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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과 하나님 (눅 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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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교회)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이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신들의 노예나 종처럼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신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하루는 신들이 연극을 구경 갔답니다. 그런데 그 연극의 배우들은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이었습니다. 인간들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을 신들은 관중석에서 구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극은 마침 신들을 흉내 내는, 흉내 내기 연극이었답니다. 인간들이 무대에서 신들의 복장과 신들의 말씨와 신들의 표정을 지으면서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은 신들 중에 황제라 하는 제우스(Zeus) 神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름다움의 女神 비너스(Venus)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술의 神 박카스(Bacchus)의 흉내를 내고, 기타 여러 신들의 흉내를 거의 똑같이 내면서 연극을 하더랍니다. 사람들이 얼마만큼 신들과 똑같은 흉내를 내면서 연기를 하는고 하면, 관중석에 앉아서 구경하던 신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확인하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우스神이 나오는 대목에선 제우스神이 앉아 있는 자리를 쳐다보면서, 혹시 제우스神이 직접 무대에 나가서 연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확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신들의 역할을 완벽하고 완전하게 흉내 내어 연기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창조할 수 있다고?” - 기독교 신앙이 투철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볼 때,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유명한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 여행을 하는 중에, 어느 마을에 들렸더니, 그 마을에서 무슨 경연대회가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경연대회인가 해서 가보니,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를 하더랍니다. 찰리 채플린이 흥미를 갖고 그 대회에 신청을 해서 참가를 했답니다. 여러 사람들이 나와 찰리 채플린 흉내를 내었습니다. 경연 대회가 끝나고 심사 발표를 하는데, 이 진짜 채플린이 몇 등 했을까요?  3등 했답니다. 진짜 찰리 채플린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그 작은 마을에 두 사람이나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가요를 부르는 가수 중에 나훈아 씨가 있는데, 이 나훈아 씨의 노래를 흉내 내어 부르는 가짜 나훈아가 여러 사람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이름도 걸작입니다. 너훈아, 나운아, 나훈하 ... 그런데 얼굴을 안 보고 노래만 들으면 진짜와 별 다를 바가 없답니다.

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들 수 있다는 것 - 우리 인간의 현실에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만큼 영악하다는 증거이지요. 이런 점에서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그저 그렇게 적당히 교회 다니면서 신앙 생활한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깊은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말씀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모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두 복음서를 다 읽어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예수님이 시험받은 이 세 가지 내용 자체는 같습니다. 하지만 순서가 다릅니다. 두 번째 시험과 세 번째 시험이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세 번째 시험은 마태에서는 두 번째로 나오는 시험입니다. 마태에서 두 번째로 취급한 시험을 누가는 왜 세 번째 시험으로 기록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시험문제도 나중 것이 더 힘든 문제 아니겠어요? 그런 점에서 보면 마태나 누가가 취급한 가장 어려운 시험에는 강조점이 좀 다른 듯싶습니다. 마태의 경우, 사탄이 “내게 절하면, 이 모든 세상 권력을 네게 주겠다”하는 시험을 가장 큰 것으로 여겼다면, 누가의 경우는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천사에게 명하여 너를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라는 시험을 가장 크게 취급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누가는 왜 이 시험을 가장 결정적인 시험으로 취급하였을까요?  그것은 시험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대응하시는 방법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다름 아닌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에 대해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대답하셨는데, 이 말씀은 구약 신 8:3의 말씀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은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권세를 다 네게 주겠다”라는 시험인데, 이에 대해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는데, 이 말씀 역시 구약 신 6:13에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응하니까, 사탄도 마지막엔 자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라고, 그리고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기록되지 않았느냐?”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시험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누가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시험한 이 시험을 가장 힘든 시험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날더러 네게 이렇게 하라 그랬다”고 한다면, 설마 하면서도 거절하기가 어딘가 찝찝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응하는 예수님에게 “봐라. (네가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 다른 곳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 않느냐?” 하면서 “뛰어 내리라” 하는 데에는 시험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의 시험을 정당화하는 그래서 그 시험에 빠지게 하는 고도의 술책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더욱 잘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안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교회를 더 잘 섬긴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모습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를 섬기는 모습과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을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보다도 이러한 믿음과 말씀에 대한 지식과 교회를 섬기는 모습과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을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그 모습을 더 우선시 한다면, 이러한 시험을 극복할 수 없음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 한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까지 동원하면서 예수님을 시험코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사탄은 예수님께 무얼 노리고 이렇게 시험했을까요? 그것은 시험의 내용을 보아 알 수 있겠습니다.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렸는데도 아무런 해나 상함이 없었다면 그것이 은밀히 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는데도 다친 데가 없다면 그것은 바로 기적이지요. 하지만 이 기적은 기적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뛰어 내린 사람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심지어는 영웅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인기를 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사람은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수요일 밤(2003. 3. 19)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공격하라는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UN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가 이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시 대통령이 국내 경제 회복을 일으키지 못한 가운데에서 이라크를 침공하여 유전을 획득함으로 미국 경제에 활성화를 가져옴으로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하고자 하는 이유로 이 전쟁을 일으켰다고도 말합니다. 저는 부시 대통령의 진정한 마음을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만약 그러하다면 부시 대통령은 이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43살에 중생의 체험을 하여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백악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교회 다니냐?, 성경공부에 빠짐없이 참석하라, 교회 봉사를 잘 하라”고 권유하며 다닌다고 하는 그가 속한 교회와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그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분명 그는 “미국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고 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공언한 그로서 그 신앙 양심을 어디에 감추어 두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더 나을 뻔 하다고 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역사 앞에 통회해야 합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이탈리아는 역사 속에서 전 국민 100% 복음화를 이룩했던 나라들입니다. 이탈리아는 카톨릭으로서, 독일은 개신교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미국도 개신교의 청교도 정신으로 건국되었다고 일컬을 만큼 기독교 정신으로 세운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해도 되는 것인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하고자 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의 연세대학교 연합신학 대학원을 다닐 때, 신약신학을 가르치시던 고(故) 문상희 박사께서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칠판에 “God above God (하나님위의 하나님)”이란 말을 쓰시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생각하고, 말하고, 전하는 하나님 그 이상의 분이시다”라고 하면서 “너희는 이 말을 결코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학 공부를 대학원에서 조금 더 했다고 하나님을 함부로 설명하고, 함부로 여기고자 하지 말라는 경고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탄의 시험에 어떻게 응수하셨습니까? 이전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응수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이 말씀 역시 구약 신 6:1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지어내거나 생각해 낸 말씀이 아닙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험했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응수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는 시험하는 재료로, 다른 하나는 그 시험을 물리치는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표현을 하였습니다. “같은 샘물이라도 양이 마시면 젖이 되지만,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 시험에 통과한 예수님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 시험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 나서, 몹쓸 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낫게 해 주고 나서는 이들에게 은밀하게 당부하였습니다. “어디 가서 내가 고쳐 주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 메시아의 길을 가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의 종교적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내 뜻을 행하려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에서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인기를 얻으려고 합니다. 인기를 얻는데 만족치 않고 높이 올라가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고자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욕망이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마저도 이러한 우리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 시험을 극복함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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