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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복음 21장(10) 내 뒤에 계신 주님 (요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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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 빈틈없는 사랑의 그물 >

몇 해 전의 베스트셀러였던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란 책을 보면 ‘아버지의 우산’이란 글이 있습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고물장사였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매우 창피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면서 조금 돈을 모아 식당을 차렸는데 그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다시 부모님이 함께 우유 배달을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우유 배달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번은 비가 엄청나게 내릴 때였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붕 위에서 물이 새니까 짜증나서 도저히 공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깁스를 한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셔서 1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어 골목길을 뒤지다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지붕 위에 시커먼 물체가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지붕 위에서 우산을 들고 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지금도 힘이 난다고 합니다.

사랑은 조용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조용히 우리를 후원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 안에서는 희망과 대책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는 희망과 대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그물이 우리를 향해서 촘촘히 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요란한 큰 소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용한 가운데 곳곳에 펼쳐진 주님의 사랑의 그물은 빈틈이 없습니다. 주님의 어느 행동, 어느 말씀을 봐도 제자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용서의 선율이 흐르는 해변의 파티 >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딴청을 부리며 잡은 고기를 다 세어보니까 큰 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그 일이 끝나니까 이제 더 이상 딴청 부릴 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그들은 베드로가 고기를 셀 때 숯불에서 불을 쬐는 척 했거나 옷을 말리는 척 했을 것입니다. 그런 어색한 상황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얼마나 다정다감하신 말씀입니까? 그 한 마디 말씀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용서와 위로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경상도 말로 표현을 하면 “밥 묵자!”라는 말인데, 그 무뚝뚝한 말에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용납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처럼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식사가 없으면 왠지 인간관계도 깊어지지 않습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는 “당신과 친하고 싶다.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을 용납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 먹어!”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을 여전히 사랑한다. 너희들의 잘못을 다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용서를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가끔 보면 정의와 공평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람은 대개 용서를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용서 자체가 너무 불공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원래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사리를 따지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이해도 아닙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진짜 용서가 아닙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용납하고, 나에게 큰 어려움과 실망을 시킨 사람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용서를 못합니까? 결국 그것은 은혜가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었고, 은혜의 연료가 바닥났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다는 것은 지금 은혜가 없다는 말도 되고 앞으로 받을 은혜도 없다는 말도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용서하지 못하면 그 불행의 열매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옵니다.

우리는 힘써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는 본능적으로 힘든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용서를 베풀어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옥의 자식인 우리를 천국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용서가 아주 힘든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은 불가능한 용서도 가능하게 만듭니다.

용서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행복과 평안은 용서하는 사람이 얻는 것입니다. 용서의 영성이 흐를 때 사람은 가장 활력이 넘치게 되고, 가장 희망이 넘치게 되고, 가장 사는 맛이 나게 됩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용서임을 아시고 “와서 조반 먹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밥부터 먹이십시오 >

그리고 주님의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말씀에는 주님께서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내면을 채워주시려는 주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참 목자의 마음입니다. 참 목자의 1차적 관심은 ‘먹을 것을 주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의 먹을 것을 말하지만 육신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는 대접만 받아야 되는 줄 압니다. 식당에 가면 제일 안 내는 사람 3순위가 선생님, 2순위가 법조인, 그리고 1순위가 목회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도 식당에서 성도들을 위해 내고 싶습니다. 성도들은 미안해하며 말리지만 목회자도 내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 내는 재미를 박탈하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내는 재미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몇 년째 마이너스 통장 생활을 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체질인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1984년도에 신앙이 깊어지면서 부모님께 받은 용돈조차 대부분 교회와 교회 식구들을 위해 썼습니다. 대학 졸업 후 회사에 다닐 때에는 난생 처음으로 큰 돈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18년 전에 주 5일 근무를 하는 다국적 재벌기업인 일본 스미토모가 출자한 외국계 회사에 다녔기 때문에 월급도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월급을 쓸 데가 없었습니다.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결혼 준비자금으로 모아놓았을 텐데 저는 마음만 맞으면 결혼은 그냥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축도 거의 못하고 그 많은 돈을 주로 교회와 교회 식구들을 위해 썼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어디 가면 제가 95%는 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지금은 목회자로서 어쩔 수 없이 대접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대접하는 분들의 내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지만 가끔 저도 내고 싶은 충동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가끔 목회자도 내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그런 기쁨을 주기 위해서 식당에서는 대접받는 척 하면서 나중에 슬쩍 통장에 그 이상의 생활비를 넣어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마음입니까?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 선교와 구제라는 통로가 없었더라면 무슨 재미로 목회를 할까?” 사실 ‘대접받는 기쁨’도 크지만 ‘대접하는 기쁨’은 더 큽니다. 그런데 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다 보면 어쩔 수 대접하는 기쁨을 누릴 기회가 적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교와 구제를 통해서 대접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선교와 구제가 즐거운 일입니까? 이 세상에서 누구를 먹이고 대접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목회의 제일 초점은 “어떻게 하면 성도를 잘 먹일까?”에 있어야 합니다. 잘 먹이고 나서 사명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일깨우실 때에도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 먹는 것입니다. 요새 성도들이 참 고생하는 것을 모든 목회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요새 목사 노릇 하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성도 노릇하기가 더 힘듭니다. 세상에서 6일간 열심히 일하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 일합니다. 그리고 대가를 조금도 바라지 않고 헌금까지 하면서 일합니다. 그런 헌신적인 분들을 보면 자연히 “어떻게 하면 잘 먹일까?” 하는 것에 제일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성공이 제일인 줄 아는 요새 사람들은 사명을 잘 맡기는 목회자의 리더십(leadership)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목회자의 밥 짓는 마더십(mothership)을 더 중시하실 것입니다. 사명만 강조해서 생긴 사명은 대개 가짜 사명입니다. 그러나 밥 잘 먹고 그 사랑의 식사에 감격해서 생기는 사명이 진짜 사명입니다.

요새 말하는 세상적인 성공 리더십은 일을 조직적으로 잘 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밥을 먹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밥 잘 먹이는 일에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저희 요삼일육선교회가 ‘선교사 양성과 후원’이라는 비전을 가지면서도 웹사이트를 통한 ‘말씀선교’에 주력하는 이유도 밥을 잘 먹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밥을 잘 먹고 영혼이 풍성하게 된 사람에게는 선교에의 열정이 자연스럽게 열매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 조반에 담긴 주님의 사랑 >

결국 갈릴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아침의 비치파티는 제자들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 받은 시은소였습니다. 그 파티에서 제자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제일 관심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소한 고민까지 아시고, 우리의 소리 없는 신음까지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우리가 주님을 크게 마음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대책이 없을 때에도 주님은 다 대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숨을 쉬고 있는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향한 찬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못하지만 주님은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의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도 참고는 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훌륭한 분의 소리는 잘 들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양심의 소리이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면 의로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희망이 있다고 하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 사랑의 결과 >

예수님의 조반 먹으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아마 그들의 마음에는 안도감과 함께 확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신 줄 알고 “당신은 누구세요? 주님처럼 변장한 분 아니세요? 혹시 주님이 영으로 오신 것은 아니세요? 정말 부활하신 주님이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알았다”는 말은 “확신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왜 믿는 사람들이 가끔 회의에 빠지고, 낙심합니까?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면 문제의 의미도 알게 됩니다. 결국 해결책도 알게 되고, 우리의 앞날에 대해서도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만납니다. 길이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문제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더 알려고 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문제의 의미도 더 알게 되고, 문제해결의 길도 더 잘 보이게 됩니다. 주님을 알면 내 병의 의미, 내 가난의 의미, 내 문제의 의미, 내 상처의 의미도 다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주님을 알면 온갖 패배의식으로 가득 찬 제자들도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머리를 주셨습니까? 주님을 더 알기를 힘쓰고 생각 좀 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새 인터넷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사람에게 ‘무뇌충’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뇌가 없는 벌레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뇌충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보다 더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에 대해 알아야 할 핵심적인 사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쌍둥이도 다르고, 햇빛도 아침 해와 저녁 해가 다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충성하고 헌신할 때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반해도 사랑하고, 우리가 실패해도 사랑하고, 우리가 죄에 빠져도 사랑하고, 우리가 못난 모습을 보여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배경으로 내일의 지평을 담대하게 열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시면 겁낼 것 없습니다.

‘베어’라는 영화를 보면 하루는 아기 곰이 무서운 퓨마를 만납니다. 아기 곰은 필사적으로 도망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처해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아기 곰은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서서 큰 소리를 내는데 그 순간 기세등등하던 퓨마가 슬그머니 몸을 돌려 도망쳤습니다. 알고 보니까 아기 곰 뒤에 어느새 어미 곰이 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 와도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우리를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남편이 매번 술 먹고 들어와서 집안 물건 내던지면 아무리 신앙 좋은 아내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포기합니다. 요새는 목사도 포기한 사람을 ‘목포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거의 목포댁입니다. 그런 사람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치 없게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가치 있게 보십니다. 그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그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기도의 선한 결과를 확실히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확신이 없는 기도는 역사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축복의 역사는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그 확신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결국 진짜 기쁨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의 개념을 수정해야 합니다. 남보다 높아지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을 그렇게 생각하면 삶은 전쟁이 됩니다. 성공은 내 안에 기쁨의 원천이 있는 것이 진짜 성공입니다. 남보다 높아지면 약간의 쾌감은 있겠지만 진짜 영혼의 기쁨은 없습니다. 진짜 기쁨은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풍성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풍성한 영혼이 되면 진짜 기쁨이 주어질 것이고, 결국 그 기쁨을 소유한 삶이 진짜 성공적인 삶입니다.

< 소리 없이 곳곳에 미친 하나님의 사랑 >

우리는 우리 주변의 곳곳에 미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기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주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가끔 말씀 준비하면서 밤을 샐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새벽기도 후에 말씀준비 다 마치고 8시쯤 집에 가서 잠깐 눈을 붙이는데 대략 9시 30분에서 50분까지 괘종시계와 핸드폰 시계를 3개를 맞춰놓습니다. 9시 50분에는 일어나야 교회에 10시 30분까지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주 전 주일 아침에 누가 “띵똥!”하고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집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 그때가 10시 20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정신없이 자고 있는 저를 깨워주시고 예배에 늦지 않게 해주신 것입니다. 신기한 은혜가 아닙니까?

얼마 전 아침에 기독교 C3 TV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자와의 만남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교회를 방문하겠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때 그 전화가 없었으면 저는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방안에 연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가스 불을 켜놓고 잠들어서 집안이 연기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전화가 온 것도 생각해 보면 신기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서 얼마나 신기하게 많이 펼쳐지는지 모릅니다. 그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가면 우리의 삶에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잠깐의 실패는 혹 있어도 인생 전체의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무디 목사님이 어린 딸과 산책을 하는데, 눈이 많이 쌓여서 무디 목사님이 딸의 손을 붙잡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딸은 혼자 뛰노는 것이 신나니까 아빠 손을 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곧 딸은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그때서야 딸이 말합니다. “아빠! 손!” 그러자 아빠가 큼지막한 손으로 딸의 조그만 손을 꽉 붙들어서 딸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순간마다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 뒤로 딸은 한번도 눈길에 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면 때로 중심을 잃는 일은 있어도 넘어져 코가 깨지고 인생이 파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예수님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대학에 다닐 때도 아무 생각 없이 다녔습니다. 그러자 대학 4학년 때에는 장래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때는 산다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 실감 났습니다.

그러나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사는 길이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새롭게 체험하면서 삶에서 하나님의 일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게 되었고, 특히 교회를 위해 힘써 봉사하면서 점차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는 언제나 길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부족하고, 너무 자주 실패하고, 너무 자주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용납하시고, 채워주시고, 동행하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죄의 역사는 크지만 은혜와 용서의 역사는 더욱 큽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은혜의 식탁을 준비해놓고 초청의 말씀을 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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