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의 생리(生理) (마 16:13-28)

  • 잡초 잡초
  • 432
  • 0

첨부 1


-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오늘은 저희 교회가 7번째 맞이하는 감사의 날입니다. 빛과 소금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저희가 모인지 만 7년이 된 것이지요. 7년이면 적지 않은 세월이죠? 처음 14명이 시작해서 7년동안 50명이라, 장사로 치면 그렇게 잘한 장사는 아니지요? 50명도 50명 나름이지.. 정말 똘똘 뭉친, 마음이 일치해서 똘똘 뭉친 50명이라면 "야 그래도 대단한 잠재력이 있다.." 라고 하겠는데 우리가 지금 그렇습니까? 여전히 제 각각이고... 글쎄, 제가 생각하는 교회의 비젼, 소망, 철학과 방법에 우리 교회 식구 중에 정말 마음으로 동의하고 따르고 그런 형제, 자매들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 싶어요. 솔직히.
처음에 교회 시작할 때에는 다 그런 마음이 있어 보였습니다. 저랑 같이 교회 시작하면 금방 멋있는 교회, 큰 교회로 성장할 것같고 그래서 나도 그 가운데서 멋지게 사역하고 그런 기대도 있었던 형제, 자매들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왠걸, 오히려 자신을 힘들게 하고 실망스럽고 제가 사역하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어 그래서 떠나간 사람들, 한둘이 아니었고... 그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남아 있는 식구들이 50명이라는 것이 오히려 정말 감사하지요.

그래서 여전히 저희는 7주년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야, 7년이나 지냈는데 50명밖에 안되었고 이게 뭐냐?" 이렇게 자조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 그래도 감사하자, 마지 못해서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저는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7년을 보내며 제가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감사의 이유들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7년전하고 지금하고의 모습과 마음... 돌아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아둘람굴의 교회의 소망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의 마음을 넓혀주셔서 사랑의 삶, 사랑의 공동체.. 성화의 혁명에 대한 꿈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시고 그리고 서로에게서 그 순수함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저희 가진 것에 비해 많이 베풀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로 쉬운 성장에 배부르게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갈등과 진통을 겪게 하심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연단하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세상의 넓은 길과 생명의 좁은 길을 구분하여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성장의 비젼보다 곧은 정신, 얼이 중요함을 깨우쳐 주시고 확신시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종교적 허영을 미워하고 실재의 충실하고자 하는 강한 믿음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타협하지 않고 더디가도 올곧은 길을 가고자 하는 독한 마음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상해요? 다들 눈초리가 "우리 목사님 참 이상하시네" 이렇게 보는 것같습니다. 아직은 제가 소망하는 교회의 모습, 교회를 세우는 철학과 원리들.. 아직은 다들 이해 못하지요? 이해 못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지금은 제가 이상하게 느껴져도 그런데 머지 않아 이해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교회가 무엇인지를 실재적으로 깨우치게 되면, 당신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베푸셨으며 그리고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기대를 갖고 계시는지... 정말로 눈동자처럼 지켜 보시고 주목하고 계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가족들의 눈뜸을 위하여, 그래서 오늘은 제가 교회의 생리(生理)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생리, 살 생(生)자에다가 이치 이(理)자입니다. 살아있는 이치, 살게 하는 이치 이런 뜻이지요.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생리란,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 원리. 생활하는 습성이나 본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생리란, 교회가 살아있는 원리, 교회가 살게 하는 이치 이런 뜻이지요. 교회를 교회답게 살아있게 하는 이치, 원리가 교회의 생리입니다.

유기체에는 다 살아가는 이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식물은 햇빛과 물과 양분이 공급이 되어야 잘 살아갑니다. 자동차가 잘 굴러 가려면 휘발유, 윤활유, 냉각수들이 적절이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는 수익을 내야, 돈을 벌어야 살아있지 돈을 못벌면 부도가 나지요. 회사가 살아가는 이치, 회사의 생리는 돈을 잘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살아가는 이치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여자는 사랑을 받아야 살고 남자는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살고 정치가는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살고 스타는 인기를 먹어야 살고 가을의 과일은 따스한 가을 햇살을 많이 받아야 제 맛이 나고 맹수는 산 짐승을 잡아 먹어야 살고 독수리는 주검을 먹어야 삽니다. 천하의 모든 유기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원리, 이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생리,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가 죽지 않고 생명력있게 살아있게 하는 이치, 원리는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교회가 죽은 교회가 있고 산 교회가 있어요? 그냥 있으면 있는 것이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는데, 교회 중에는 죽은 교회도 있고 산 교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3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하실 때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진단하십니다. 세상에는 죽은 교회도 있고 살아있는 교회도 있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명목상으로는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도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뭐, 교회가 교인없고 운영할 재정이 없으면 문닫는 것이지..." 물론 교인이 하나도 없으면 죽었지요.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계3장의 사데교회, 역사의 고증에 의하면 사데교회는 교인도 적지 않았고 재정도 넉넉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다 라는 사실을 보면, 교회가 죽고 사는 데에는 교인의 많고 적음, 교회 돈의 많고 적음과는 무관한 다른 이치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면 교회는 교인많고 돈많고 이런 것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교회답게 살아가는 데에는 다른 이치... 교회에만 적용되는 생리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만 적용되는 교회의 생리, 교회를 교회답게 살게 하는 이치는 무엇입니까? 오늘 <마16장>의 본문에서 교회의 생리를 우리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mission, 사역이 교회를 세우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처음 언급하신 곳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본문이지요. <17,18절>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역사적으로 유명한 본문이라서 도리어 문맥에 따른 해석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흐름, 맥락에 따라 교회의 생리,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교회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들로서 세워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천국의 열쇠까지 언급하신 예수님의 대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분명하게 고백한 신앙고백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중의 한 사람 하듯이, 좋은 사람, 선지자,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는 그냥 사람들만 모여 있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 오니까 참 좋더라.. 목사님 설교도 괜찮고 분위기도 괜찮고.. 이런 모습만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탄생을 알려주는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합니다. 교회를 이룬 사람들,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인간의 구미를 잘 맞추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그냥 멋있게 보이는 그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또 교회는 우선적으로 자선단체도 아닙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 마음 둘 곳이 없는 사람들, 이들에게 인간적 위로와 적선을 베풀어 주는 그것이 우선적인 목적이 기관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교회에 대한 기대, 사랑의 공동체라고 하면, 자기들 표면적 필요, 예컨대 물질적 도움, 정서적 위안, 영적 평안.. 이런 것들을 주기를 기대하지만 교회는 우선적으로 세상의 위안부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피상적 필요만을 베풀어 주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명확하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들의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어떻게든 교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신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이대로 살 것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살 것인가?" 이 질문 앞에 대답의 이유를 추구해 보십시오.
사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고 인정하여 모셔 들이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러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을 때에.. "사람들이요, 선생님을 침례 요한이다, 예레미야다, 엘리야다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러던데요"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아마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띄엄띄엄 이해하는구나!" 그리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고 베드로가 정답을 딱 맞추었을 때... "내가 무식해 보이는 얘를 제자로 삼기를 참 잘했구나!"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 예레미야, 침례 요한... 등처럼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과의 비교를 거부합니다.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 메시야,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사람들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절대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마음의 삶의 하나님, 제일 존괴하게 여기는 절대자로 모시는 것이고 예수님의 뜻을 절대 가치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의 한 특징이 상대성이라.. 현대인들은 절대가치를 둔다거나, 절대자로 모시는 것을 껄끄러워합니다. 그냥 그때그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대로, 기분내키는대로 살고 싶어하는 것이 현대인들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편리에 따라 혹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변이하고 운용하는 그런 식으로 믿는 모습이 보편적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생생하게 누린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에게 공통점은 절대 신앙입니다. 우리 시대의 신앙의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김준곤 목사님, 그분이 매년 CCC 수련회 때마다 강의하시는 것이 오색의 신앙인데, 그 중에 첫 번째가 절대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그 절대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 교회의 지나간 날의 해석, 젊은 교인들, 그래도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있는 교인들, 괜찮은 목사님 설교... 왜 좋은 가능성, 좋은 철학, 여건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절대 신앙의 모습이 부족합니다. 우리가 기복적이라 비판하는 주일 성수를 하는 사람들보다도 못한 신앙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7주년의 감사의 마당에서... 예수님의 우리의 주님이심을, 예수님의 우리 교회의 절대자이심을 다시금 고백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우리의 절대자이시고 예수님의 뜻이 절대 가치임을 깨우쳐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사랑과 헌신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은혜 앞에서 "하나님, 저희 교회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분명하게 고백하는 신앙, 교회의 기초가 명확하게 해 주십시오" 기도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예수님이 절대자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위에 세워지는 교회.. 이것이 교회가 살아있는 첫 번째 이치, 교회의 생리입니다.

2. 둘째로, 교회는 사람의 힘과 지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워 가십니다.

<18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I will build my church..."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강조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이 세워가십니다. 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과 지혜로 세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람이 아무리 용을 쓰고 온갖 재주를 다 부려도 예수님이 뜻하지 않으면, 사람은 모여서 모임은 만들 수 있어도, 진정한 교회는 안세워지고 반대로 사람은 좀 허술해도 예수님의 뜻하심이 있으면 교회는 세워집니다.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시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중요한 관건은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생명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데교회, 많은 교인과 재정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께서 죽은 교회라고 단정하시고 책망하시는 줄 아십니까? <계3:2,3>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 무슨 이야기입니까? 듣고 받은 말씀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고 세상적 가치관, 세상적 철학, 인간적 방법들을 가지고 교회를 만들고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많고 재정도 넉넉하였지만 죽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는, 정말로 예수님이 세워 주시는 교회가 서기 위하여는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배를 왜 드리며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헌금을 왜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 말씀에서 배웠습니까? 아니면 그냥 전통에 따르거나 세상에서 부조하듯이 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도, 교회의 운영과 치리도, 인간이 자연스럽게 당연시 하는 것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배우고 확인하고 새로운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 예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 뜻을 좇아서 순종하는 것, 그것이 교회가 사는 이치, 생리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운영뿐만이 아니라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가정생활, 직장생활, 인간관계... 사람들의 상식적인 생각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지혜와 반듯한 가르침, 세상적 가치관과는 다른 성경적 가치관이 이 하나님의 말씀안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뜻을 배우고 그 뜻을 따름이 교회가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공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새로운 삶은 그냥 사람의 느낌과 사람들의 상식선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적용함으로써 터득됩니다.
듣고 받은 말씀을 무시하고 인간적 생각, 세상적 원리에 따라 삶을 드릴 때 사데 교회처럼 죽은 교회가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름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해 주는 열쇠입니다.

3. 셋째로, 세 번째 교회의 생리, 교회가 살아있는 원리는 교회는 역설적 신앙을 먹고 세워져 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순간이 <21절>입니다. "이 때로부터"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 때로부터 예수님께서 영광의 부활이 있기 전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서 제자들의 교회의 기초가 놓여진 때로부터 예수님은 고난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서는 "야 이제 기초가 세워졌으니 잘 세워보자, 멋있게 세워보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멋있게 교회가 세워지는 청운의 꿈을 갖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상한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한번 말씀하셨다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르침은 일면 주입입니다.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고난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러니 제자들의 마음에 거부감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참다 못해 용기있는 베드로가 나섭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말씀 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십니까? 절대로 그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야 이 마귀같은 놈아, 넌 나가 놀아라. 니는 나 위한다고 하지만 그게 나를 거치게 하는 것이다.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을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다..나가 놀아라"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그 호됨의 뉘앙스를 설교 중에 인용할 수 없을 정도로...주변 사람도 민망해서 보기 힘들 정도로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24절> "이에.."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깨우치십니다. 뭘 깨우치십니까? <24-27절> 무슨 내용이요?. "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는 것이요, 목숨걸고 따르는 것이니라..너희가 그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나를 따르면 진정으로 살고 어떻게 좀 예수님 믿고 나도 성공 좀 해 볼까, 잘 살아 보세 해 볼까 하면... 너희는 반드시 죽는다." 이 패러독스, 역설의 신앙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 믿고 따르는 진실이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따르는 본질이 이것입니다. 역설.

인간의 생각으로는 살 궁리를 하지요. 교회도 인간의 생각으로는 점점 더 번성하고.. 교인도 해마다 늘어나고 재정도 증가하고.. 병들고 사업망하고 어려움 겪는 교인 없고.. 모두가 평안하게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래서 처음에는 회사 빌려서 나중에는 상가 건물 얻어서 그러다가 예배당 짓고.. 수양관 짓고 교회 묘지사고 해외에 지교회 세우고... 언덕 위에 하얀집짓고 처럼 인간의 생각으로는 점점 더 풍성하고 자라는 것이 소망이지요. 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인간은 숫자에 약합니다. 마치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슬로건처럼.. 10만명 교인, 만명 사역자, 이것은 잘나간다는 한강변의 A교회의 표어이고 3만명 교인, 3천명 제자, 3백명 선교사..그래서 예레미야 33:3절, 그럴 듯 하고 혹하지요? 이것은 저 남쪽의 G 교회의 슬로건입니다. 모두다 인간의 생각입니다.
아무 탈없이 점점 더 번성하여 가는 것, 숫자 통계가 늘어나듯이 더 벌고 더 많이 모으고.. 그러면 좋은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의 생리입니다.

신앙의 진실, 교회의 진실은 그것이 아니고 역설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가 죽고 죽고자 하는 자가 삽니다. 번성하고 창성하고 크게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는 망하고 기꺼이 희생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망함을 각오하고 예수님 정직히 따르고자 하는 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삽니다. 그래서 교회는 망해야 삽니다. 망해야 산다.
볼까요? 인간의 생각으로 하면 일요일 다리 뻣고 쉬고 정리하고 가끔은 주말에 들로 산으로 놀러가고 그래야 행복할 것같지 매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배당에 붙어 있어서 도대체 난 언제 쉬란 말이냐? 그게 무슨 행복이냐? 그리고 왠 신경쓰이게 성경공부야,, 그것도 예습도 해오라고 그러고...인간의 생각으로 하면 말이 안되지요.

또 인간의 생각으로 하면 누가 자기가 번 소득의 10%, 20%를 딱 떼어 놓는 것이 살림 잘하는 것이라고 하겠어요? 재형저축, 곗돈 떼기도 바쁘고 살림하기도 바쁜데... 헌금은 나중에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교회는 헌금 많이 했다고 광고를 해주나, 광고라도 해주면 마음에 뿌듯함이라도 있지...인간의 생각으로는 10%, 20% 꼬박꼬박 헌금하는 것, 살림 쪽박차기 딱 쉬운 것이지요.

또 인간의 생각으로 하면 수험생이 공부하기도 바쁜데 왠 주일 예배에 성경공부 교회봉사까지... 그렇게 주일날 피곤해 가지고 언제 공부하냐... 다른 사람들은 일요일이면 총정리 복습한다고 하더라... 인간의 생각으로 하면 수험생이 되면, 시험기간이 되면 교회에서 있는 시간도 좀 줄이고 그래야지 그렇게 교회에만 미쳐가지고... 망하기 딱 알맞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믿는 신앙에서, 교회에서 그것이 전부입니까? 인간의 생각이 전부입니까?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에릭 리들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바보 천지같은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더 큰 영광을 부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랜드 신화" 주일에 옷가게 문을 안연다?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망할 각오를 한 그들에게 대한민국 의류업체 최고의 매출이라는 신화를 선물하지 않았습니까?
김종환 전도사, 공부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읽고 기도하는 것의 우선순위..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지혜를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콜게이트 치약의 미스터 콜게이트, 제일 많은 헌금을 하고자 했던 그에게 제일 많은 부를 안겨 주지 않았습니까? 유한양행의 김일한 씨, 한글라스의 최태섭 장로, 노일대 형제님 등등 수많은 증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 말고...여러분,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드려서 인간의 생각이 주는 염려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역설의 신앙이 진리임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인간의 계획, 생각대로 성공, 성장을 위하여 지혜와 행동을 드려서 착착 성장해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이 역설의 신앙이 살아있느냐 죽었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순종했건만 하나님은 생명 이상의 것으로 살려 주시는 이 기쁨, 이 영광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기쁨은 우리끼리 참 수고 많았다, 서로 격려하고 그 정도에서 누리는 기쁨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는데 사람은 생각지 못하였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심, 어느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부인할 수 없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한 기쁨이 교회의 기쁨입니다.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거든, 망할 각오로 따르십시오. 아니 정말로 한번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망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한번 보십시오. 죽었다가 살리시는 놀라운 경험을 한번 해 보십시오.
교회의 생리, 교회가 살아있는 이치는 이 역설의 신앙이 살아있느냐입니다. 사랑하는 교인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소망으로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되셨습니까? 무슨 소망으로 주일이면 빛과 소금의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십니까?

교회는, 사람의 일처럼 우리들끼리 잘 협력해서, 힘을 잘 모아서 잘 해보자, 이래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은 망해도, 사람의 생각으로는 망하기 딱 알맞는 것같아도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한 순종을 드릴 때..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고 세워집니다.

그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 경험에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경험에, 교회의 생리의 경험에 당신도 동참해 보시도록 초청하고 싶습니다. 저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 죽어 보시지요. 그랬다가 다시 살아나 보세요.

또 하나의 매듭을 짓는 오늘 감사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당히 사람들의 좋은 모임으로 놔두지 않으시는 것에 감사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적당히 사람들의 좋은 모임으로 놔두지 않으심에는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시고자 하시는 거룩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거룩한 뜻을 갖고 계심에 감사를 드립시다. 사실 이는 세상의 어떤 보화를 가진 것보다도 더 기뻐하고 가슴 뿌듯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리고 그 뜻 앞에서 정직한 믿음의 응답을 드림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심을, 절대자 하나님이심을 고백드리고 싶습니다. 목숨바치고, 정열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우리의 사랑의 주님이심을 다시금 고백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그 믿음으로써.. 오늘 십자가를 지듯이 기꺼이 손해를 보고 망하면 망하리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의 정신으로 믿음과 삶을 드리는 고백으로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공을 초점으로 생각하고 드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름이 초점이 된 살아있는 신앙으로 우리의 믿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의 교회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경험하고 드러내는 교회가 세워지는 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비로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그 능력이 역사되어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시고 기쁘게 하시고 춤추며 뛰어 놀게 하시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이 소망의 기도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