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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갈 6: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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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영감의 사람 사도 바울이 영적으로 캄캄한 사람들과 상대하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갈라디아 지방은 바울의 그 어떤 전도지역 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곳입니다(행 13:50; 14:19).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곳은 바울의 관심과 애착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한 곳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 당시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할 것을 교훈하면서 신앙은 인간적이고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은 '표면적인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형식무용론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투명한 형식이어야지 내용이 불투명하면서 형식을 위한 형식은 배격합니다.
복음전파의 격전지에서 사도 바울이 감수해야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를 마지막 정리하는 데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는 성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가 왜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고 했습니까?

Ⅰ. 성도들이 미혹(迷惑)되는데 대한 고 통 때문입니다.

본문 6장 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괴롭게』(코푸스 파레케토, )라는 말은 내면적 고통과 슬픔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논쟁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절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권위를 지니지 못했다는 비난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을 '자유자요 사도요 주를 본 자'라고 했는가 하면 그가 고린도교회의 개척자이므로 사도직은 고린도교인들이 인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5절에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극히 큰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지칭한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되는 현실이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이상 갈라디아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호소입니다.

2) 할례에 대한 논쟁입니다.
본문 6장 13-15절에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 선생들입니다.

눈앞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는 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든 진리를, 주어진 어떤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황 윤리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유익만 위하면 그만인 자들입니다.
로마서 2장 29-3장 1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미혹되어서 이러한 논쟁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 때문입니다.

본문 6장 17절에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라는 말은 내가( - , 에고가르), 내 몸에( , 엔 토 소마티 무), 내가 내 몸에(for I bear on my body)
① 사도 바울이 몸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은혜체험을 말합니다.
② 사도 바울 자신이 역사(歷史)가 아닌 체험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③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는 준 자와 받은 자만이 아는 하나님의 진리의 비밀한 은혜체험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0절에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Ⅲ. 자신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 때문 입니다.

1) 자신의 분명한 소속을 나타내는 흔적입니다.
본문 6장 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흔적』에 해당하는 '스틱마타( )'는 소나 양에게 화인을 찍어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마크입니다.
사람의 경우에 노예는 소속된 주인의 낙인을 그 몸에 찍었습니다. 전쟁 포로를 수용할 때도 포로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찍는 도장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군인의 제복에 지휘관의 고유한 표식을 새겨서 소속된 신분을 알리는 방법으로 소인이나 자국을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진 후에 소속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요 신분으로는 그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의 심령에 화인처럼 찍혀 버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크가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매여 있는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종이라고 할 때 적어도 두 가지의 뜻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 의미는 '오이케타이스( )'인데 이것은 삯을 상대하고 움직이는 종입니다. 삯을 받기 위해서 고용된 종입니다. 삯을 받기 싫으면 종의 신분을 벗어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삯의 종인 셈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둘로스( )'입니다. 이 말은 삯과는 관계없는 노예라는 의미입니다. 노예는 팔려서 온 자이기 때문에 삯과는 관계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한평생 주인의 소유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삯을 지불하고 사 왔기 때문에 노예는 주인의 은혜를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존재 의미는 주인의 것으로 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주인의 뜻이 자기의 뜻이 되고 주인의 목적이 자신의 목적이 된 상태입니다. 이 종에게 있어서 소망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는 주인의 칭찬이 영광인 것입니다.

바울은 '둘로스( )'가 자신의 신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의 주인은 유대주의와 율법이요 로마 시민권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학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참람한 주인 유대주의와 율법에서 새 생명의 복음이 사도 바울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군왕들이 주는 로마 시민의 신분에서 장차 도래할 영원한 천국시민이 되었습니다. 항상 배우나 진리 지식에 이르지 못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바울의 새 주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바울의 기쁨이자 소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모신 이것이야말로 바울 사도의 긍지요 자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의 새로운 존재의의가 되었고 새로운 삶의 목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동치는 심장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2) 사명 수행에 따르는 고난의 흔적입니다.
본문 6장 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받은 온갖 육체적 상흔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상흔을 가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이 말은 육체적 상흔에 대한 의미로는 매우 약하며 다분히 정신적인 상흔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고난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육체적 상처와 심령의 고통이 예수의 흔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1) 바울의 육체적 상흔입니다.
넘치도록 한 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고후 11:23).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고후 11:24).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습니다(고후 11:25).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한 일입니다(고후 11:26).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은 일입니다(고후 11:27).

(2) 바울의 영적 상흔입니다.
수고하며 애쓰는 일입니다(고후 11:27). 유대주의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전도자로서의 괴로움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30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9-50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흔적은 육체적 상흔도 상흔이려니와 그보다도 사명에 대한 눌림과 교회를 향한 정신적인 수고로움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흔적입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것과 그와 함께 고난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아픔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미 부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광과 상급의 흔적 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한 부분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5:20).

① 예수의 흔적은 마귀의 종이나 사람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의 흔적은 사명수행에 따르는 온갖 괴로움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③ 예수의 흔적은 이미 받은 구원과 장차 받을 영광의 상급을 의미합니다.
다시 누가 우리를 괴롭게 할 자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넘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운동을 위한 우리의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주저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장차 받을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거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그 자체가 우리의 기쁨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당할 때 우리는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받은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흔적은 구원받은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 흔적은 우리가 받은 사명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서 오는 체험적 신앙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동하는 신앙이 마침내 여러 종류의 육체적 고통을 감당케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내가 내 몸에 가지고 있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울 수 없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뚜렷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이러한 영적 은혜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있는 일성(一聲)은 "누구든지 이후에는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외쳐야 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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