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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극복된 사람 (출 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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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대광교회)

  유대인들의 역사는 구약성경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세 사람을 꼽는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모세를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은 민족의 조상으로서, 다윗은 통일왕국시대의 번영을 이룬 위대한 왕으로서, 그리고 모세는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지도자로서 존경합니다. 사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구약성경에서 본받을 만한 인물 세 사람을 선택하라면 이 사람을 꼽습니다. 이들은 그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사람에게 존경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인물중심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면, 이 사람들을 빼놓고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 관하여 저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한번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살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중요한 행적과 사건은 어느 정도 언급을 했습니다. 이제 모세를 한번 생각해 볼 시기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세 사람 중에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받기에 그의 삶이 더욱 궁금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를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가 무엇일까요? 이제 앞으로 몇 주 동안 모세의 생애에 개인적인 모습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모세도 처음부터 그가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다듬어진 사람입니다. 그도 우리와 같이 약점과 실수와 허물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한계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모세를 대하면서 우선적으로 우리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는 극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그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또 그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을까요? 오늘은 이것을 본문을 포함한 3장, 4장의 내용을 통해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한계는 자기신앙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어느 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셨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지금 억압과 고통을 당하는 민족을 위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름 앞에 모세는 의외의 질문을 하는 것을 봅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모세는 그의 신앙,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기신학의 한계에 부딪힌 것을 알려줍니다. 부름을 받을 때 모세의 나이가 80세였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하나님에 대해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모세가 지금 하나님의 부름 앞에 이해가 되지 않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아직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그곳에서 경건과 신앙에 몰입한 사람입니다. 고요한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지냈습니다. 외로운 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부름을 받은 엄숙한 순간에 모세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경건하게 살았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의 수준입니다. 모세의 신앙의 현주소와 상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둘째 한계는 자기능력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명령하셨습니다. “내가 함께 할 것이니 너는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4장 1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이게 또 무슨 말입니까? 이 일을 하기에는 내 능력의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지금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합니다. 그리고 애굽 왕의 강력함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바로 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힘을 보았습니다.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애굽 왕이 순순히 백성을 내어 줄 리 없었고, 그와 비교해 보니 자기는 너무도 초라해 보인 것입니다. 상대는 너무 크고 자신은 작아 보입니다. 도저히 싸워 이길 승산이 없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계에 부딪쳐 도저히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셋째는 자기환경의 한계입니다. 자기신앙의 현주소를 알고, 자기능력의 한계를 어느 정도 파악했으면 이제는 선뜻 나설 만도 한데 여전히 모세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습니다. 좀처럼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결정적으로 자기환경을 탓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운명을 탓하고, 팔자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자기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데 자기는 천성적으로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어눌한 사람이니 말 잘하는 다른 사람을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말도 못하고, 결과도 장담 못하는 싸움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이것인데 무슨 수로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뿌리가 없고, 생김새가 그 모양이고, 내 팔자가 정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모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솔직하고,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름을 받을 때, 처음 시작할 때, 그는 약했습니다. 힘이 없었고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한계에 부딪쳤고,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런 한계를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구차한 변명으로 상황을 피하려 했던 모세가 이제 한계를 극복합니다. 그가 어떻게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잘 알려줍니다.

  자기신앙의 부족을 느낄 때 하나님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가 나에 대해 묻거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잘 모르는 모세에게 하나님을 심어 주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 이것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어디에 있습니까!

  능력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은 인간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 앞에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넣었더니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손을 품에 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정상으로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모세의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셨던 것입니다. 힘으로 안되고 능으로 안되지만 여호와의 신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자기환경과 운명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분명 모세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눌한 사람입니다. 자기 약점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이 있었고, 환경에 눌리고, 상황과 현실에 자기를 가두어 놓고, 자기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이런 모세를 하나님은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 주셨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점이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얼마든지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조그만 울타리에 가두지 말고 훨훨 날아보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환경은 극복되고, 팔자는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면서 자기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자기신앙, 자기능력, 자기환경의 한계를 뛰어 넘습니다. 한계를 극복되자 그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모세는 이제 극복된 사람으로 애굽으로 갑니다. 아론이 마중 나올 때 그에게는 비장함이 있었고,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자신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백성 앞에서 그는 당당했습니다. 자기한계를 극복한 자의 당당함이 온몸에 베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자세로 출애굽의 역사를 단행합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이스라엘을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시킵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극복된 사람, 한계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자기한계와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분명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이 강한 것 같지만 약한 것입니다. 누가 나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죄 없는 사람이라고, 옳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조금 바람만 불어도 흔들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다가도 다시 죄짓는 자입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주님을 찾다가도 얼마나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시켰습니까! 두 주먹 불끈 쥐고 잘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수없이 넘어지기가 일쑤입니다. 다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튀어나오는 옛사람의 행동 때문에 얼마나 우리는 밤새도록 흐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분명 능력의 한계도 있습니다. 아무리 달려들어도 잘 안됩니다. 땀을 흘리고 수고해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합니다. 내 능력이 고작 이 정도 밖에는 안되는 것을 보면서 낙심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자신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이런 내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할 수 없음에 부끄러워 한없이 고개를 떨굽니다.

  자기환경의 한계도 있습니다. “나는 가진 게 없다, 돈도 없고 배경도 없다, 명문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나는 천성적으로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이다...”하며 얼마나 조상과 부모를 원망하고, 환경과 운명을 탓하며 살았습니까!

  분명 우리에게도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로 한계를 뛰어 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앞에 여리고와 같은 장벽이 있더라도, 홍해가 가로막혀 있더라도, 믿음은 극복하게 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강한 하나님을 보게 하고, 우리는 부족하지만 풍성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나는 안되지만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모든 사람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들은 자기한계가 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베드로도, 모두 한계가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면 된다, 한계는 반드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울타리로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까지 운명을 탓하며, 그래서 기를 피지 못한 채 힘없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팔자는 반드시 고칠 수가 있고, 환경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벼룩은 높이 뛰는 벌레입니다. 자기 몸의 약 200배까지 뛸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벼룩을 곤충학자들이 유리병에다 넣고 실험을 합니다. 넣자마자 높이 뛰어 빠져나갑니다. 그러기를 몇 번 하다가 이제는 병의 뚜껑을 만들어 놓습니다. 처음에는 벼룩이 종전과 같이 열심히 뜁니다. 그러다가 자꾸 부딪치니까 뛰지를 않습니다. 뛰어도 병 안에서만 뜁니다. 그런 벼룩을 유리병에서 빼내어 밖에다 놓습니다. 그래도 벼룩은 뛰지 않습니다. 아니 뛰지 못합니다. 그 무한한 잠재력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지금 벼룩은 자기의 세계는 유리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뚜껑이 없어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내 울타리로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200배 이상 발휘할 수 있음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찬송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수록 나를 더욱 귀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두손들고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없다면 절대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는 바로 인간이 갖는 한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난 뒤 그 한계는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극복할 수 있고,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극복된 사람입니다. 이제 신앙의 한계, 능력의 한계, 환경의 한계를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주님을 따라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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