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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성공을 위한 지침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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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인생의 성공을 위한 지침”이라고 정했습니다. ‘성공’은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지만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도 더 이상 성공 행진을 계속하지 못하고 주저앉으면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상실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은 이처럼 비정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 의하면, 학생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면 성공한 것이고, 사업가가 사업이 잘돼서 돈을 벌면 성공한 것이며, 직장인이 남보다 빨리 승진하면 성공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교육에 열정과 비용을 쏟아 붓는 이유도 알고 보면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서 공영방송들이 “성공”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인기리에 방영하는가 하면, 서점에 가면 ‘성공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책들이 잘 팔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성공’을 가장 귀한 가치로 여기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요즘은 설교 시간에도 성공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이라는 똑같은 말을 사용해도 그 의미를 세속적인 차원이 아닌 성경적인 차원에서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인즉,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성공은 그 내용이 다릅니다.

첫 번째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는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영적인 존재이고, 몸은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부분과 물질적인 부분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영혼과 몸이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몸이 죽더라도 영혼이 살아있으므로 그 사람의 존재가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혼이 떠난 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둘 점은 사람의 모든 행위는 몸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몸을 통해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에 불과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행위로 실현하지 않은 나쁜 생각은 회개를 통해서 얼마든지 철회할 수 있지만, 실현된 행위는 그 불행한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전자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치명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부녀자 연쇄살인범이 잡혔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피해자만 해도 21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악한 생각을 품었을지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실질적인 피해자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의 몸을 사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경우에 악한 행위를 한 잘못이 영혼과 몸, 어느 편에 있을까요? 악한 행위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영혼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몸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비유컨대 도구와 같습니다. 자동차가 저 혼자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운전자가 있어서 시동을 걸고 핸들을 움직여서 운전을 해야 합니다. 자동차는 순전히 운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우리의 몸도 이와 같습니다. 영혼이 명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자동차를 잘못 몰면 사고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길가에 세워둔 차들을 들이박거나 길가는 사람을 치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도 교도소에 가면 몸을 잘못 사용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의 몸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돈벌이 하느라 바빠서 식사도 제 때 못하고, 잠도 충분히 못자고 몸을 혹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PC 게임하느라, 채팅하느라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오락을 위해서 몸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몸의 감각을 통해서 쾌감을 맛보는데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오늘날 자기의 몸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휘황찬란하게 전등을 밝히는 향락 업소가 우리 동네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그런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술과 마약, 흡연 등도 감각적인 쾌락 추구에 속합니다.

건강할 때는 술을 많이 마셔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력을 믿고 계속 술을 마시는 동안 그 사람의 간과 위장은 골병이 듭니다. 담배는 재배 시에는 물론이고 건조시키는 동안에도 농약을 많이 치기로 유명한 작물입니다. 농약 성분이 잔뜩 묻어 있는 담뱃잎을 그대로 사용할 뿐 아니라,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몸에 해로운 약품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담배가 마약보다 더 해롭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해로운 담배를 하루에 한 갑 이상 피우면서 자기는 끄떡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만용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기관지와 폐에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에도 사람들이 몸을 가지고 행하는 악행과 잘못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리만치 많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인간들의 행위에 대하여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게 하는 것”이요, “몸의 사욕을 순종하는 것”이요,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롬 6:). 이러한 생활은 그 자체가 악이요 죄가 되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몸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실패자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판정하실 자는 우리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하신 전도서 12장 14절 말씀이 이를 증언합니다. 최후의 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들의 몸으로 행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 다시 말하면, 각자가 몸으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13절에 보면,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서로 모순됨이 없고 모두 일치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유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더라도, 병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백세가 되도록 살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정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을 보고 성공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인생의 성공자는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린 몸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소나 양을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되 죽여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대로 제물로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생활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으로만 거룩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거룩한 행실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온전한 짐승을 구별해서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함이란 세속으로부터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불신자들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다르다는 표시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먼저 생각이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생각을 할 때 그것이 우리의 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마음의 생각이 밖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곧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고 했습니다.

바르고 은혜로운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우리의 몸으로 거룩한 행실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한 어려움은 신자들이 세속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보더라도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 기독교인인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어디서나 빛을 발하고, 소금은 어디서나 짠맛을 냅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당신의 정직한 행동을 보니까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군요” “당신의 친절한 태도를 보니까 기독교인인 것이 분명합니다” 어딜 가든지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또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모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마땅히 할 바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배드릴 의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영적 예배에는 교회 바깥에서의 생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나 상점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그 자체로서 성공적인 인생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몸의 중요성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몸은 우리의 생각을 행위로 나타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항상 옳다면 우리는 항상 올바른 행실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몸을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악한 생각을 하면서도 바른 행실을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위선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위선적인 행위는 도금한 것이 벗겨지듯이 오래잖아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행실을 하려면 생각이 올발라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거룩한 생각, 바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생각을 지배하는 영혼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올바른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결과 무서운 죄를 저지르고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냥 방치해 두면 선한 생각보다는 악한 생각이 일어나기 일쑤인데,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과 바른 행실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방법으로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 곧 노아 당시에 사람들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는 구절이 나옵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너희 마음을 변화시키라”고 하지 아니하고, ‘변화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실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변화를 받게 됩니다.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나섰다가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날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삼상 10:9)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불신 가족이나 이웃을 위해 기도하되, “하나님, 저들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주님을 믿게 해 주옵소서”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문에 보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라는 구절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마음의 변화가 어느 시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은혜로 나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새로워 졌다고 해서 방심하면 어느 새 마음에 때가 끼고 어두워지고 맙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 되었습니다.

일개 농부에 불과했던 사울이 선민의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사울은 왕이 되고 나자 그만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새 마음을 지속하지 못하고 불신앙과 교만으로 그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종내 돌이키지 아니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다윗을 보십시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또 시편 23편에서 그는 하나님을 목자로, 그 자신을 양으로 비유해서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다윗을 사랑하셔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사울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다윗이 중년에 이르러 그만 새 마음을 상실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런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로 인해 범죄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아를 최 일선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제 6계명과 제 7계명을 범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혹 그럴 수 있겠다고 하겠지만, 다윗과 같은 사람이 그처럼 무서운 죄를 범하다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다윗의 경우를 통해서 방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방심 앞에서는 다윗과 같은 신앙인도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죄를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는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 정도면 됐다고 자만했던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 마음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스도인치고 신앙생활을 잘해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그만 신앙적인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봅니다. 어찌하여 선택의 순간에 아브라함처럼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 마음이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으면 다윗처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함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변화 받는 데는 우리 각자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깨달음을 주실 때 기쁨으로 성령님의 지시에 순종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감화에 순응하면 마음이 새롭게 되는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성령님의 감화를 무시하고 거절하면 성령의 소욕이 소멸되고 우리는 여전히 옛 상태대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위한 전제로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불신 이웃의 삶의 방식을 본받아 행하면 신앙의 길에서 낙오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4장 4절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은 세속을 따르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계속해서 마음이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기 원하시거든 이 악하고 패역한 세대를 본받지 마시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마음이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게 되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특별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하였고, 디모데후서 3장 15절로 17절에는 “15)…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으며,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성도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고전적인 문학작품 정도로 여길 뿐이지, 성경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거듭난 성도라야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늘 마음이 새롭게 되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복음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것을 빌립 집사가 만나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시는 병거를 타고가면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으나 선지자가 말한 고난 받는 종이 누구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시는 빌립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라고 했습니다. 이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내시가 깨닫고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하고, 병거에서 내려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을 무조건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억지로 풀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면 말씀 가운데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데 길을 잃고 실패자가 될 리가 만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지만 정작 그 바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자가 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거부가 되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인도하심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성공을 위한 지침은 세상 서적을 통해서, 혹은 소위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첫 번째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오신 성도님 마다 이 세 가지 일을 준행하심으로 인생의 성공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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