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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헛맹세를 하지 말라 (마 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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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37)

맹세, 서약의 필요성

  오늘 말씀의 주제는 맹세입니다.  맹세란 말은 헬라어로 o{rko"( 호르코스)입니다.  호르코스는 헬라 신화에 나오는 거짓 맹세와 위증을 처벌하는 신입니다.  호르코스란 말의 뜻은 지켜야 될 맹세나 서약을 의미합니다.  맹세란 넓은 의미에서 약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사회는 모든 것이 약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작게는 개인과 개인의 약속이 있고, 크게는 국가와 국민 사이, 혹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조약이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도 약속입니다.  상거래를 위해서 계약서를 맺는 것도 약속입니다.  국가가 정한 헌법이나 법률을 지키는 것도 약속입니다.  회사원이 지켜야 될 정관이나 社規도 약속입니다.  성문법은 아니지만 도덕률이나 관습도 일종의 사회적 약속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한 결심도 자신을 향한 약속입니다.  인간은 약속의 동물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닮은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항상 언약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43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삭에게, 야곱에게, 다윗에게,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언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인간도 언약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약속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약속을 맺고 있고, 그 약속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양한 약속의 유형들이 나옵니다.  첫째로, 결의를 다지기 위한 약속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세운 소신이나, 뜻을 이루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어떤 집단이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결단하는 서약도 있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창42:15)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행23:12)  둘째로, 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약속입니다.  상거래를 위한 각종의 계약이 있습니다.  헌법이나 법률, 정관, 회칙, 학칙과 같이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약속이 있습니다.  국가간의 조약이 있습니다.  선거공약도 일종의 약속입니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26:28)  셋째로, 진실을 변호하기 위한 서약, 혹은 법정적 증언을 할 때의 서약이 있습니다.(출22:11,왕상22:16,마26:13)  이런 서약은 분쟁 해결의 도구가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로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출22:11)  “왕이 저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고하겠느냐?”(왕상22:16)  넷째로, 어떤 임무나 책임을 확정할 때의 서약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취임 선서, 공직자들의 취임 서약이 있습니다.  결혼하는 남녀는 아내로서,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운동 선수들은 규칙을 잘 지키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50:25)  “제 칠 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왕하11:4)  이와 같이 인간은 다양한 약속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율법에 이런 맹세의 명령을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신10:20)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 30:2)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신 23:21)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리고 그 맹세들을 반드시 지키라! 

  그러면 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근본적 이유는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굳이 공개적으로 맹세하지 않아도 서로의 도리를 지킬 수만 있다면 맹세가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이 항상 성실하다면 굳이 맹세로써 결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항상 진실하다면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서약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이 본연의 임무를 잘 수행한다면 취임 서약 따위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항상 화목하다면 정당하게 싸우겠다든지, 분쟁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모든 맹세가 다 인간의 연약성이나 부족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맹세의 효과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효과는 책임을 잊지 않고 수행하도록 촉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효과는 책임 이행 여부에 대한 보응입니다.  책임을 이행하면 보상이 따르고, 이행하지 않으면 처벌이나 손실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맹세는 연약한 인간들이 어떤 책임을 수행하도록 촉구하고 자극합니다. 

지켜지지 않는 맹세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일체의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약에는 맹세를 하라고 했는데 주님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구약 율법을 바꾸자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 첫 번째 이유는 맹세를 漫忽히 여기고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맹세는 쉽게 하고 지키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자신만만하게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약속 不履行의 사회입니다.  수많은 상거래 계약서들이 작성되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수많은 커플들이 결혼 서약을 하지만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공약을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운동선수들은 경기에서 fair play를 서약하지만 실제로는 dirty play를 합니다.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겠다고 선서를 한 증인들이 거짓 증언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간 조약도 휴지조각입니다.  지금까지 깨어지지 않은 조약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맹세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요.  지키지 않을 바에는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진노하시는 맹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거짓 맹세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명예를 걸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을 염두에 두고 맹세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맹세를 너무나 쉽게 했고, 그 맹세를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맹세한 것을 보세요.  심심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합니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32회),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7회),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7회), “여호와로 맹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삼상20:42) 등등.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했으면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지킬 수 있는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맹세 행위를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2)  “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렘5:2)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8:1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모독입니다. 

  아무튼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맹세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었습니다.  지키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아주 괴상한 맹세법을 만들어 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치 않고 하나님과 관련된 물건을 걸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전을 걸거나, 제단을 걸고 하는 맹세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냥 성전이나 제단만을 거는 것이 좀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다른 것을 추가했습니다.  성전의 금이나 제단의 제물을 걸고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맹세에 등급을 정했습니다.  성전을 걸고 맹세한 것보다는 성전의 금을 걸고 맹세하는 것이 등급이 높습니다.  제단을 걸고 맹세하는 것보다는 제단 위의 제물을 걸고 맹세하는 것이 더 등급이 높습니다.(마23장)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맹세의 대상물을 다양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늘을 걸고 맹세합니다.  땅을 걸고 맹세합니다.  예루살렘을 걸고 맹세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머리를 걸고 맹세합니다.  자신의 머리를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즉 생명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맹세의 대상들은 등급이 다 달랐습니다.  등급이 높은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되고, 등급이 낮은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했습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맹세의 대상을 선택했습니다.  눈 가리고 아옹입니다.  하나님을 우롱하는 괴상한 맹세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종류의 맹세를 전혀 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열 번 맹세하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번이라도 진실하게 자기 할 도리를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약속은 뻔질나게 하면서 지키지는 않습니다.  밤낮 바르게 살겠다고 하면서 실제로 바르게 살지는 않습니다.  밤낮 성공하겠다고 하면서 밤낮 실패합니다.  노력하겠다고 하면서 노력하지 않습니다.  가장 불쌍한 여자는 밤낮 큰 소리만 치는 실속 없는 남자와 사는 여자입니다.  가장 불쌍한 남자는 거짓 맹세하는 여자와 사는 남자입니다.  헛맹세 잘 하는 사람은 신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귀어 봐야 유익이 없고, 손해만 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맹세보다 중요한 것은 하루라도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맹세를 지킬 능력이 없다

  주님께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 더 본질적인 이유는 인간에게 어떤 맹세라도 지킬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생각처럼 유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재도 뇌를 다치면 하루아침에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미스코리아도 병들면 추녀가 될 수 있습니다.  부자도 망하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약속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행동입니다.  인생사에 가장 흔한 약속들이 왜 지켜질 수 없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첫째로, 결혼 서약입니다.  결혼예식 중에 가장 중요한 순서는 서약입니다.  흔히 결혼을 “百年佳約”이라고 합니다.  백 년 동안 사이좋게 묶어놓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백년을 사이좋게 함께 지내겠다는 약속은 터무니없는 약속입니다.  우선 백 년 동안 목숨이 유지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느 한 편이 먼저 죽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백 년 동안 계속 사이가 좋을는지 나쁠는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혹간 백년을 산다 해도 건강하게 살는지 골골하면서 살는지, 행복하게 살는지 불행하게 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대를 잘 타고 나서 요즘처럼 잘 먹고 잘 사는 평화 시대에 산다면 부자 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6.25와 같은 전쟁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무리 유능해도 평화로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부자가 되든지 가난하게 되는 것도 본질적으로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백년가약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지나친 표현입니다. 

  둘째로, 상거래 약속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약속은 아마 상거래와 관련된 약속일 겁니다.  매매계약을 비롯한 각종의 거래 약정서들이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약속들이 과연 다 지켜질 수 있을까요?  계약금을 걸고 잔금을 치루기까지 무슨 돌발사태가 일어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계약 당사자인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고, 자금에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고, 사회적 변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천재지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실상 어떤 계약이 완전히 성립되기까지는 인간 능력 밖의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셋째로, 개인적인 맹세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를 짓고 재산을 쌓아두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창고를 늘릴 수 있는지는 몰라도,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이루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사실은 다 무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사업도, 권세를 얻는 일도, 유명해지는 일도, 다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넷째로, 사회적인 약속들입니다.  정치인의 공약에서부터, 국가간 조약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계약이 지켜지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세계 평화를 위해서 유엔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유엔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쟁이 없었던 해가 없습니다.  전쟁이 없는 대륙이 없습니다.  민족 갈등, 인종 청소, 대량 학살은 계속 일어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약속도 인간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어떤 약속도 지킬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약속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하시비 바랍니다.  오늘 내가 하는 어떤 약속도 내 능력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맹세를 하지 말라는 주님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일까요?  그 뜻의 참된 의미는 바로 37절 말씀에 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37)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라” 할 것은 “아니라” 하시오!  yes 할 것은 yes하고, no 할 것은 no 하시오!  법정에 서 있는 증인을 상상해 보세요.  중요한 것은 맹세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이면 “예”하고, 거짓이면 “아니요”하면 됩니다.  사실을 인정하라! 진실을 인정하라!  그런 뜻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하나님 섭리에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인생사를 절대적으로 섭리하십니다.  내 인생의 모든 순간에 간섭하십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지요?  결혼하는 사람이 百年偕老 하려면 건강해야 됩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합니다.  직업적으로 성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다 인간 능력 밖의 일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보다, 하나님 섭리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국경선을 정하시고, 시대를 정하시고, 통치자를 정하십니다.  개인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고,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십니다.  개개인의 삶을 설계하시고 그 뜻대로 좌우하십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6,2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요즘 생명과학자들이 인간을 연구하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 체질, 질병, 성품, 두뇌와 같은 중요한 요소들이 대부분 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생이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되고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하나님은 내 인생의 설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인생은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무모한 사람은 인간적인 목표를 세우고 동키호테 식으로 돌격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의 초보에서는 내 뜻에 따라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많은 교회와 지도자들이 이런 식으로 가르쳐 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시오!  기도하면 만사가 내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 인생을 맞춰 나가는 겁니다.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뜻을 이루는 데서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성취됩니다.  요즘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파리 날리기 십상입니다.  손님이 안 와요.  요즘 구름 떼처럼 몰려다니는 교인들을 보세요.  다 자기 뜻을 이루려고 몰려다니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몰려다니는 교인들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그러나 악착같이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소원성취하기 위해 몰려다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절대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셉에게 무엇이 형통입니까?  형들에게 버림받은 게 형통입니까?  노예로 팔려간 게 형통입니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것이 형통입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무 것도 형통이 아닙니다.  그저 계속 꼬이는 인생일 뿐입니다.  만일 요즘 신자들이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어떻게 할까요?  억울함을 풀기 위해 청와대에 탄원하고, 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신문사에 알리고, 난리 법석을 떨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거니 하고 따르려는 사람은 성덕중앙교회 교인들을 빼면 아마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일절 자신의 삶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입으로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요셉 개인에게는 30세 총리로써 파라오 다음의 부귀영화를 얻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에게는 큰 민족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습니다.  요셉 스토리의 결과만 갖고 얘기하지 마세요.  요셉이 얻은 성공이 어떤 과정에서 나왔는지를 살펴 보세요.  신앙은 신기루가 아닙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간섭하고 계심을 인정하고 순종해 가는 과정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실제로 얻은 땅은 부인과 자신이 묻힐 매장지뿐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고 하나님께 인생을 맡겼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에 가서 20년 동안이나 품삯을 받지 못하고 노동력 착취를 당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을 위해 고민하던 야곱이 마지막 던진 말이 뭡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  아들을 잃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리라!  다윗은 아들이 병들었을 때에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아들이 죽었을 때에 털고 일어났습니다.  자식의 생사를 하나님 섭리에 맡긴 겁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 전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럽으로 건너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인생행로를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 할 때에 많은 동지들이 말렸습니다.  결박당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판단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죽는 것이라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에 동지들은 바울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21:1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전적으로 하나님 뜻에 맡겼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뜻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고후1:17) 

  그렇다고 운명론자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설계도, 계획도 없이 무대뽀로 살라는 말은 더구나 아닙니다.  계획도 세우고, 목표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결론입니다.  인간 사회는 수많은 약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약속들이 맺어집니다.  그러나 약속하기 전에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하는 약속들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또한, 내 힘만으로는 온전하게 지킬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설계하듯이 하나님도 내 인생에 대한 설계를 갖고 계십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장담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내 인생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뜻을 관철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세요.  내 입으로 무슨 약속을 하기 전에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실는지 기도하십시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준비부터 하십시오.  그것이 맹세하기 전에 우리가 취해야 될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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