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감사를 회복했을 때 (욘 2:1-10)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스펜서 존슨이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 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두 마리의 생쥐와 두 명의 꼬마 인간인데 이 넷은 행복의 치즈를 찾아 여행을 떠나갑니다. 저자는 이것을 인생 또는 우리가 펼쳐가는 신앙의 삶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치즈 창고를 발견하고 거기서 마냥 행복해 하고 좋아합니다. 쌓인 치즈를 즐기는 사이에 거기서 그들은 안주해 버렸고 그러는 사이에 치즈가 말라간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치즈가 상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치즈가 떨어지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평생 행복의 치즈와 함께 살 줄 알았는데 치즈가 다 상하고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직장이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사랑이 상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건강이 내 곁을 떠나갑니다. 돈이 배신을 합니다. 친구가 내게 원망을 하며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소위 실패의 자리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이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이 두 생쥐와 두 꼬마인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두 마리의 생쥐는 떠나간 치즈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 치즈를 향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 꼬마는 며칠 동안 고민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듯하다가 다시 치즈를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넘어져야 했고 때로 피를 흘려야 했고 고독에 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커다란 치즈 창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꼬마는 빈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서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행복의 치즈는 어디로 갔을까?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훔쳐갔을까? 두리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난 최선을 다했는데. 허탈감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을 향하여 불평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입술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인생을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새 치즈를 찾아 떠나서 마침내 치즈 창고를 발견했던 한 꼬마는 그가 가는 인생길에 발견했던 진리들을 다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몇 자를 적어 둡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다면 성공의 길은 반드시 당신 앞에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치즈 냄새를 부지런히 맡다보면 치즈가 상해가고 있음을 빨리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에 그리며 영상을 그리며 살아가면 행복의 치즈를 향하여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라져 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떨쳐 버릴수록 새 치즈를 향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은 무익합니다. 과 거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새 치즈 곁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환경과 함께 자신도 변해야 합니다. 세상과 함께 당신도 변해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를 차라리 즐기십시오. 그리고 도전하십시오."

이 책을 추천하는 그레서 크로니는 이 책을 그렇게 요약했습니다. "인생은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도록 시원하게 뚫린 대로가 아닙니다.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막다른 길에서 좌절하기도 하는 미로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개척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노라면 원치 않았던 실패를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의 행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책은 기록이 되어졌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한 번의 실패를 영원한 실패인양 낙담하지 마십시오.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실패인 양, 인생자체의 실패인 양 포기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여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은 절대로 패배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로라 슐레징어 박사가 쓴 「인생을 망치는 7가지 변명」이라는 책에서 “늘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 생각은 있으나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다”고 했습니다. 슐레징어 여사는 그의 책 서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고집대로 살아보고 싶어 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고 꿈꾸던 그 환상을 모조리 이루어 보고 싶어 합니다. 당신은 가능한 한 노력은 하지 않고 희생을 적게 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고, 나쁜 짓 하고서도 벌 받지 않고 피해가고 싶어 하고, 당신에게 상처주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멋진 복수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당신의 원수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만 하더라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행복의 순간, 기쁨의 순간이 있지만 고난과 실패의 자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 이런저런 실패들이 우리의 인생살이를 난타해 오고 실패는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고난당하는 당사자는 이 고난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을 때에 큰 유익과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의 사명 앞에 불순종하다가 큰 물고 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숨을 쉴 수 없고 위액에 자신의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내가 부르짖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스올" 은 음부,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처절했던지 이게 바로 지옥이구나 싶어서 몸부림하며 부르짖었다 그런 내용입니다.

고난과 실패의 자리에서 요나는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실패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정신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성공자라 할지라도 그 정신, 마음이 실패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는 이미 실패자입니다. 반면 아무리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할지라도 그 정신이 승리의식으로 넘쳐있으면 그는 실패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허버트는 폭풍은 참나무의 뿌리를 한층 더 깊이 뻗어가도록 만들어 준다고 얘기했습니다. 토마스 칼라힐은 약한 자의 길에서 장애물인 것이 믿음 있는 사람, 강한자의 길에서는 오히려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세일즈맨 엘머 레트맨은 진정한 판매는 거절당한 그때부터 새롭게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 날 갑자기 실패가 내 앞에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며 이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실패에 직면하는 신앙적인 자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실패를 오히려 긍정적인 기회로 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실패의 자리에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실패의 자리에 빠졌다 할지라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양과 돼지가 함께 진흙탕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진흙탕 속에 번듯이 드러누워 있는 놈은 돼지이고 진흙탕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놈은 양입니다. 성경 어디에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너는 돼지다"라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너는 나의 어린양이다"라고 말합니다. 실패의 진흙탕 속에 드러눕지 마십시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면 어떤 실패의 자리에 있다할지라도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실패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가룟 유다는 목매달아 자결했고 창자가 터져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회개하고 일어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초대교회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최고의 맹수는 사자입니다. 사자가 한번 나타나면 모든 짐승들이 꼬리를 내리고 숨습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사자도 코끼리 곁에는 함부로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긴 코를 휘저었다가 사자를 한번 내리치면 10m 20m 가서 내동댕이쳐진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또 코끼리는 그 코로 1 톤짜리 통나무를 번쩍 들어 실어주기도 하고 옮겨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힘을 가진 코끼리가 어린아이 손에 이끌려서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코끼리가 아주 어릴 때에 강한 쇠말뚝에 묶어 둡니다. 끊어지지 않는 철사로 꽁꽁 묶어두면 몸부림을 하다가 목에 피가 납니다. 그래도 쇠말뚝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말뚝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지나는 사이에 코끼리는 실패감에 좌절감에 젖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저 말뚝은 절대로 뽑을 수 없다. 이 쇠사슬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어졌을 때에 쇠사슬 대신 노끈 하나를 묶어둡니다. 쇠말뚝이야 적당히 그냥 갖다 걸쳐만 놓습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이미 실패의식 좌절감 속에 빠졌기 때문에 저 쇠말뚝은 절대로 뽑혀지지 않는다. 이 끈은 절대로 끊을 수 없다. 그래서 끌어 가는대로 조금만 자극이 되면 질질 끌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고 이 실패를 극복할 수 없어 넘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어" 패배감 좌절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패 자체는 실패일 수가 없습니다. 실패했다는 그 의식이 실패일 뿐입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실패는 오히려 승리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하나의 문이 닫혀질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문을 우리를 향하여 열고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명심할 것은 언제나 문제는 정지표시가 아니라 방향 표시일 뿐입니다.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도전하라는 명령입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도 벼룩은 뛰어야 한다 

벼룩을 유리병 안에 넣고 뚜껑을 씌워 놓으면, 뚜껑까지만 뛰어오릅니다. 그렇게 병뚜껑 까지만 뛰는 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뚜껑이 없어도 그만큼만 뛰어오릅니다. 벼룩 스스로 자기의 한계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몇 십 배를 뛰어 오르던 일은 아련한 추억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날마다 더 높이 뛰어 오르는 것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충만하고, 더 높은 비전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저주와 같고 형벌과 같은 고난들, 걱정, 염려, 불안, 어둠은 이미 십자가에서 청산하신 것들입니다. 우리를 근심케 하시거나, 우리에게 허리가 꺾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시는 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눌리게 하심'이 아니라 '누리게 하심'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누림을 경험하고 충만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인정하고, 날마다 뛰어 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안에는 엄청난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할일은 능력을 새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금을 가지고, 돌멩이를 다루듯이 차고 놀았는데 그 광경을 본 외국인들이 껌 값을 주고 금덩어리를 사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금의 가치를 모르면 금을 가지고도 거지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은 금보다 귀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가치는 실로 계산이 안 되는 어마 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불가능이 없으시며, 안 되는 일이 없으시며, 마침표가 없으시며 절망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활용하지 못한다면 마치 은행에 수천만 원을 쌓아 두고도 굶고 있는 사람과 같은 것이며 비행기를 타고도 비행기 안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을 돈이 없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한한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신분을 소유한 특별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 피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 신분을 망각해서도 안 되며 그 신분으로 모든 특권과 영광을 누려야할 필연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잘 살아야 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워 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셔야 하고 그분이 통치하셔야 합니다. 무엇으로 깨울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내 안에 피로 값 주고 은사로 주신 능력들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인데 그냥 기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기도이며, 창공을 뚫고 올라가는 우렁찬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그런 기도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했었는데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는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끓어 올리는 펌프

기도는 펌프와 같은데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끓어 올리는 펌프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못하고 안 되니 어떻게 샘물을 끓어 올릴 수 있을까요? 기도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의 패배의식 때문입니다. 기도를 했으나 거절당한 경험이 많으면, 우리는 벼룩처럼, 더 이상 기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기도에 대한 거절감 내지는 기도의 패배주의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안 되기도 하지만, 안 하기도 합니다. 벼룩의 병뚜껑 때문입니다. 벼룩이 뚜껑을 치워도, 더 이상 뛰어 오르지 못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듯 많은 성도들은, 영적인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병뚜껑이 되어 더 이상 기대도, 기도도, 희망도 없이 무력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뚜껑을 치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뚜껑이 있다는 것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없다는 패배의식, 기도해도 별수 없다는 고정관념,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된다는 열등감, 그 뚜껑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열등감, 패배의식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며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며, 희망을 잃게 만들며 주저앉게 만들며 늘 실패와 무기력의 틀, 내지는 병 안에 갇혀 살게 만듭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패배의식이나 고정관념, 열등감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벼룩은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벼룩이 그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뚜껑이 있다고 믿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사실은 뚜껑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뛰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기도해봤자 벼룩이라고..아무리 해봤자 안된다고.. 우리는 그 사단의 속삭임에 속아서 몇 번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중단하는 것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일지라도 그래도 뛰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벼룩의 사명이 아닌가요? 어제까지는 뚜껑으로 인하여 주저앉았었지만, 오늘은 다시 뛰어 보지 않을래요?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얼마든지 뛰어 오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죽으려 했지만, 오늘은 살기 위하여 희망을 품고 뛰어 봅시다. 그 어떤 고정관념도 그 어떤 열등감도, 그 어떤 패배주의도 우리를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대단해서입니다. 피지 못하는 꽃은 꽃이 아니듯, 울지 못하는 새는 새가 아니듯, 뛰지 못하는 벼룩은 벼룩이 아니듯, 기도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처절한 실패의 순간 가장 먼저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끝없이 도망가던 요나. 그러나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도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분명 내게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자녀 삼으시고 명령해 주셨는데 그 사명 벗어던지고 구경꾼이 되어서 의미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을 위해 물고기를 준비할 런지도 모릅니다. 가정에 풍랑으로 육체적인 질병으로 자식들이 당하는 어려움으로 신앙의 무서운 침체의 늪으로 몰아넣어서 등등으로......

그러나 그 실패의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2절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요나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내가 당하는 이 고난 의 의미는 무엇이고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신단 말인가?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주시기 위하여 나를 실패의 자리에 던져 넣었단 말인가?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지금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평안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든 것이 형통하게 잘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 때문에 충성하지 못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반면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큰 풍랑을 만났습니까? 남모르는 실패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그토록 좋은 환경, 아름다운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조차도 하나님은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고 회개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마음 놓고 예배할 수 있을 때에 의미 없이 예배를 소홀히 하던 사람들, 마음 놓고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을 때에 의미 없이 찬송하고 기도하던 사람들, 예배가 막혀질 때에 찬송이나 기도의 문이 막혀질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다시 말씀을 펼치기 시작하겠나이다. 다시 기도하기 시작하겠나이다. 다시 순종해 보겠습니다. 말씀을 가슴 에 움켜쥐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하겠나이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실패의 순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신호

우리가 어떤 시험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시험문제를 출제하신 하나님께서는 정답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움의 정답을 알 수 없어 답답해 하지만 하나님께는 정답이 있습니다.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나 혼자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했습니까? 그때 마다 그 문제는 꼬여져 갔고 더 헝클어져만 가지 않았습니까? 한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지 않았습니까? 문제를 키워갈 뿐이었습니다. 정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 하나님으로부터 정답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언제나 실패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는 싸인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나면 실패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공 속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큰 실패의 순간에 가장 큰 감사를 발견하게 되는 것

요나의 마지막 기도의 결론입니다. 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는 편안하게 살 때 일찍이 그의 입술에 감사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형통한 상황 가운데 감사의 언어를 잃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감사의 언어를 회복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내 뜻대로 되어질 때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박수와 갈채를 아끼지 아니할 때에 감사의 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가운데, 숨을 쉴 수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썩어 냄새가 나는 물고기의 그 뱃속에서 감사의 노래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감사 노래의 주제는 "구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일찍 떠나느냐 조금 더 오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더 편안하게 사느냐 좀 더 고난을 당하느냐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토록 아픈 실패의 순간에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그 절망감 속에서도 구원받은 백성으로 죽어갈 수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요나의 인생살이 그 실패의 자리에서 막다른 인생의 골목의 자리에서 끝장났다 할지라도 할 말 없는 존재가 요나였지만 그가 감사를 회복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감사를 회복했을 때에 오늘 본문 1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고기야 토해 내라." 감사를 회복하는 순간 요나를 물고 있는 물고기가 토해낼 수 있었습니다. 실패는 인생의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 될 뿐입니다. 실패는 포기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실패는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라는 뜻입니다. 실패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버리셨음을 의미하지 않고 여러분을 향한 더 좋은 생각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에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아픈 실패의 순간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감사가 회복되어졌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고 새로운 축복의 길을 그에게 열어 주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