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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함이 있는 곳 (고후 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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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설교내용

  인격장애의 위험성

  우리 주변에는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끔직한 사고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유영철의 집단살인사건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피해를 줄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아파트에 자기 아이를 집어던지고 자살하는 일이라든지, 아버지가 아이를 한강에 던지고 자살하는 일이라든지, 또 우리 기억에 새로운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사건 같은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두고 우리 사회는 쉬운 말로 이렇게 용서해 버립니다. ‘저 사람들은 정신이 돈 사람들이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정신병자로 취급해 버리면 쉽게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아, 정신병자니까 저런 짓을 하는구나’ 그러나 제가 최근에 접한 전문지식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영철이 그런 끔직한 사건을 저지를 때, 또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역시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아주 교활한 방법으로 완전범죄를 노리는 그런 행동은 정신병자가 도무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자는 죄를 짓고 감출 줄도 모르고 자랑거리가 있어도 자랑할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느냐? 전문가의 입장에서 그것은 인격장애이지 정신장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격이 파괴되어 버렸다, 즉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을 두고 자꾸 차별화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격장애라는 측면에서 보면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인격장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입니다.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가진 사람도 못 가진 사람도, 국회에서 일하는 국회의원도, 정부청사에서 일하는 그 관리들도, 청와대에서 일하는 분들도, 또 우리 시민들 모두가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격장애가 있다는 이 말은 다른 말로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그만큼 소중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자유에 관한 말씀을 나눌 때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자유를 누리는 그런 축복의 자리에서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각하는 자유와 행동하는 자유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유를 잃어버리고, 자기 꿈을 성취하기는 했는데 자유를 잃어버리고, 명예는 얻었지만 자유를 잃어버리고, 복권에 당첨되고도 자유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는 두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하는 자유입니다. 생각하는 자유는 아주 소중합니다. 우리가 좋은 그림을 보면 아름답고, 산천초목을 보아도 아름답고, 비가 올 때는 그 비가 오는 분위기를 생각하고, 날씨가 좋으면 좋은 데로 생각을 하는 이 자유는 아주 소중한 자유의 영역입니다. 이건 아무도 속박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 중에 생각하는 자유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하는 자유가 병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생각하기는 하는데 지난날의 억울한 것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속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행동하는 자유입니다.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도 아주 소중합니다. 여러분이 휴가를 떠나실 때 동해로 갈 것인가? 서해로 갈 것인가? 선택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설악산을 갈 것인가? 지리산을 갈 것인가? 선택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자유와 선택하는 자유가 병들어 있는 것은 인격이 파괴되었을 때 생각하는 것도 나쁜 것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마다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인격장애라는 게 아주 무서운 것이면서 보편적인 것입니다. 성한 사람과 정신이 병든 사람은 구별이 되지만 인격장애는 육체적으로 멀쩡하면서 다 가지고 있는 병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부자유합니다. 우리 안에 부자유하게 하는 요소들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수건을 쓴 얼굴

  성경말씀을 보면 아주 흥미 있는 비유가 나옵니다. 16절에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수건을 쓴 얼굴과 수건을 벗은 얼굴로 비유를 했습니다. 수건을 쓰고 거울을 보면 보이지 않는다,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면 바로 볼 수 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수건을 쓰고 오신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우리가 수건을 쓰고 출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 각자의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건은 “주께로 돌아가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이 수건은 내 스스로 벗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의 수건은 스스로 못 벗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스스로 벗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미움이 일어날 때 이 미움도 우리가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열등감이 일어날 때 이것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죄성으로 묶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을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엉키게 되어 있습니다. 흙탕물에서는 씻으면 씻을수록 더 더러워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부자유해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쓰고 있는 수건은 스스로 벗을 힘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께로 가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수건을 벗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쓰고 있는 수건이라는 이게 무슨 정체입니까? 율법이고 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벗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수건을 벗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습니다.

  본 교회 성도가 인터넷 중독에 대한 좋은 논문을 하나 썼습니다. 인터넷 중독이 지금 사회의 큰 문제인데 왜 인터넷 중독이 일어나느냐 하는 그 원인을 잘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익명성이기 때문에 편리하다는 것입니다. 잠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세계 안에서는 자기를 감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표현성이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져 있어도, 마음이 상할 때도, 누가 미울 때도 인터넷 안에서는 마음껏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잘못된 정보, 남이 제공해주는 글을 보면서 충동을 받는 것입니다. 충동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혼자 희열을 느끼고 자기도취에 빠지는 세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금강산 구경도 혼자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호텔의 일류식당에 가서 식사를 혼자 해 보십시오.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힐끗힐끗 쳐다봅니다. 동물원의 원숭이 취급밖에 안 받습니다. ‘저런 좋은 식사를 왜 혼자할까?’ 그런데 인터넷 세계는 혼자 좋아서 희열에 빠지고, 혼자 도취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인터넷에 얽매여 부자유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 폐해가 굉장히 많습니다.

  인터넷 중독현상, 이것이 성경의 영적인 세계에 그대로 그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꾸 인터넷 중독에 빠져 드는 것처럼 중독이 들 때는 희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술 먹고 술에 취하는 사람도 술 먹은 기분은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로 좋은 결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결과로 가는데 재미도 있고 기분은 좋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수건을 벗고 살아야 되는데 자꾸 수건을 쓰고 삽니다. 벗을 생각을 안 합니다. 그 수건 안에 자기를 감춥니다. 그 수건 안에서 잘못된 자기 자신에게 도취가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보실 때 자유가 없는데도 자기 혼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반드시 수건을 벗어야 됩니다.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라고 했습니다. 수건을 벗는 행위, 이것은 자유의 기본이고 첫 출발입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온갖 수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수건을 벗는 길

  빌 클린턴은 2000년 8월19일에 굉장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으로서 시카고 빌 하이벌스 목사가 주관하는 미국교회 목회자대회에서 4,500명의 목사님이 모인 그 자리에서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 대한 회개고백을 했는데 그 말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생각이 자유롭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대통령까지 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은혜를 모르고 사니까 내가 죄를 짓게 되고 얽매였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생각의 자유가 왔다,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하원의 탄핵을 받으면서 괴로워했지만 내게 진정한 자유가 없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 앞에 나의 허물을 고백함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여러분, 현직대통령이 4,500명의 목사님들 앞에서 이런 신앙고백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왜 이런 고백을 하느냐? 내가 쓰고 있는 이 멍에가 이와 같은 공적인 회개를 통해서 벗지 않고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클린턴이 자유를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위대한 회개의 원리를 우리 앞에 말합니다. 여러분, 수건은 벗어서 폐기해야 됩니다. 다시 쓰려고 두지 마십시오.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벗은 수건을 다시 쓰려고 집착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벗은 수건은 폐기해 버려야 됩니다. 예배당에서 벗은 수건을 집에 가면 또 쓰고, 직장에 가면 또 쓰는 수건이 되면 안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주일엔 수건을 벗었다가 평일엔 또 썼다가 이렇게 반복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부자유케 하는 불신앙은 완전하게 떨쳐 버려야 자유가 있습니다.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IMF때 보증문제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한 친구는 많은 재산을 잃게 되고 그 일로 인해서 이 두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갈등에 빠졌습니다. 7년이 지난 지금 실패했던 친구가 회복이 되어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니까 손해 본 친구는 더 속이 상합니다. 돈을 벌었으면 남의 돈 떼먹은 것을 갚아 주어야 되는데 돈을 안 갚는 것입니다. 왜 돈을 안 갚느냐 하면, ‘네가 네 돈 때먹었다고 내게 한 행동을 생각해보라, 네가 내게 준 그 상처는 이 돈의 몇 배보다 더 큰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돈을 안 갚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갈등이 깊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떼인 이 사람이 하도 억울하고 친구가 하는 말이 너무 매정해서 견디지 못하는 가운데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교회에 이 유력한 사람이 그런 문제가 있는 것도 듣고 놀랐지만, 목사님이 그 사정을 듣고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해결방법도 간단합니다. 그런데 내가 일러주는 이 말을 꼭 실천하시면 분명히 해결이 됩니다. 실천하시겠습니까?" "예, 제가 실천하겠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손해 본 그 돈을 받을 생각을 포기해 버리라. 당신부터 자유해야 된다, 당신은 그 돈을 받겠다는 것 때문에 얽매이고 있다, 상대방이 돈을 안 갚을 때 안 갚는 그것 때문에 상대방이 속박당하는 것은 말로 다 못한다, 그것은 그쪽 일이고 당신부터 자유해라. 친구가 어려울 때 그저 도와주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고 살아보라,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아주 어려운 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분명히 해결된다고 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수건을 못 벗습니까? 무언가에 수건을 못 벗는 집착 때문에 수건이 안 벗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인간관계를 분석해 보면 수건이 안 벗어지고 있습니다. 미움의 수건, 질투의 수건, 양심의 가책의 수건, 그런데 우리가 쓰고 있는 수건을 무슨 원료로 만들었나 분석해 보면 대부분이 돈으로 만든 원료입니다. 수많은 인간관계의 갈등이 전부 돈 문제입니다. 현대인들이 쓰고 있는 수건이 돈이 원료입니다. 여기에 대한 잘못된 생각, 잘못된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부자유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자유하라

  그런데 이것으로 안됩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수건 벗었다고 다 되는 게 아닙니다. 수건은 벗어던지고 수건대신에 주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됩니다. 수건이 우리를 덮는 게 아니라 이제는 주의 영이, 성령이 우리를 옷 입혀야 됩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셔야 됩니다. 성령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데 이 성령의 역할이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로 성령은 능력입니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미움을 우리가 제거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제거하게 합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기도를 못할 때 기도를 하게 하는 능력이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 것도 성령으로 됩니다. 성령은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해야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합니다.

  두 번째는 신령한 은혜입니다. 성령 안에서 신령한 은혜를 누립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여 나온 줄로 믿습니다. 이 좋은 휴가철에 어디 떠나시지 않고 나온 것을 보면 우리가 대단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해도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바보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신령한 은혜가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안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소망과 감사와 기쁨과 위로를 얻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정직함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깨끗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유는 부정직과 언제나 직결이 됩니다. 부자유한 것은 부정직이 개입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우리가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정직성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가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질 때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담대케 하시고,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십니다. 이 은총이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이깁니다. 죄를 물리치는 용기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순종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도덕성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도덕성이라는 말이 인격파괴와 연결됩니다. 인격이 파괴되면 하는 것마다 부도덕해집니다. 그래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 도덕성이 회복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벗으라”는 것과 “주의 영으로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수건을 벗지 않고 은혜를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건을 벗지 않고 축복을 기대하는 것도 성경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으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벗어야 됩니다. 수건은 벗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에밀 부르너는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분의 명언 중의 한마디를 아주 좋아합니다.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로 하나님께 얽매일 때만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이성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얽매일 때만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유는 섬김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자유라운 개념은 그냥 좋다는 어떤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 개념은 ‘섬김’의 개념이고 ‘능력’의 개념입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면 힘이 곧 자유입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을 쳐다보면 누가 자유롭냐? 힘이 있는 사람이 자유롭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얽매입니다. 종노릇해야 됩니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지식 있는 사람, 재력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이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적으로는 사회적인 힘으로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힘은 섬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권위와 능력은 섬김과 동반합니다.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은 최고의 섬김입니다. 주님의 메시야적 모범입니다. 예수님이 섬긴 그 섬김은 두 가지 면에 아주 독특한 의미가 확정된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 드렸다는 측면에서 섬김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속죄로 인해서 모든 죄인들이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섬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 자신에게는 어떤 보상을 주셨습니까?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서 다시 만왕의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할 때 사실 자기부터 먼저 계산을 합니다. ‘내가 이 좋은 일을 하면 내게 돌아오는 게 무엇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 계산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 앞에 유익을 주었거든 내게 돌아올 계산이 무엇인가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 주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섬김입니다. 우리는 쥐꼬리 같은 일을 하면서도 계산은 나부터 합니다. 우리의 너무나 못난 모습입니다. 내게 돌아올 분깃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정확하게 계산하시고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내게 돌아올 것을 먼저 계산하니까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섬기고도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 앞에 유익을 주면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돌아올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분의 방법대로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맺는 말

  성공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은혜 받으십시오. 이런 말들은 다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 우리가 방심하면 안됩니다. 성공해도 부자유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건강한대도 부자유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행복하다고 하는데도 부자유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너무 성공을 따라가고 행복을 추구하고 세상개념으로 웰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자꾸만 따라가는데 진정한 웰빙은 주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하는 행복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분명하게 돌릴 줄 알고, 사람들 앞에 유익을 주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면서 살 줄 알아야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이 자유를 오늘 성경도 말씀합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 이 자유로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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