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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행자의 행복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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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규 목사 (내리교회)

<불행한 자가 행복할 수 있는가?>
우리 본문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표준 새번역 개정판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해놓았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저는 저 나름대로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어서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불행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일반적으로 슬퍼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슬픔은 기쁨의 반대말이며 불행의 한 단면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어떻게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불행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불행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오늘 저와 함께 이 질문을 던지면서 팔복 중에 두 번째 복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슬픔과 눈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저는 팔복 중에 제 이복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슬픔과 눈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적 통찰력이 요구된다는 말씀이지요. 사람이 슬퍼한다고 할 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슬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슬픔은 어떤 슬픔일까요?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셨을까요?

사실, 슬픔은 다 똑같은 슬픔이겠지만 편의상 '세속적인 슬픔'과 '거룩한 슬픔'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슬픔은 말 그대로 세상에 그렇고 그런 일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장사가 안되어서 울상이고 증권시세가 하락되어서 슬프고 실연을 당해서 마음이 아픈 경우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일본열도에서는 '겨울연가'라는 한국 드라마 한 편 때문에 난리라고 합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지만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배용준씨에 대한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다고 합니다. 일본 여성들이 '겨울연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 아련한 슬픔을 느낀다면 그러한 슬픔이야말로 세속적인 슬픔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의 슬픔은 이와 같은 세속적인 슬픔은 아닐 것입니다. 좀더 고상하고 거룩한 슬픔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고상하고 거룩한 슬픔이란 어떤 슬픔을 말할까요? 아마 거룩한 슬픔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슬퍼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짓고 삽니다. 사도 바울이 롬 3: 10에서 탄식한 것처럼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은 하늘 아래 사는 우리는 밥을 먹듯이 날마다 죄를 짓고 살뿐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서도 전혀 슬퍼하거나 반성함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의 슬픔은 이와 같이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놓고 슬퍼한 두 사람: 다윗과 베드로>
성경에서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슬퍼하는 대표적인 사람을 두 사람만 들라하면 우리는 다윗과 베드로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충신이었던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무서운 음모를 꾸며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무서운 죄악을 저지른 다윗은 나중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바로 이 시기에 다윗이 지은 시가 시편 51편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 1-3).

다윗은 보통 사람인 우리보다도 훨씬 더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놓고 애통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 6: 6에서 자기의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슬퍼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며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자기의 지은 죄를 슬퍼하며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던지 침대가 떠내려가며 요가 흥건히 적실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애통하는 사람이었던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와서는 베드로가 애통하는 사람의 대표자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지라도 자기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의 연약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살아남기 위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큰 소리로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바로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마 26: 75에 보면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리라 예언하셨던 말씀(요 13: 38)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악을 놓고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후에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만 들으면 옛날 생각이 나서 우는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여러분, 애통하는 자, 슬퍼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놓고,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놓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저지른 죄의 문제를 놓고 마음 아파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적인 약점과 무능함을 놓고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잘못과 여러분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놓고 슬퍼하며 눈물 흘릴 때 하나님은 세상이 뺏을 수 없는 복, makarios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이 순간적인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뒤 이 목사님은 사무실 서재에 앉아서 두 가지 이유로 통곡을 했습니다. 첫째로, 죄의 유혹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만큼은 어떤 유혹이 찾아와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도 역시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생각하니 하염없는 눈물이 솟구쳤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 목사님은 자신의 실수로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끼칠 고통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특히 자녀들은 아빠를 우상으로 생각했는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서 아이들이 실망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 왔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선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서도 애통할 줄 모릅니다.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서도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이, 베드로와 같이 지은 죄를 놓고 슬퍼할 때 하나님께서 makarios의 복을 주십니다! 그 makarios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위로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사 61: 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 3-4에서 바울 역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위로의 하나님이신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연약함을 놓고 슬퍼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눈물이 가지는 정화(淨化, purification)의 능력을 다 체험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눈물은 오직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흘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부터 나오는 세 가지 액체가 있는데 다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땀'은 노동을 하고 수고해야지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피'는 우리의 생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 또한 고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눈물'은 오직 우리의 마음이 움직일 때에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순수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땀과 피와 눈물의 세 가지 액체 중에서 인간의 마음과 관계되어 있는 것은 오직 눈물뿐입니다. 마음이 감동되지 않고서 눈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악어의 눈물'이라는 위선적인 눈물도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나일강에 사는 어떤 악어는 사람을 보면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에서 이 전설을 자주 인용해서 '악어의 눈물'은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악어는 먹이감을 먹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악어는 진짜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어의 눈물은 마음이 움직여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신체 구조상 침샘과 눈물샘의 신경이 함께 뒤얽혀서 흘러나오는 생리적인 눈물인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은 선거에서 이긴 정치가가 패배한 정적 앞에서 위선적인 눈물을 흘릴 때 많이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악어의 눈물'과 같이 위선적이고 교활한 눈물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진실한 눈물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순수의 결정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눈물'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김현승 시인이 '눈물'이라는 시를 쓴 동기는 어린 아들을 잃었을 때라고 합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애통해할 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문득 이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신[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地上)에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

김현승 시인은 '꽃'과 '웃음'은 현상적이고 변화기 쉬운 것인데 반하여 '열매'와 '눈물'은 가장 근원적이고 변하지 않는 은총의 선물임을 갈파했던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김현승 시인이 '열매'와 '눈물'을 '꽃'과 '웃음'보다 훨씬 더 고상한, 신앙적인 가치로 여긴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슬퍼한다고 할 때의 그 슬픔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눈물을 동반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연약함을 놓고 슬퍼하며 눈물 흘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계 21: 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결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의 죄와 연약함을 놓고 슬퍼한다>
지난 주에 우리는 팔복 중에 제 일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얻는 makarios의 축복을 살펴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이 빈털터리 거지와 같은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마치 걸인이 이웃이 베푸는 은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듯이 심령이 가난해서 거지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대할 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구원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치명적인 암에 걸린 환자가 의사에게 호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 저는 제 힘으로 제 몸을 고칠 수 없습니다. 저의 목숨은 이제 선생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제발 암 덩어리를 잘라내셔서 저를 살려주세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도 이 환자와 마찬가지로 "주님, 저를 구원하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셔야지만 제가 살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축복을 통과하면 제 이단계의 복으로 넘어가는데 이 복이 바로 슬퍼하는 자가 얻는 복인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서 가난하게 만든 뒤 하나님을 모셔드렸으면 이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놓고 통회(痛悔)해야 합니다. 애통해하면서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눈물로 씻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모두 이 두 번째 makarios의 복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죄와 연약함을 놓고 슬퍼해 보십시오. 눈물 흘려 보십시오. 그리할 때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 위로의 makarios가 여러분 위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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