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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또를 산 베드로 (마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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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성 목사 (멋진교회)

쌀집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이유는 쥐를 잡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쌀가마니를 쥐가 갉으면 구멍이 뚫리고 쌀이 쏟아집니다. 쥐는 여기저기 가마니를 쓸어서 못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쌀 창고에는 언제나 고양이를 놔둡니다. 이 고양이는 가마니 위에서 졸다가도 쥐만 나타나면 쏜살같이 쥐를 잡아냅니다.

그런데 만일 쌀집 고양이가 애완용으로 착각하고 애교만 부린다면 어찌될까요?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는 쌀집에서 더 이상 키울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야옹거리고 예쁜 짓을 해도 쫓겨납니다. 쌀집 고양이가 쥐를 못 잡으면 밥을 얻어먹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동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독 고양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과 가까운 가축 가운데 왜 고양이는 성경에 나오지 않을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쌀집 고양이는 쥐를 잡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본분이 있습니다. 각각 맡은 일은 다르지만 그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전도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전도의 슬로건은 언제나 ‘가서 전하라’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할 현장에 가는 것입니다. 가지 않으면 전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가는 일에 실패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지 않습니다. 가지 않으니까 전하지도 못합니다.

복음이 세상을 구원하는 놀라운 소식이라도 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는데서 꽃을 기대할 수 없고,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가서 전하는 일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변화산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1 절에 높은 산이라고만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산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까운 가장 높은 산은 헐몬산입니다. 다볼산이라는 설도 있지만 헐몬산이 유력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 얼굴과 옷이 희고 빛나는 변화된 모습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산을 변화산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 가지 기적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낫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귀신도 꼼짝하지 못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사나운 풍랑도 야단맞고 잔잔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 남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을 오늘 본문에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12 제자 가운데 3 명만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 17:1>

세 명의 제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엿새 후라고 했는데, 이는 16 장에 나오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받은 지 엿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정확하게 고백했습니다. 칭찬을 받을 만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이를 반대했습니다. 16:22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반대한다고 거두어질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 반대는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십자가 사역을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제자로서의 사랑으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베드로는 아주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예수님의 이 야단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아주 단호한 것입니다.

16:23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엿새 후라는 것은 베드로의 칭찬과 야단맞음과 연결된 또 하나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는 암시입니다.

왜냐하면 변화산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한 베드로가 또 다시 오버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신비롭게 변화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산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신비로운 변화산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고 외쳤습니다.

변화산에서 세 제자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만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사람입니다. 아주 옛날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죽었습니다. 엘리야는 병거타고 하늘로 들려 올려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구약 성경을 대표하는 큰 인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율법은 기록된 말씀입니다. 선지자는 계시를 통해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돋보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과 계시가 완성됨을 나타내 줍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세 명 모두 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계명은 모세에게 직접 들려 주셨습니다. 모세는 살아있는 율법 그 자체였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불과 바람과 지진이 지나가고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세 명 모두 산이나 광야에서 40 일을 금식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 일을 금식하며 계명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까지 40 주야를 금식하면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습니다.

이 세 명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자신의 얼굴에도 그 광채가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이 부셔서 모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경험한 빛나는 체험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엘리야처럼 부활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만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과 계시의 완성을 위해 삼자 회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명을 응원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5 절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 17:5>

성경에서 빛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 음성이 들리는 장면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16-18 에 베드로는 이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벧후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벧후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이 변화산의 장면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베드로는 신비체험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취한 듯 홀린 듯 했습니다. 산에다 천막을 짓고 내려가지 말자는 말은 현실을 잊은 말입니다. 주님의 변화된 모습은 너무 황홀했습니다. 이 모습은 장차 부활하실 그 몸이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의 몸체를 입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힘을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 바로 이런 영광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능히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하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이 변화된 주님의 영광의 몸은 십자가 다음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는 예고편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자들이 거리에서 그냥 못 지나치는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웨딩드레스 샵입니다. 모든 여자들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천사처럼 대접을 받는 환상적인 시간을 꿈꿉니다. 그래서 마네킹이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보면 그냥 지나가질 못합니다. 내가 드레스를 입고 신부 입장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앞두고 웨딩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입어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체험은 웨딩드레스를 한 번 입어본 것과 같습니다. 변화된 모습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장래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의 변화된 얼굴을 보고나서 착각을 했습니다. 잠시 동안의 변화된 모습이 지금부터 영원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산을 내려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초막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했습니다.

사실 초막은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곳입니다. 변화된 영광의 몸으로 거할 곳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되면 몇 십 억이 생깁니다. 그래서 로또복권을 산 사람들은 당첨되기도 전에 그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합니다. 백일몽을 꿉니다. 복권 발표를 하는 시간까지 당첨되리란 환상에 사로잡혀서 삽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허황된 꿈입니다. 발표가 나면 비눗방울 터지듯 그 꿈은 깨지고 맙니다.

베드로는 로또복권을 산 사람과 같았습니다. 혼자 신비에 취해서 헛소리를 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는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결연한 각오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뒤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난보다는 영광에 취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데리고 간 제자는 3 명입니다. 산 아래에 나머지 9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의 성향을 보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변화산을 체험하고 산 위에 머물러 있는 교인들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4 명 중 한 명은 기도와 찬양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맛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세상을 우습게 여깁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기도라든가 신앙생활에 몰두하면서 세상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찬송가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궁궐 같은 세상보다는 초막 같은 교회가 더 낫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가정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보다는 뒷전입니다. 바울처럼 세상의 부귀영화와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온 힘을 교회에 쏟으나 정작 변화하여야 할 세상은 관심 밖입니다.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지 모르나 사회 정의와 세상사는 외면합니다. 그래서 죄악 많은 세상은 포기합니다.
불교의 사찰은 주로 산 속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세상의 인연을 다 끊고 조용한 산 속에서 수양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교회가 기도원을 짓고 산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산은 잠시 영적 신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닙니다.


둘째는 변화산 아래에 있는 교인들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평생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4 명 중 세 명이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닙니다.

교회에 다니면 다른 재미거리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또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으면 왠지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빠질 수는 없습니다. 지나치게 믿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를 적당히 믿어야지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일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형식적입니다. 전도는 물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조금만 성실히 나가면 직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교인들과 잘 어울리기만 하면 기회와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체험이 없이도 제법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변화산의 체험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다시 세상에 내려와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는 교인들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 아래로 내려와 보니 귀신들인 아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그냥 산에 초막을 짓고 머물러 있었으면 이 아이는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화산은 분명 영적 체험을 한 신비로운 곳입니다. 능력을 받은 곳입니다. 그러면 그 산에서 내려와 이 세상과 맞서야 합니다. 성령 체험을 한 열정의 그리스도인들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 감동과 감격이 있습니까? 놀랍고 황홀한 영적 체험이 있으십니까? 없으면 그 신비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얼굴과 옷이 희고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 주님의 모습은 영광의 주님입니다. 부활 승리하신 주님이십니다. 장차 우리도 그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영광의 보좌에 앉혀 주실 것입니다.

신비로운 체험이란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로또가 아닙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감당해야할 본분이 있습니다. 쌀집 고양이는 쥐를 잡아야 합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명이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할 사명입니다. 복음은 산에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안방에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가서 전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면 저절로 복음을 전해지지 않습니다. 직접 세상에 나가 복음의 씨를 뿌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신비를 체험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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