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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가지 원초적 질문 (창 3:1, 창 4: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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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봉태 목사(연희교회)

  오늘 말씀의 제목에서 원초적 질문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이 존재하고 나서 가장 먼저 인간에게 던져진 첫 번째 질문인 동시에 모든 인간이 반드시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의 원초적 질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던지신 질문으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창3:9). 그리고 두 번째의 원초적 질문은 가인에게 물으신 질문으로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창4:9).

  먼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신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그가 현재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물으신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에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고 범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그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무언가 인간이 더 행복하게 될 것이며 또 하나님만큼 지혜로운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고 하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만 먹고 맙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자 했을 때 그들에게 찾아온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포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 대해서도 이질감과 소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별개의 두 사람이 아닌 완전히 결합된 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서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며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하체를 가렸다는 것은 이제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나로 연합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분리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고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던지신 질문이 바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숨어 있는 장소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질문이며 인간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묻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 때만이 참된 인간답게 될 수 있으며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서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저주와 죽음과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만,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간 인간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네가 알고 있느냐?”라는 질문인 동시에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죄와 저주 가운데 버려진 인간들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그런 원초적인 질문 앞에서 “주여, 내가 있나이다. 나의 행복과 기쁨은 오직 주님 안에만 있기에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인간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복된 존재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던지신 두 번째의 원초적 질문은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이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은 우리 인간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참된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정립되어야 할 뿐 아니라 내 이웃들과의 관계도 올바로 정립되어야 할 것을 이 두 번째 질문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자기의 아우인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피 흘림의 사건이 일어난 직후 하나님께서는 살인자인 가인에게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내가 내 아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대답입니다. 내 아우가 죽든 살든 내가 알게 무어냐고 하는 반항적인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런 가인의 대답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며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이웃들이 굶주리든 병이 들어 죽어 가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으며, 살인을 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훔친 적도 없으니 나는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에는 바로 그런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이야말로 가인의 행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형제를 돌로 쳐 죽이는 자만 살인자가 아니고 내 이웃과 내 형제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만의 이기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대답한 가인과 같은 살인자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중죄인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들이 서로 형제애로서 돌아보는 공동체적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 냉담한 채 우리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 때 우리는 비록 돌로 내 형제를 치지 않았어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라고 볼멘소리로 하나님께 항의한 살인자 가인과 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인간들의 세상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라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들의 형제가 되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자기 형제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오늘도 하나님은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여기에 대해서  살인자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항거하며 대답을 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나의 형제들을 돌아보는 자가 되겠나이다. 나에게 주신 재물과 나의 재능과 소유를 고통 받는 나의 형제들을 지키는데 사용하겠나이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구원받은 자라는 확증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시는 두 가지 원초적 질문, 즉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과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신앙적인 결단과 다짐을 하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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