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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과 권세 (눅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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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네티교회)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나가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0일을 굶주리신 가운데 계셨기에 사탄은 이러한 예수님의 약점을 알고, 먹을 것으로 시험을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배고프신 예수님은 이러한 배고픔의 현실에서 사탄의 유혹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먹을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인간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때로는 “현실”이라는 것에 갇혀버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 배고픈데..”, “지금 돈이 필요한데..”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안타까움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삶의 원칙을 지배해서는 안 될 것이고, 지배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는 지난 주일에 생각해 본 신앙인과 경제생활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시험에 낭패를 본 사탄은 이제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시험했습니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되리라”(눅 4:6). 이러한 사탄의 시험은 곧 “권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권세를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자기와 타협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이 권세란 매우 매력적인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권세를 갖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권세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권세를 얻으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때로는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도, 열심히 일하는 이유도 이러한 권세를 얻고자 하는 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더 많은 권세를 누리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세가 없을 수 없는 사람은 이런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접근하여 이들을 통해서 권세의 맛을 보고 싶어 합니다. “나는 정부의 000을 안다. 000이란 사람이 내 사촌의 팔촌이다”는 식으로 팔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권세를 탐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바로 이러한 마음으로 권세를 얻기 위해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예수님께 청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권세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탄이 비록 유혹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권세를 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권세가 오늘날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성신학자 중에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의 저서 “돈, 섹스, 권력(Money, Sex and Power)”에서 오늘날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권력에 해당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1. 재물(Mammon)이 이 권세들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재물이란 것은 하나의 힘이기 때문에 권세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라는 심리학자는 “GNP가 현대의 금송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물질이란 것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2. 성(Sex)도 이 권세들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은 남자나 여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지배하려고 애쓰는 영적인 에너지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러한 성은 상업주의적인 모습을 통하여 더욱 강력하게 인간을 지배하고자 나타나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영화도 예술도 이러한 성적인 강렬함이 없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없다고 하여 더욱 그 농도를 짙게 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3. 종교적 율법주의(Religious Legalism)도 권세들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그 반대로 이끄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교권주의라는 틀을 통해 진정한 신앙의 가르침보다는 사람 위주의 율법행위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세력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를 말씀하면서,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마 23:4). “예수 없는 기독교”, “부처 없는 불교”란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교권의 힘을 가진 자의 독선 또한 현대의 권력의 한 모습입니다.

4. 기술문명(Technology)도 권세들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좀 더 편리하고 효과 있게 하고자 시도된 기술문명도 오늘날은 새로운 신이 되고자 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도의 기술문명으로 인하여 사람을 믿기보다는 기계를 더 믿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대화보다는 컴퓨터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하는 것도 이러한 기술문명이 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결과인 것입니다.

5. 자기도취(Narcissism)도 권세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자기도취는 지나친 자기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자기도취적인 자세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합니다. 내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저 나만 좋으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지니 인류를 향한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귀한 정신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6. 군국주의(Militarism)도 권세들 중 하나입니다. 첨단의 무기를 많이 가질수록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사적으로 우위를 지니려고 하는 데에서 이 지구의 위험이 더욱 촉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놓고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7. 절대적 회의주의(Absolute Skepticism)가 권세들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는 흔히 대학가에서 볼 수 있는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연구생활에 절대적 회의주의가 하나의 신앙처럼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부정해야 학문적으로 성실하다고 여기는 대학가의 분위기나 흔히 지식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오만한 냉소적인 모습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마적인 영적 세력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현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악한 개인이나 단체들에 힘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물질로, 성적 매력으로, 종교적 극단주의로, 기술문명으로, 자기도취로, 군국주의로 그리고 절대적 회의주의 등으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각 개인은 이러한 권세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권력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력이란 돈과 같아서 그 자체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지만, 누가 어떤 목적과 자세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러한 속성이 있습니다. 칼자루를 잡고 있는 손과 같습니다. 그 칼로 고기를 썰려고 하는 것인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에 따라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력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세를 갖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권력에 대한 바른 자세와 이해를 살펴보십시다. 첫째는 권력에 대해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온 사탄은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6절,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입니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산 모습들의 준동을 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입장에 동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 같고, 형통한 것 같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아삽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아삽은 평소에 하나님께 원망스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사는 세대에 있어서 악인들이 너무 날뛰는 데에도 하나님은 이들에게 제재를 가하시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은 너무 형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나 재앙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는 무소부위의 권력을 자랑하였고, 그러니 늘 출중한 모습에 훌륭한 언변에 재물도 많이 쌓이고, 그러니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도 받고 온갖 영광을 다 받습니다. 거기다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 아삽은 헷갈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이냐?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의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사람들보다 더 많은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실족할 뻔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해 관심이 많은 아삽은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너무 궁금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이런 아삽이 여기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였습니다. 시 73:16-17,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삽도 이 세상의 권력이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인 줄 알았었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이 형통한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집 곧 성소에 들어가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우리들에게 귀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의 권력에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게 되어 진정한 삶의 자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권력에 대한 유혹과 시험에 대한 해답으로 “오직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는 신 6:13의 말씀을 제시함으로 이 시험을 극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렇게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길 때에 권력에 대한 바른 입장과 이해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 신앙인들은 권력에 대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세리 머케덤이란 사람은 “권력을 지향하는 마음(love of power)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의 힘(power of love)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권력에 대한 바른 입장을 갖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력을 사랑의 힘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리차드 포스터는 “창조적인 권력”이라 표현하면서 우리 신앙인들은 권력을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맞게 행사하여야 한다고 소개합니다.

창조적인 권력이라 함은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입니다. 여러 가지로 분열된 그리고 반목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을 향해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하여 화합시키는 모습이라면 그것은 창조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입니다. 영국에 윌버포스(William Wilburforce)란 크리스천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영제국 내에서 이루어졌던 노예매매 제도의 폐지를 위해서 자신의 지위에 따른 권력을 행사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오랫동안 노력한 결과로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수많은 가정이 존속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합니다. 자신의 권세를 사용하여 사회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는 것이 창조적인 권력의 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또한 미국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Jr.)목사에게서도 발견합니다. 그는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서 싸움으로 수백만의 흑인들에게 자유를 되찾게 해 주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교회의 큰 이슈가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들도 같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형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금과옥조로 인정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크리스천들은 이들을 같은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사도들이 총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에서 오랫동안 의논한 결과 이방인들도 자기들의 문화적인 상황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유대인 크리스천과 똑같은 형제자매들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교권이라는 힘을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방향으로 창조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권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할 때,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하나 되게 하는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권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영향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이 조건을 갖출 때에 권력은 창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란 조건입니다. 권력이 사랑에 복종하지 않을 때에는 타락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주어져있는 힘을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오직 사랑의 동기로만 사용하였습니다.

둘째로, 겸손이란 조건이 필요합니다. 힘은 겸손이란 통제 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힘이 오만한 모습으로 사용한다면 위험해 집니다. 하지만 겸손의 훈련 아래에 있는 능력은 복에 복을 더하는 모습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나에게 있는 힘과 능력이 계속토록 사용되기를 원한다면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로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상대방에게 기쁨과 평안함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자가 그 능력을 바르게 사용할 때 볼 수 있는 표지입니다.

다섯째는 권력의 통로는 연약함(Vulnerability)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인간의 만용과 허세라는 그릇에는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힘이 없어 보이는 연약함의 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은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깨달은 하나님의 능력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여 진다”(고후 12:9-10)는 사실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여섯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은 복종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곱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자유를 향하는 곳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자유가 선사되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을 받은 자들은 병에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귀신 쫓아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귀신의 힘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전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권세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권세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속박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권세를 자유가 이루어지게 하는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권세와 능력은 사랑과 창조의 권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길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의 권세에 대한 시험을 물리침으로 참 권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를 바르게 행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든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가운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 권력이 하나님의 신실한 도구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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