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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거나 덥거나 하라 : 라오디게아교회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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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박쥐 이야기

박쥐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주로 동굴 속에 살며 밤에만 움직이는 동물로서 초음파 레이더를 사용해 움직이고 먹이를 잡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오늘날 우리는 박쥐가 새 종류가 아닌 포유류 종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사실 생긴 것만 봐서는 새인지 짐승인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날개가 달려 나는 것을 보면 새 같기도 하고, 새끼를 낳아서 젖 먹여 키우는 것을 보면 분명 포유류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가 잘 아는 이솝우화의 박쥐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 잘 아시지요? 새와 짐승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새가 이기는 듯 보이니까 박쥐는 날개를 활짝 펴 보이며 “나는 새입니다.”했다가 이번에는 짐승들이 이기는 것 같으니까 날개를 감추고 “나는 쥐입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사실이 들통 나자 박쥐는 새 편에서도 미움을 받고 짐승 편에서도 따돌림을 받아 결국 동굴에 숨어 살며 밤에만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기한 것은 이 박쥐 이야기가 이솝우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국설화에도 아주 비슷한 내용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박쥐 이야기가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데 그 모든 이야기의 공통점은 박쥐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기 이익을 따라 변신하는 기회주의자들을 풍자하는 짐승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또한 이 박쥐같은 기회주의자나 중간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편을 분명하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촉구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또 엘리야 선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다른 신과 우상의 편, 마귀와 사단의 편에 설 것이냐를 분명히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세계에는 이 두 가지 편만 있기 때문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우상과 사단의 편에 서는 것도 큰 죄지만, 이 쪽 편도 아니고 저 쪽 편도 아니고 머뭇머뭇 거리며 애매모호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박쥐같은 사람들 또한 큰 잘못이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와 라오디게아교회

오늘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한마디로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교회, 박쥐처럼 이 편도 아니고 저 편도 아닌 애매모호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심한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비옥한 리쿠스 계곡에 위치하여 농사와 목축이 성행하였고 부드럽고 윤기 있는 검은 양털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금융도시로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이 라오디게아에는 특별히 유명한 의술학교(오늘날의 의대)가 있어 유명한 명의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이 의사들이 ‘브루기아 가루약’을 기름에 이겨서 만든 좋은 안약을 개발했습니다. 이 안약은 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또한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인근 골로새와 히에라볼리로부터 항상 지하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에 어떻게 교회가 생겼는가? 골로새서 4:12~13에 의하면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이 라오디게아교회를 세웠고 바울이 직접 이 교회를 지도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교회는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부자교회였고 특히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아무런 위기나 문제가 없는 아주 ‘편안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이 라오디게아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미지근한 교회

그런데 이렇게 진리의 증인이며 모든 창조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지금 라오디게아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주님은 지금 이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사데교회와 더불어 칭찬은 하나도 못 받고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아니, 사데교회보다 훨씬 큰 책망과 비난을 받았고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심히 불쾌하고 역겨운 교회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이런 표현을 다 쓰십니다. “나는 너희 교회가 아주 불쾌하고 역겹다!” 도대체 이 교회가 어떤 교회기에 이런 심한 말씀까지 들은 것일까요? 우선 라오디게아를 향한 첫 번째 책망의 이유가 15절과 16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처음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라오디게아교회가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라는 책망은 처음에 말씀드린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좋지 못해 인근 도시인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서 물을 공급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차다’는 것은 이웃 도시인 골로새로부터 식용으로 냉수를 공급받은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라오디게아교회가 이 찬물처럼 신앙이 없는 불신의 상태로 세상에 속하였음을 뜻합니다. 또 ‘더웁다’는 것은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뜨거운 신앙, 열정을 뜻합니다. 그런데 찬물도 아니고 더운물도 아닌 미지근한 물은 무엇에 쓰겠습니까? 마실 물로도, 온천수로도 적합하지 않은 아주 애매한 물입니다. 그러므로 차지도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이 책망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뜨거운 열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미지근하기라도 하니 다행 아닙니까? 뜨겁지는 않다 해도 찬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 즉 아예 차가워서 주님을 모르거나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지도 못하고 애매한 상태, 미적지근한 상태, 미온적이며 소극적인 상태로 있는 것을 더 위험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온적인 신앙은 최악의 신앙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는 가장 위험한 교회입니다. 뜨거운 것이 최상이지만 뜨겁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차갑기라도 하면 언젠가 결정적인 기회가 있을 때 뜨겁게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지근한 것이 왜 그리도 위험할까요? 문제는 자기가 미지근하면서도 적당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럭저럭 잘 믿고 있지, 적당히 신앙생활 잘 하고 있지, 이만하면 됐지.”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만하고 타협적인 신앙생활 때문에 절대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착각 때문에 은혜 받기는 다 틀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평생 예수 믿고 교회 다녀도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능력이 뭔지도 모르고, 영적인 세계를 맛보지도 못한 채 자기는 잘 한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에게 ‘차든지 덥든지’하라고, 뜨거우면 좋지만 뜨겁지 못할 바에는 아예 차가우라고, 양자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애매하고 어중간 한 것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어중간하고 미온적인 신앙을 가진 성도와 교회에 대해 주님은 어떤 심판을 내리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수로를 통해 골로새에서는 냉수를, 히에라볼리로부터는 온수를 끌어 썼는데 이 두 가지 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되면 식수로 쓰기에 부적합해서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습니다. 요즈음 한창 날씨가 더운데 저도 밖에 나갔다 오면 땀에 흠뻑 젖어 집에 들어오자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시원한 물이 나와 주기를 기대하며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틉니다. 그런데 그 수도꼭지에서는 시원한 물이 아니라 미적지근한 물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지붕에 있는 물탱크가 태양열을 받아 미지근하게 데워졌기 때문입니다. 이 미지근한 물이 나오면 얼마나 찝찝하고 불쾌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대충 물만 적시고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오곤 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찬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이 나오면 이 물을 토해 버리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미지근한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불쾌하고 역겨워 토해 버리겠다고, 즉 그들을 거부하고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미지근하면 주님이 토해버리십니다.




부자가 아닌 가난뱅이

이제 이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책망에 이어 17절부터는 두 번째 책망이 나옵니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실제로 아주 부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자체가 아주 잘 사는 도시였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라오디게아교인들 역시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가 부자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부자인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아주 가난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지난번에 살펴본 서머나 교회와 대조를 이룹니다. 서머나 교회는 물질적으로, 세상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하다고 주님께 칭찬을 받았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부자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라오디게아교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너희들이 부자인줄 알지만 실제로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곤고하다는 말은 본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한 경우를 뜻하는 말로서 그 어떤 도움도 못 받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영적으로 가난하고 곤고하기 때문에 너무도 불쌍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또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이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안약과 의학교 덕분에 육식의 눈이 밝은 사람은 많았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신령한 세계,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아주 탐스러운 윤기가 나는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는데 이 검은 양털로 된 옷을 입고 육신의 몸은 가리고 자랑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영적으로 벌거벗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가난하고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라오디게아교인들에게 18절에 세 가지를 권면하십니다. 첫째는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권면인데 이 ‘불로 연단한 금 불’이란 시련을 뜻합니다. 시련이 뭡니까? 금광석 1톤에는 금이 불과 22그람 정도밖에 함유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소량의 금을 뽑아내기 위해 용광로에서 고온의 뜨거운 열기로 녹일 때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금이 나오듯 우리 신앙도 뜨거운 불과 같은 시련을 통해 아름다운 정금 같은 신앙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도 라오디게아교인들이 시련을 통해 오히려 그 믿음이 강해지고, 그래서 진정 영적으로 부유한 성도들이 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그 시련은 값을 주고 사서라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권면인데 라오디게아는 광택 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했지만 주님은 이 검은색 양모가 아닌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의의 옷을 입고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권면인데 이 안약은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산물입니다. 주님이 이 안약을 발라 너희 눈먼 것을 치유하라고 하신 것은 영적인 안약을 발라 그들의 영적 시각장애를 치유하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제 주님은 라오디게아교인과 교회를 향해  두 가지 책망을 주신 후 20절에 그 유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바로 이 말씀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홀맨 헌터(Holman Hunter)의 ‘세상의 빛’이라는 명화입니다.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는 이 그림을 여러분도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서서’라는 말은 헬라어 문법 상 지금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왜 두드리십니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입니까? 우리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 영적인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문밖에 서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 그 문을 통해 들어오셔서 나와 더불어 먹게 됩니다. 손님이 와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 주인은 누군가 내다봅니다. 물론 그를 맞이할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영접할 마음이 있으면 문을 열어 주고 그 손님은 집안으로 들어와 주인과 함께 만찬을 나누며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마음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면 주님은 그들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마지막으로 21절에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누구에게는? 이기는 자입니다. 즉 승리하는 자에게 어떤 상급을 주실지 약속하신 것입니다. 승리한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즉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왕의 보좌에 앉으실 때 그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며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라오디게아교회는 무슨 이유로 주님께 칭찬은 하나도 못 받고 오직 책망만 받았습니까? 그들의 신앙이 미지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지근하면서도 뜨겁지도 못하면서 “이만하면 나 잘 믿지, 이만하면 신앙생활 잘 하고 있지.” 하며 교만하고 나태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적인 부유함과 건강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자라고? 아니다. 너는 실제로는 영적인 가난뱅이다. 네가 눈이 잘 보인다고? 아니다. 실제로는 영적으로 눈먼 소경이다.” 미지근한 신앙은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스스로 교만하고 만족하며 아무 발전도 성장도 없이 늘 그렇고 그런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뜨거운 신앙생활을 못하고 평생 그렇게 대충대충 믿다가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좀 부담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부담 주는 교회가 싫어 부담 안 주는 교회, 편안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다보니 십자가에 대해, 구원에 대해, 심판에 대해, 헌신에 대해, 뜨거움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부담이 되어서 싫고 복 받는 얘기, 재미있고 듣기 편한 얘기를 선호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의 설교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나 성경 말씀이 아닌 도덕 강좌나 상식 강좌, 시국 강연, 신변잡기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저 교회가 편안한 휴식처요 사람 만나 좋은 교제 나누는 사교의 장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신앙이 취미나 사교수준으로 떨어져서 별로 급할 것도, 별로 절실한 것도 없습니다. 이민 교회에 가면 사람 그리워 나오는 사람이 많다지요? 편안히 쉬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지요? 물론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편안함과 안식과 교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라면 곤란합니다. 교회의 참된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런 교회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교회와 성도는 미지근하고 어영부영 취미처럼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아니다. 너는 뜨거운 성도냐? 차가운 성도냐? 아니면 라오디게아성도들처럼 미지근한 성도냐? 네가 이들처럼 미지근하다면 내가 토하여 내치리라.” 오늘 우리에게 뜨거움이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세상 무엇보다 더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정말 은혜 받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희생할 수 있는 자세입니까? 아니면 자기가 미지근한지도 모르고, 곧 토하여 내쳐질 운명인지도 모르고 잘 믿는 듯 착각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입니까?

주님은 우리 효자교회가 뜨거운 교회 되기를 바라십니다. 정말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와 성도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매주 구호를 외치지만 진정 ‘좋은 교회, 좋은 성도’란 두말 할 나위 없이 뜨거운 교회 뜨거운 성도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 신앙이 해이해져 있었다면, 이 무더위에 지쳐 녹아버리고 흐물흐물 해져 있었다면 빨리 추스르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은혜 못 받습니다. 절대 발전도 성장도 없고 좋은 교회, 좋은 성도 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많이 변화되고 발전했지만 제가 보기에 이 뜨거운 열정과 사모하는 심령에 있어서는 아직도 조금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 뜨거움이 없으면 우리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미지근함은 오히려 차가움보다 못합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이 불볕더위보다 더 뜨거운 은혜가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은혜 받으면, 뜨거워지면 우리를 짓누르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주님은 우리 효자교회가 편한 교회, 문제없는 교회, 부유한 교회로 소문나기보다 뜨거운 교회로 소문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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