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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요 20:2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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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백선 목사 (보람교회)

유전을 발굴해서 대재벌이 된 회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벌 회장이 죽자 상속권이 있는 가족들이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의 긴장은 다름아닌 누가 제일 좋은 상속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고문변호사가 회장의 유언장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언장을 들은 다음에 한 마디라도 이의를 달게되면 상속받은 재산은 모두 다 빼앗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장은 큰 아들에게 큰 석유회사의 일부를 준다고 유언했습니다. 큰 딸에게는 목장을 주고 셋째, 넷째 자녀들에게도 차례대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후계자라고 언질까지 주었던 손자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손자는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남긴 유산은 없습니까?" 하고 물어요. 그러자,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더니 웬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손자는 속으로 "아, 저 안에 더 많은 것이 있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스 안에는 12개의 비디오 테잎만 있었어. 이들 비디오 테잎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같으면 어떡하겠습니까? 비디오 테잎을 유산으로 감사하며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조건이 있었습니다. 비디오 테잎은 한 달에 한 개씩만 보고 비디오에서 지시한 대로 한 달 동안을 살면서 결과를 보고해야 합니다. 고문 변호사가 OK 하면 다음 비디오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만일 낙제를 하면 집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12개의 비디오를 볼 자신이 없다면 지금 그만두라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주겠다는 겁니다. 이런 조건을 듣고 손자는 펄쩍 뛰면서 "이럴 수 없다. 다 필요없다."고 소리쳤습니다. 이제까지 돈 한 푼 벌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과 기분으로 살았던 손자는 비디오 유산을 받고 무척 속상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며칠이 지나자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너는 지금 당장 텍사스 농장으로 가라. 그리로 가면 나의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손자는 비디오의 지시대로 텍사스 농장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멋진 캐들락이 와서 자신을 모셔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트럭 한 대가 왔어요. 트럭에는 할아버지 친구와 변호사가 타고 있었어요. 보니까 자신이 앉을 곳이 없었어요. 그는 "내 자리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할어버지 친구와 변호사가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어서 너의 짐을 싣고 알아서 타라"는 거예요. 기분이 더럽더래요. 그렇지만 어떡합니까? 그렇게 해서 농장에 도착했습니다. 할아버지 친구는 손자가 한 달 동안에 해야할 하루 일과를 설명하였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6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 농장에서는 그런 고급 옷이 필요없다. 노동할 옷으로 갈아입어라." 설명하는 동안 고문 변호사는 한 달 후에 오겠다며 가버렸습니다. 손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농장 경계선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이 터지도록 나무를 박았습니다. 생전 처음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해보았어요. 피곤했지만 일하는 보람을 느꼈어요. 그는 일을 하면서 깨달기 시작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돈 쓸일이 별로 없구나. 노동이 주는 기쁨이 이것이었구나."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 후에 변호사가 와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어요. "예, 돈이 유산이 아니라 일이 유산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첫 번째 과정을 통과한 손자는 두 번째 비디오 테잎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1,500달러의 현금을 가지고 가서 한 달 동안에 네가 보기에 제일 귀하다고 생각되는 다섯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1,500 달러를 네 마음대로 사용해보라는 시험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돈을 인생의 도구로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돈이란 선한 뜻에 쓰여지면 좋은 도구가 되지만 악한 데 사용하면 타락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돈은 쓰지 않고 그냥 쌓아두면 녹이 슬게 된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돈이 귀하기는 하지만 돈처럼 쓸데없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회장은 물질 때문에 자녀들이 믿음을 잃고, 형제들이 서로 반목하는 것을 보면서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 손자가 돈을 잘 사용하면서 진실한 친구를 얻기를 바란 것입니다. 진정한 유산의 가치를 배우라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손자가 인생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배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비디오를 하나씩 열어본 손자는 12개의 비디오를 보고 비로서 할아버지의 믿음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믿음1800의 유산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배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지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이런 복을 받게 되었는지 깨달았어요. 절망 가운데서 축복의 문을 열었던 것이 기도의 힘이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겁니다. 그런 후에 그는 "이제야 할아버지의 뜻을 알겠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보다 더 큰 일을 할 것 같습니다."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믿음과 축복의 비결을 알게 된 손자에게 아끼던 연구재단을 유산으로 남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복 받은 사람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말합니다. 축복의 문은 믿음으로 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고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설 때에 영적으로 강건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격언에 보면, "돈을 잃어버린 자는 큰 것을 잃은 것이다. 친구를 잃어버린 자는 더 큰 것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믿음으로 축복의 문을 열었지만 축복의 부산물 때문에 자식들은 믿음을 잃은 가정이 있습니다. 믿음을 잃고 돈으로 살려고 덤빕니다. 돈으로 뭐든지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돈 때문에 형제들이 반목합니다. 재벌 회장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물질은 독이요 저주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자에게 믿음을 훈련시키고 믿음으로 사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존스는 말하기를 "오늘날 신자들의 비극은 가장 최소한 믿음으로 가장 최대의 인생을 즐기려는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믿음과 축복은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년 가을학기에 연세대에서 "현대사회와 정신건강"이라는 교양강좌가 있었습니다. 60여명의 학생이 강의를 들었는데요. 담당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대요. 몇 명이나 손을 들었는지 아십니까? 수강생 60명 중의 남학생 1명이 손을 들었답니다. 그것을 보고 교수가 "이 친구가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하고 되묻자, 학생들이 한바탕 웃더래요. 요즘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어요. 독신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독신자가 늘어난 것은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다 자유스럽게 살기 위해서 혼자 사는 거래요. 구속받기 싫다는 겁니다. 맘에 들면 언제나, 누구에게나 문(몸)을 열어줄 수 있지만 맘에 들지 않으면 닫아버리겠다는 거예요. 과거에는 동거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교육 수준이 높은 계층일수록 동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여러분! 현대인의 가치관이 왜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믿음을 버리고 합리적인 지성을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지성은 머리를 크게 만드는 반면에 가슴을 작게 만듭니다. 실증주의적인 사고는 믿음을 약화시키고, 믿음을 잃게 합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먼저 실험을 해보고 살겠다는 거예요. 조금 살아보고, 좀더 알아보고, 괜찮다 싶으면, 신뢰할만하면 그때가서 가정을 이루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십시오. 몇 달 동안 같이 동거하면서 살아본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알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약기간 동안은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계약기간 이후가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없어요. 믿음이 없이는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서로에게 위로를 주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래요? 믿음이 없이는 약속을 이행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약속에 구속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속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반면에 믿음의 사람은 구속의 자유를 알거든요. 믿음이 약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 점점 완악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마가복음 16장 14절 이하의 말씀으로 읽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음없는 제자들을 꾸짖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디베랴 바닷가에 먼저 가실 것이라고 전했지만 그럴리 있겠느냐고 믿지 않았던 거예요.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하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완악해지고, 완악한 심령에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디두모(쌍둥이) 라는 도마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도마가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에 대한 기사는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이 반대합니다.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칠려고 했는데 또 그리로 가실려고 그런 겁니까?"하고 말렸어요. 그때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이때의 도마는 자기 앞에 다가온 십자가,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대응하자고 합니다. 기왕 한 번 죽을 바에야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순교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그런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내가) 믿지 않겠노라."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증거한 제자가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보고 증거했다면 잘못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했어요. 여러 제자들이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럼에도 도마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마의 믿음이 부활의 주님 앞에서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가만 보면, 믿음이 대단히 좋은 것 같아 보였는데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내가) 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의 신앙은 남을 믿지 못합니다. 뭐든지 자기가 해봐야 직성이 풀려요. 자기 경험이 중요합니다. 내가 내손으로 해야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이 하는 것은 미덥지 못해요. 그러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든지, 누가 부활의 주님을 전하든지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25절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내가' 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옵니까? 한글 개역 성경에는 세 번이 나옵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 보면 네 번이 나와요. 마지막 부분에 너희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내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내가) 믿지 않겠다는 거예요. 도마는 명확한 조건하에서 믿기를 원한 겁니다. 듣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 원문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두운법이 나옵니다. 못자국과 못자국난 자리(장소)가 비슷하게 들려요. 자국은 헬라어로 '투포스(tupos/imprint)'이고 못자국난 자리는 '토포스(topos/impress2000)'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못자국과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넣어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만져보고 느껴져야 믿겠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는다면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도 그런 겁니까? 꼭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믿을 수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이 일일이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으로 가득찬 도마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여드레만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26절에 보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집 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을 때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면서 도마에게 '너의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서, 들으면서 느낀 점이 없으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을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지금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믿음없이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도마와 같은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에 "믿는 자가 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보지 못하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신 겁니까? 믿음이 없는 자에게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심령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8장 15절에 보면, 믿음을 잃고, 진리를 버린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치심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 뿐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화목하기를 바랍! 니다. 그런데 평안이 없고, 좋은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화목하지 못해요. 고침받기를 바라지만 믿음이 없어서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자를 보고 그저 놀랄 뿐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에게 평강이 원하십니다.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중에 가가와 도요히꼬 라는 성자가 있습니다. 그는 21세 때에 폐결핵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잠을 설치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 속에 빛이 한줄기 들어오더래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종말의 상징이 아니라 새출발의 표라는 진리였어요. 그러면서 그의 마음 속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의미있게 죽어야 한다는 믿음이 생기더래요. 그래서 이튿날 새벽에 청년 가가와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빈민굴에서 피를 토해가면서 봉사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가가와씨에게 51년 동안 믿음으로 헌신하며 살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는 많은 저술활동도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사선(死線)을 넘어서」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므로 인생의 새로운 비전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주정뱅이가 돈을 내놓으라고 해서 돈을 주었대요. 그런데 그 돈으로 술을 먹고 도박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사실을 알고 한 친구가 비난합니다. "이보게. 자네는 그 주정뱅이가 술마시고, 도박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돈을 주었던 말인가?" 그래요. "물론 알고 있다네." "이것이 처음인가?" "아니, 몇 십번 주었지." "그렇다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가가와씨는 친구에게 "좀더 참아보세." 하고 말해요. 저녁 예배를 드릴 때 보니까 전부 창녀들이 있더래요. 창녀들은 예배를 드리다가도 주정뱅이가 와서 '같이 가자.' 하면 예배를 드리다가도 나간대요. 그것을 본 친구가 따져 묻더랍니다. "이런 것이 예배이고 선교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전도하느냐? 뭔가 자네는 위선자가 아닌가? 악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자 가가와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자네는 알지 못하네. 저들이 나를 열번을 속여먹고 혹시 내가 저들의 칼에 맞아 죽는다고 생각해 보세. 그후에도 나의 믿음이 저들의 가슴을 통과할 때 사랑이 되어 끝까지 관통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악에 의해 심장에 상처가 나고 찔려 죽은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후에 사람들 속에 믿음과 작은 사랑의 씨앗이 자라난 것이 아닌가?" 가가와씨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곳마다 믿음의 싹이 자라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은 현재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믿음없는 말이 철학이라면 가정에서 시작하는 논리적 주장이 과학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현재 당장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을 남기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현재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뿌린 복음의 씨는 자라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믿음의 씨를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그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열매가 맺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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