본 성경들에서는 "Happy, Blessed"로 번역되었습니다. Blessed로 번역된 것은 잘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아낌없는 축복의 결실이거나 인간의 착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행복에 대한 예를 많이 들고 있습니다. 시65:4-5, 계19:9, 시41:1-2, 잠14:21, 눅14:13-14...

성경은 행복의 성격과 본질에 대하여 더욱 더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건강, 성공, 생명, 많은 자손, 안전, 풍성함"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신33:29, 시1:1-3, 41:2-3, 128:42, 잠8:34-36, 16:20 사32:20, 마24:46-47, 눅1:42, 약1:12, 눅23:29, 시127:5...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영어 Welfare란 말은 "잘 정선되고 정돈된 기쁨으로 가득찬 인생"을 의미합니다.

"Aristotle"은 "행복이란 덕이나 선에 의거한 영혼의 활동, 즉 힘의 활용이며 가장 선하게, 가장 완전하게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wellbeing(행복)은  illbeing(불행)과 정반대 되는 개념입니다.  wellbeing은  welldoing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잘 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행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불확실을 없애기 위해 설교하러 오셨고, 오해를 없애기 위해 가르치러 오셨고, 모든 고통을 없애기 위해 치료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로소 산 위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산상 설교를 "열두 사도의 임직 설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 그리스도에게 "취임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상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강요"요,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왕의 선언문"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짧지만 너무 심오하기 때문에 대충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행복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8가지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의 본질 그 첫째는 심령의 가난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행복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입니다.

1. 사람이 부요하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1). 부요는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시편은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2:1)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은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시112:2)라고 말했습니다. 후손이 땅에서 강성하고 후대가 잘되는( wellbeing)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시112:3)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부요와 재물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부요와 재물이 축복인 자들은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그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112:9)라는 말씀대로 부요와 물질을 보람있게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당일에 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는 자가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어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두고 큰돌을 구려 무덤 문에 놓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깔끔하게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부자로서 그만한 권세를 가졌기에 가능했습니다.

2). 부요하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교회였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만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는 둥안에 그들의 영혼은 곤고와 가련함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영안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의 행실은 점점 더 벌거벗은 것과 같이 누추해 졌습니다. 끝내는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부요는 축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전 사무엘이 세상을 떠나고,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바란 광야로 도망하여 마온에 이르렀습니다. 마온에 심히 부한 나발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완고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나발에게는 아까운 여자였습니다.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을 위해 늘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다윗이 소년들을 보내어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삼상25:8)고 일러주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그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때에 나발이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 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삼상25:11)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노발대발하여 나발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총명한 아비가일이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급히 나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나발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비가일이 집에 돌아와보니 나발이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며 포도주에 취하여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아비가일이 자기 남편에게 지난날의 사실을 고할 때에 돌같이 굳어져 열흘 후에 하나님이 치시매 나발이 죽었습니다(삼상25:36-38).

마온의 나발에게는 부요와 윤택이 큰 재앙이 되었습니다. 나발과 같이 부요하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2. 가난하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1). 가난하면 고생을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가난하게 사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진다고 하여 달라질게 없습니다. 가난은 서러운 것이며, 가난하면 안팎으로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고(잠14:20),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으며(잠19:7), 친구들도 멀리하여 끊어집니다(잠19:4,7). 공연히 학대를 받고, 짓밟힙니다(암5:11). 멸시와 천대 그리고 무시를 당합니다(눅18:1-5).

가난하면 세상 살기가 너무 불편합니다. 고생을 많이 합니다. 제약을 너무 많이 받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삽니다.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합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현실적인, 물질적이 빈곤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랑거리는 더욱 아닙니다. 가난과 빈곤은 기독교의 적입니다. 기독교가 퇴치해야 할 숙제요 과제입니다. 기도해야 할 문제요, 기도의 제목입니다.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입니다.

야게의 아들 아굴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 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30:7-9)라고 기도했습니다. 

2).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불행은 아닙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욥5:16)고 말했습니다. 가난이 오히려 소망일 수 있습니다.

한나는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 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화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삼상2:7-8)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72:2-4)라고 하나님을 칭송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토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구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모신다면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3. 마음이 가난한 자는 모두가 행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또 쉽게 잃을 수도 있습니다.

돈, 명예, 권세, 학벌, 가문, 건강은 소중하고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아무리 세상 적으로 값지고 귀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행복지수는 더욱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본질은 인간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가난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억압받고, 부당하게 취급받고, 무시되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적인 방법으로 이를 위해 투쟁하는 대신 하나님을 의존하고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기를 겸손히 기다리는 사람들(Herman N.Ridderbos)"을 말합니다.

"William Barclay" 박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절대적인 무능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즉 "자신의 힘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힘이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단지 하나님에게서만 그 도움과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아는 심령"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2).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바로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이유는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유한자는 행복합니다.

일지기 솔로몬은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72:2-4)라고 노래했습니다.

솔로몬은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를 편들어 공의로 판단하시며, 평강을 주시며, 신원하여 주시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 노래를 다음과 같이 불렀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0:1-3)고 노래했습니다. 

끝맺는 말

사람의 행복의 본질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 가득찬 잡다한 것을 다 비워버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성령님을 보혜사로 모시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생활이 행복한 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생활이 곧 천국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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