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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2) “사람이 되신 하나님”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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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세상에서 최고로 가장 좋은 것은 돈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가장 좋고 가장 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이 행복이고 사랑이 기쁨이고 사랑이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고 최고로 귀하고 최고로 아름다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도 아니고 부부의 사랑도 아니고 친구의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His love endures forever.” “그의 사랑하심이 영원함이로다.” “His love endures forever.” “그의 사랑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는 두세 번 중얼거리다가 그치지 않았고 26번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중얼거렸습니다. “His love endures forever.” “그의 사랑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난 번에 다윗의 사랑 고백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다윗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웃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글을 쓰든지 설교를 하든지 손을 놀리든지 입을 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제일 먼저 좇았던 제자였고 예수님을 제일 마지막까지 좇았던 제자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 요한 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이 최권능 목사님을 몽둥이로 때리면 최권능 목사님의 몸과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예수 천당”이었던 것처럼, 사도 요한의 몸과 손과 입을 건드리면 그에게서 튀어 나온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 준 사람도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는 말을 한 사람도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이란 말을 30번이나 계속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자주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 있곤 했습니다(요13:23). 그는 자기 이름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를 요한이라고 부르는 대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왕자 병에 걸렸어도 대단히 큰 왕자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밧모섬에서 마지막에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면서 한 사랑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고 지난 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알지도 받지도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사랑에 감격해서 늘 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랑을 느끼지도 알지도 받지도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한 번 흘려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회개의 눈물도 한 번 흘려보지 못하고 사랑의 눈물도 한번 흘려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눈물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착하게 만드는데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메마르고 딱딱하고 비판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교가 눈물 흘리는 것을 막았다면 유교는 반 기독교적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사랑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며 내게로 돌아오라”(요엘2:12)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눅6:21)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신기하고 놀라운 사랑을 세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말씀’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 사람이 아프리카 사람을 사랑할 때 아프리카 사람이 됩니다. 영국 사람인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사람을 사랑해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일 사람인 슈바이쳐가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랑해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사랑할 때 한국 사람이 됩니다. 존 린튼 박사의 증조 할아버지는 한국을 사랑해서 1895년 (109년 전에)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존 린튼 박사의 할머니와 아버지는 모두 한국 전라도에서 태어났고 존 린튼 박사도 1959년 한국 전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라도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 여자와 결혼을 했고 전라도 말을 한국 사람보다도 더 잘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셂이라는 신학자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이 “왜” (Cur) (Why)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 (Why God Man?) 이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불가해한 일이고 모순된 입니다. 천사가 잠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해할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철두철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일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마리아의 몸 속에 들어가서 열 달 동안 계시다가 아기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모순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같이 연약해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연약에 쌓여있었다”고 했고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고 했습니다(히5:2,4:15). 가난해지셨다고도 했습니다. 피난살이도 했습니다. 인간의 배고픔과 인간의 아픔과 인간의 슬픔과 인간의 고통을 모두 짊어지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죄인이 되셨습니다.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는 모습을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요19:34,35).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마다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이삭 왔츠는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대구 주암산에서 열린 산상 부흥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찬송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찬송가 가사 한 줄에 가슴이 복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가사는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였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우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피를 흘려 교회를 사셨다는 말에 감격해서 그저 계속해서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성육의 사건과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보면서도 눈물 한방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말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눈을 수술을 하든지 마음을 수술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처럼 태어나셨고 사람처럼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색깔이요 모습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천막을 치고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입니다. 잠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영삼 선교사와 이희경 선교사는 그리스의 집시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이희경 선교사님이 이런 글을 방명록에 올렸습니다. “몇 주전 김목사님의 설교를 보게 되었습니다. 착한 자가 되라는 요지의 설교 였어요. 착한 사람이 되는 것 쉽지 않지요. 이곳 아덴에서 선교사로 살면서 착한 삶을 살고 싶어 얼마나  몸부림 쳤나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본성이 죄가 가득하기에 착한 삶을 살기란 쉽진 않더군요. 그러나 착함의 결과는 기쁨이었고, 행복이 였습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함께 살면서 착함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사도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행10:38).

  존 린튼 박사는 한국 사람들을 사랑해서 한국에서 4대째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전라도의 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았고 지금은 연세대학교의 의사로 날마다 환자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수 많은 결핵 환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착함과 사랑의 손길을 나타내 보이면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수년 전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존 린튼과 스티브 린튼 형제가 부시 대통령과 가까이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이 저하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두 사람이  부시 편이나 미국 편에 서기 보다는 한국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제가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과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 느끼면서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틀 전에 존 린튼 박사님과 전화로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까 너무 즐겁고 기쁘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연세 대학교가 최근에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서 큰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너무 즐겁고 기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살면서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울면서 사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함께 슬퍼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이 절망 중에서 살아갈 때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서 그와 대화하면서 그의 절망과 고통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통곡까지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히5:7).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불행과 고통에 참여하시면서 많이 우셨습니다. 사랑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살면서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색깔이요 모습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도 귀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 율법만 있었다면 구원을 얻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심판대신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법을 수행하시려고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구원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이것이 은혜요 진리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법대로 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벌 대신 상을 주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감옥 대신 자기 집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에게 지옥 대신 천국으로 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어야 하는 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남편 다섯을 두었던 수가성 여인을 법대로 하면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동내에 들어가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강도는 법대로 하면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강도에게 저주 대신 축복을, 심판대신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울을 법대로 하면 사회와 종교계에서 매장을 시켜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를 사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사랑은 율법대신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우주의 공의 대신, 구약의 율법 대신, 하늘의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이 세상의 윤리나 종교에 나타난 자비나 도덕이 아닙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불교적 자비나 유교적 도덕이 아닙니다. 십자군적 공의는 더군다나 아닙니다. 그 은혜와 진리는 오직 아들의 죽음에 나타난 은혜와 진리입니다. 오직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타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은혜와 진리입니다. 자기가 저주를 받으므로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는 은혜이고 자기가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므로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보고 손으로 만진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과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므로, 성육하시므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므로,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우시므로, 나타났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 보이시므로, 십자가에 달려 대신 저주를 당하시므로,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랑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주목하고 그리고 손으로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여러분들도 이 사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랑을 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랑에 감격하여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심판도 이긴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고 죽음도 이긴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4:18).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요일4:17).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손으로 만지고 눈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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