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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도 없었는데 (요 4: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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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일 목사 (범어교회)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1. 한 사람의 변화가

예수님을 우물가에서 만나 그 분이 메시아임을 깨닫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치는데, 많은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녀의 증거를 듣고는 예수를 믿은 까닭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고 한 것을 듣고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 중에 남편 다섯을 두었던 것 이외에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그 정도의 것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에겐 그녀의 변화된 모습에서 더욱 놀라와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숨어 은둔의 생활을 했던 여인인데, 이전 그늘에서 벗어 나와 사람들에게 뛰어나온 그 행동이 더욱 예수님을 믿게끔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간증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삶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병에서 건강으로, 가난에서 부유로, 달동네에서 판검사로 등의 삶의 전환된 그 모습이 감동을 주며 믿음을 갖게끔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는 일어나야 합니다. 아니 일어납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항상 새로워야 합니다. 문제는 변화에 대한 태도입니다. 변화를 사모하며 스스로 변화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고정적이고 폐쇄적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습관들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열어두어야 합니다.

자주 이웃에 부부 싸움소리가 세어 나가고, 이웃의 누구를 보더라도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될 일이 있으면 목소리를 높이며 셈을 잘하고, 때때로 민원 데모대의 선두에 서서 고함을 잘 지르다가, 자기와 직접 관계가 없으면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성경책을 들고 교회 간다고 식구들이 총출동하여 나간다면 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겠습니까?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고집쟁이가 이해와 양보를 하게 되며, 평소 인사성이 없던 사람이 싹싹하게 인사를 잘하며, 성을 잘 내던 사람이 웃음을 잘 지으며, 주먹부터 먼저 나가던 사람이 온유해지며, 이기적이던 사람이 남을 먼저 배려하고, 화려하게 외모를 꾸미며 멋만 부리던 사람이 검소해지며, 걸핏하면 자기 자랑이나 자식 자랑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던 사람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며 남을 칭찬하는 사람이 된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그 변화에 놀라와하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매우 중요한 전도학을 배우는 것입니다. 전도는 전도하는 사람이 매우 중요합니다. 변화가 일어난 사람에게서 나오는 소리엔 누구나 관심을 갖고 듣습니다. 그 사람의 간증엔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위가 높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의 말엔 신뢰가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능력을 지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를 자기 집으로 청하니

이제 본문 40절에 보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시어 이틀을 유하셨습니다.

믿음은 사귐에 대한 욕구로 발전합니다. 믿음은 신조를 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곧 예수님과 사귐을 갖고 싶어합니다. 교회 역사에서는 역사 속의 과거인물이 된 예수님을 보고 싶어 그들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박해기에는 물고기를 그려 주님을 사모했습니다. 콘스탄틴 칙령 후 기독교 신앙이 자유를 얻었을 때부터 신자들은 교회당 벽에 성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번 터키 성지 방문을 하면서 갑바도기아 지역에 이는 괴르메 계곡에 갔었습니다. 석회암 계곡으로 수많은 기암 동굴들이 많았습니다. 박해기 때는 그 동굴들이 성도들이 숨어 지내던 피난처였는데, 로마 기독교 공인 후엔 그 동굴들에 수도자들의 은둔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곳 동굴에는 벽화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세겨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성화들이 온통 벽을 장식했습니다. 물론 성화가 자칫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집에 영접하여 함께 거하고 싶은 그들의 사모함이 절정에 달한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거짓일 것입니다. 믿음은 곧 사귐으로 발전합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귐은 믿음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 가면 곧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 사귀십시오. 영접하십시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그를 영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가 원하고 기뻐하는 일들을 행하십시오. 예수님을 자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사귀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과 사귐의 생활을 잘 못하는 까닭을 아십니까? “가시나무”란 노래를 아실 것입니다. 노랫말이 우리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듯 합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사귀려면 우리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회개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은 곧 회개가 수반되고, 회개할 때 가난한 마음이 되어 주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지금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구주신 줄 앎이니라

다른 사람의 전도나 간증을 듣고 간접적으로 믿음을 얻게 되었지만, 이제는 내가 친히 듣고 확인하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됨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간접 신앙에서 직접 신앙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이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바로 예수님과 사귀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회가 천주교회와 다른 핵심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직도 천주교회는 사제를 통하여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제가 없으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대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란 말씀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제사 드릴 수 있습니다. 까닭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10:19).

그렇다고 이 말이 소위 ‘직통계시주의자’가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스스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믿게 되었던 신앙이 발전하여 이젠 스스로 믿게 되는 그리고 삶을 결단하는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시켜서가 아니라 해야하기에,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이유도 모르고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 자원함으로,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가는 그런 어른 신앙을 가지게 되어야 합니다.   

4. 기적도 없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사마리아 성에 일어났지만, 그 동기 유발자가 기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병이어도 없었고,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표적도 없었고, 병든 자를 일으키시는 치유의 기적도 없었고, 귀신이 나가는 그런 현상도 없었지만, 사마리아 성은 한 여인의 변화로 인하여 조용히 성시화 되어갔습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41a)

그렇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성의 변화는 “에수님의 말씀을 듣던 한 여인이 변화되었고, 이어서 그 여인의 간증을 듣고는 예수님을 찾아 나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집으로  영접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것 밖에는 아무 사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지방에서도 보지 못한 놀라운 복음화의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대구의 성시화의 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변화되고, 변화된 사람들이 간증하며, 그 간증 안에서 또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래서 온 대구시가 성시화 되고 복음화 되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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