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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일생(8) : 하나님의 연단 (삼상 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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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도 농사가 잘 되질 않아 늘 불만입니다. 때로는 병충해로, 때로는 홍수로, 때로는 가뭄으로 농사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투덜거리다 작심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기 생각에 완벽한 농사가 되도록 소원을 올렸습니다. “하나님, 햇볕을 넉넉히 주십시오. 그러나 뙤약볕은 말고요. 비는 적당하게 주시고, 바람도 태풍은 말고 산들 바람으로 주십시오.” 농부의 소원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 같았습니다. 벼가 무럭무럭 자라 큰 키가 되어서, 농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논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벼 이삭을 비벼 보니 낟알이 없는 쭉정이 투성이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조사해 보니 너무 순한 날씨만 계속 되어서 키는 크게 자랐지만 제대로 여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처럼 인간은 자기 생각대로만 되면 멋진 인생이 펼쳐질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제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을 따라갈 수는 없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들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 생각에는 뜨거운 뙤약볕이나, 태풍이나 장마 같이 불편을 주는 것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필요해서 주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생각에는 아무 고난도 없이 날마다 형통하고 안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크고 작은 고난이 있어야 멋진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봅니다.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 때 설탕만 잔뜩 넣지 않습니다. 매운 고춧가루, 짠 소금, 쓴 후추 가루 등을 골고루 섞어 넣습니다. 그래야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다윗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고난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성경을 봐도,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만큼 많은 고난을 사람이 드뭅니다. 그는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성군 다윗’의 모습으로 다듬어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을 통해 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도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 자체를 반길 사람이야 없겠죠. 하지만 우리가 고난의 유익을 안다면 보다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하나님의 연단’을 위한 도구가 되는 셈입니다. 연단(鍊鍛)이란 말은 잘 아시죠? 연단이란 단련(鍛鍊)이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사람에게 적용하면 신앙과 인격을 단단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십니다.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이 시간 함께 나눌 말씀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특별히 다윗이 사울 왕의 핍박을 받을 때 그 처절한 고난을 통해 다윗의 신앙과 인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혹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다면,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헤아리시고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연단으로 위대한 인생으로 만들어졌듯이 우리의 인생도 닥쳐오는 고난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견고해지고 복된 인생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1] 다윗에게 닥쳐온 고난 : 사울 왕의 핍박

다윗의 인생에 몰아닥친 첫 번째 고난은 사울의 핍박입니다. 그 고난이 아주 혹독하고 장기간 지속되었습니다. 사울이 계속 추격하면서 악착같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으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에 앞서서 일반적인 고난의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고난에는 대개 세 가지 패턴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 속에서는 이 세 가지가 한데 섞여서 나타나는 경우가 대두분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 구분해 봅니다.

첫째는, 죄의 결과 하나님의 징계로서의 고난입니다. 이 경우는 회개하면 고난이 물러갑니다. 대표적인 예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먼 나라에 갔습니다. 허랑방탕하다 완전히 망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못 먹는 신세가 됩니다. 그 고난은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가자 아버지가모든 것을 회복시켜줍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당한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고난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방편으로서의 고난입니다. 소위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애매하게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고, 흉년으로 멸족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묘한 섭리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당하는 것은 이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연단으로서의 고난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욥의 케이스입니다. 그는 동방의 의인으로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한 게 아닙니다. 또 그것을 통해 무슨 특별한 일의 계기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욥의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이었습니다. 욥 자신이 그 사실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다윗이 당한 고난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다윗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된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충분한 신앙적 자질을 갖추도록 하기 위한 연단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의 기대치 : 신본주의적 왕(神本主義的 王)

하나님이 다윗에게 고난을 허락하면서 어떤 기대를 가지셨을까? 그 연단 과정을 교육 과정으로 본다면 ‘교육 목표’가 있었을 겁니다. 과연 하나님은 마음속에서 다윗이 어떤 인물이 되기를 바라셨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신본주의적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 겨우 천국에 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성숙한 자녀와 일꾼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축복이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사명이 있다고 할 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단순하게 말하면 축복을 나눠주는 사명입니다. 말하자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싸이클이 맞아야 한다는 겁니다. 신본주의(神本主義)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용어지만, 성도들 사이에 흔히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 반대말은 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제외한 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불신앙이죠. 그런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람들 중에도 생활 방식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미성숙한 ‘인본주의적 신앙’이라고 봐야 되겠죠.

사울 왕은 인본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 어엿한 신앙인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한 게 많더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제멋대로 생각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자기 자신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에게도 축복의 통로가 되질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어도 다윗만큼은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몹시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 자신도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릴 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그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기름을 붓고 나서 즉시 왕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윗이 그 이전에도 목동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역부족이죠. 아직도 인본주의적인 습성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적인 힘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제멋대로 하는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신 겁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적어도 신앙의 위인으로 알려진 모든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는데 약속대로 아들을 얻는 데에만 25년이 걸렸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그의 인본주의적 요소들을 뽑아내는 데에 연단의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요셉은 17세부터 30세까지 13년 동안 연단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다윗은 대략 10년 정도 사울에게 고난을 당하면서 연단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사울의 핍박도 거셌지만 다윗 자신의 내면도 아직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그 신앙이 단련되어갔습니다. 그 과정이 사무엘 상 19장~30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시행착오를 거쳐 연단된 다윗의 신앙 : 신본주의 신앙

다윗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점점 인본주의 신앙에서 신본주의 신앙으로 성숙해져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인이지만 그래도 언뜻 언뜻 인본주의적인 모습들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다윗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위험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차기 왕으로 세우실 것과 그와 함께 해 주실 것을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때가 종종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세상 줄이 하나하나 끊어지면서 실망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얻은 군대 장관의 지위도 있었고, 왕의 사위로 가정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타 영적인 스승인 사무엘 등 인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줄이 다 끊어져버린 겁니다. 그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의 줄이 끊어졌기에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의도하신 게 바로 이겁니다.

다윗은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했습니다. 신본주의 신앙으로 세워져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언뜻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면 그의 신앙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보다 세상 것들을 의지하는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는 반증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하나님 한분만을 절대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한분만 함께 해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용기를 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그런 신앙이 아직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시선(靈的 視線)의 문제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런데 아직 온전한 신본주의 신앙을 갖추지 못한 다윗은 때때로 시선을 놓쳐버리고 세상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는 인간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울이 끈질기게 추격을 해오자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의 힘을 크게 본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더 크고 위대하신 분인데 영적 시선을 놓쳐버리니까 약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제법 괜찮은 줄 아는 데 사실은 아주 연약합니다. 요동치 않는 신앙이 되려면 오랜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이 꽤 좋은 것 같아도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연단의 과정을 꼭 요구하시는 겁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가 갈멜산에서 수백 명의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를 처단했지만(열왕기 上 18장),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능력을 행했지만, 금세 두려워 도망가는 모습도 보였습니다.(열왕기 上 19장)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악한 왕비 이세벨이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영적 시선이 흐트러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물 위로 걷다가 바람을 보는 순간 물결치는 모습을 보고 물 속에 빠졌던 것도 동일한 문제였습니다.(마14:25~33)

다윗도 비숫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바라보는 순간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도망을 칩니다. 특별히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인 블레셋으로 도망친 겁니다. 그때 그의 상태를 삼상27:1~2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행위였습니다. 삼상22: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 ”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분명 하나님만 바라보지 못한 다윗의 미성숙한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한 겁니다. 당장은 사울이 추격을 그쳤고, 아기스 왕에게 시글락 땅을 얻어 평안하게 사니까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 평화’요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자살 행위였습니다. 잠29:25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 품 안이 그 어디든 안전지대입니다. 인간 생각으로는 이스라엘 국경 내는 위험하고 블레셋 땅은 안전할 것 같지만 착각입니다.

마침내 큰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29장과 30장의 사건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침략 전쟁을 일으키려고 할 때 아기스 왕이 다윗의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큰일 날 일이죠.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이스라엘의 적군으로 참전한다 ... ? 말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어정쩡하게 끌려가는 다윗과 그 부하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다행히 방백들이 다윗의 배반 가능성을 들어 항의해서 도중에 빠져서 그렇지 정말 큰일 날 뻔한 겁니다. 하나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셔서 구해주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신앙을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도 업그레이드되고 완전히 해결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고난을 회피하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더 큰 고난이 내 앞을 가로막게 됩니다. 조심해야 될 점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회피하려다가 정말 엄청난 일을 당했습니다. 다윗 일행이 전쟁터로 가다 다시 시글락에 돌아왔을 때 이미 엄청난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 2~3일 사이에 아말렉 족속이 침노했던 겁니다. 불을 지르고 물건을 다 약탈해 갔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도 잡아갔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본문 4절 보니까, 그들은 너무 기기 막혀서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6절(상) 보면, 다윗에게 와서 충성을 맹세했던 부하들이 다윗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10년 고난의 세월 가운데 고난이 피크를 이룬 때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그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의지했습니다. 아기스 왕에게 붙어 있는 것도 다 그런 겁니다. 특히 그의 부하들 6백 명을 많이 의지했을 겁니다. 그에게 남은 든든한 줄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썩은 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줄은 든든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다 썩은 줄입니다.

이때 다윗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차 싶었던 겁니다.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것부터 잘못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봐야 되는데 ... 그때서야 절실하게 깨달은 겁니다. 6절(하) 보면, 다윗은 몹시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나서 아멜렉 족속을 치러 갑니다. 결국 승리를 거두었고, 잃었던 모든 것을 찾아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신본주의 신앙으로 굳세게 다져졌을 겁니다. 하나님은 극단적인 고난을 통해 다윗의 신앙을 정금처럼 연단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전쟁에서 사울이 전사합니다. 아찔한 일입니다. 만일 다윗이 참전했다면 군사 쿠데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다윗은 이런 아찔한 상황들을 경험하면서 신본주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달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라도 연단 받고 성숙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독수리 훈련을 아시죠? 어미 독수리가 새끼에게 먹이를 줄 때 곱게 주지 않습니다. 절벽 아래 먹이를 놓고 위에서 떨어뜨립니다. 스스로 날아가서 가져오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새끼가 푸득거리며 떨어집니다. 그러면 어미가 쏜 살같이 날아가 날개도 새끼를 받아줍니다. 그리고는 꼭대기로 올라가 다시 떨어뜨립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새끼는 어느덧 힘차게 나는 의젓한 독수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새가 아닌 독수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풍성한 복을 누리고, 더 나아가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습니까? 그 가운데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감내하십시오. 그래서 부디 다윗처럼 정금 같은 신앙, 독수리 같은 신앙으로 성숙해져서 승리하는 인생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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