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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행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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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저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시리이즈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뭐냐?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본질은 뭐냐?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저희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라는 제일의 특징을 세 번에 걸쳐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은혜의 각성, 은혜의 의지, 은혜의 승리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서 “은혜”의 특징을 살펴 보았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라는 제목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말씀은 이런 배경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밤에 하나님을 찬미할 때, 큰 지진이 나서 옥문이 다 열려지고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그 광경을 본 감옥의 간수가 자신의 책임을 다 못한 것에 대하여 자책하고 자결하려고 하자 사도 바울이 그를 붙들어 말립니다. 무서워 떨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간수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제일 먼저 선언되어야 할 명제는 이것입니다. “주(主) 예수를 믿으라” 예수를 믿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선언해 준, 한 말씀이 <롬10:9,10>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며..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때에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복음서의 주제는,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고 그 대답은 “예수는 그리스도, 주님이시다”입니다. 여기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편적인 예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구주(savior)"라는 말은 15번 언급되어 있는 반면, 예수님이 “주(lord)"라는 말은 대략 290여회나 등장합니다. 신약 성경이 뚜렷하게 증거하는 멧세지가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주”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소유권을 가진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둘째는, 주됨은 절대적인 권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됨은 총체적인 권위입니다. 로마사람들은 로마황제, “가이사가 주님입니다”는 충성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로마황제에 대한 충성고백에 반하여 “예수님이 주님입니다”는 고백은 혁명적 선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사자밥이 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주됨은 정당한 권위, 합법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권력의 행사는 독재성을 띠어 합법적인 구실이 없이 강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되심은 권세와 정당성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됨이란, 인격체들간에 존재하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권위의 관계를 말합니다.

주는 완전한 권위로를 가진 자로서, 그의 뜻은 결정적인 영향을 가지며, 그에게는 복종이 요구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온 땅과 우주와 만물을, 역사를 주관하시며 다스리시는 절대 권력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나는 그분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는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핵심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인들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간과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이 초청에 대하여 오늘날의 사람들은 일요일에 교회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와 헌금 꼬박꼬박 하고 가거라 이런 소리로 이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주 예수 하면, 주씨 집안의 이름이 예수인 사람인 것처럼, 예수님의 성이 주씨이고 이름은 예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합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주 예수,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냥 고유명사처럼 부릅니다.

오늘날의 이런 헐랭이같은 모습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일찍부터 이렇게 예고해 주셨던 것같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1>

  또 오늘날의 어떤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서 인정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받아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온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사랑의 희생을 드리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예수님의 구세주되심을 체험하는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개인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예수님의 구세주되심을 체험합니다.

예) 침신대 수련회 때의 일 -

왜 이렇게 복음의 핵심이 간과되었는가?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주되심이 의미가 실종되는 변질을 가져왔는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두 가지가 큰 원인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는, 교회가 명확한 회심과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의 주되심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회심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각 개인에게 내 맘대로 살 것인가, 예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이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내 생각, 내 느낌, 내 판단을 버리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따르며 사는 삶으로의 회심을 도전합니다.

그러나 교인이 되는 것이 그냥 교회 다니게 되면, 자연스럽게 교회 분위기와 문화에 익숙해지고 적응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면서 개인의 회심과 신앙고백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주되심은 의미가 실종되어버립니다.

그 역사적 뿌리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의 이스탄불)이라는 새 도시를 건설하고 이 도시는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이 되자, 말하자면, 사람들이 교회에 떼거지로 몰려왔습니다. 국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교회 안다니면, 교양없는 사람, 야만인처럼 인식되니 다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주되심의 멧세지에 직면하는 것이 실종이 된 것입니다.

옛날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주되심이 간과되는 것은 예수 믿는 것을 그냥 교회에 잘 다녀서 교회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심, 신앙고백, 자연인들에게는 이런 것들 사실 인간에게 껄끄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붙들어 두려면, 교인을 양산하려면, “좋은 분위기, 서비스를 제공할테니 일요일에 교회 빠지지 말고 나오십시오” 하게 되고 그 가운데 예수님의 주님되심이라는 핵심은 실종되고 맙니다.

또 하나의 원인, 예수님의 주님되심이 심각한 수준으로 간과되는 이유는 교회가 상업적, 자본주의적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상업적, 자본주의적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은, “쉽게 빨리 크게” 교회를 성장시켜가야하는 것이 우선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목사도 월급을 받고 우리 교회 큰 교회다 소문도 나고 목사는 능력있는 목사라고 인정받고 교인들이 뿌듯한 자부심도 갖고 교회 식구들이 많아야 슈퍼마켓을 해도 교회 식구들이 팔아주어서 자연스럽게 잘 되고 그런 것이 우선이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주님되심, 회심과 분명한 신앙고백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인들에게는 껄끄러운 것입니다.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고 자기 중심성의 회개를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갈라 놓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주인됨을 고수하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하고 순종하든지 이 멧세지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장면을 보십시오. 대표적으로 <요6장>에서처럼 예수님이 Lordship을 선포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떠나갔습니다.

다수가 떠나고 소수가 남아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의 공동체를 이룰 것이냐 다수를 붙잡기 위하여, 복음의 예봉을 부드럽게 다듬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것이냐 이 선택의 기로에서 교회들이 상업적, 자본주의적 정신에 항복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합니까? 예수 믿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을 나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 믿는다는 말의 영어단어가 뭐가 있지요? 대표적인 것인 faith라는 명사와 believe라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단어는 뜻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믿음, 믿는다는 헬라어 단어는 피스티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피스티스는 원래 성실하다, 충성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잘 담은 단어가 사실은 faith입니다. 그래서 faithful이 성실한 이라는 뜻이지요?

1611년에 KJV이 번역되면서 번역가들이 고민을 한 것이 피스티스를 어떤 영어단어로 번역할 것인가 였습니다. faith라는 단어에 동사형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왕립학자들은 지적으로 동의하다, 지적으로 인정하다는 의미의 believe라는 동사를 faith의 동사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번역 탓이라고 보는 것은 조금 비약적인 해석이지만, 그러나 이 번역의 약화처럼, 오늘날의 교인들은 예수님께 충성, fathful to Jesus를 예수님을 지적으로 인정, believe in Jesus로 약화시켜 버렸습니다.

충성을 드리는 인격적인 관계가 빠지고, 지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으로 곡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능력없는 교회, 기쁨없는 신앙생활, 껍데기 교인, 명목상의 신자, 기업형 교회,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종교 이런 결과들이 나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네게 주니 라고 했는데 오늘의 교회는 은과 금은 많은데,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의 기쁨, 치유하시며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 이런 영적인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것은 없어도 하나님의 것은 있어야 할 교회가 세상의 것을 추구하느라 하나님의 것이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의 맛을 본 공동체, 신앙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이런 것입니다. 회심의 강조, 회개의 멧세지가 강조되었고 예수님의 주님되심(lordship)이 강조되었고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실재(reality)에 대한 눈이 떠졌습니다.

예수믿고 복받아서, 돈 많이 벌고 자녀들 좋은 대학 가고 높은 지위 올라서 좋고 신나더라가 아니라, 예수님 믿는 것 그 자체 때문에 좋고 신나고 기쁘고 즐거운 은혜의 체험이 누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가 무엇입니까? 제가 말 안해도 여러분이 앞에서 말씀드린 것을 곰곰 생각하면 다 아실 것입니다.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신의 믿음을 명확히 하십시오.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당신 자신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십니까? 분위기 자유스럽고 좋은 교회, 이 가운데 묻혀 있는 것으로 만족할 때 당신 자신은 큰 낭패를 당할 것이고 그런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도 결국은 해를 끼칩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님을 절대적 통치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따르며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인지 생각하시고 고민하시고 기도하시고 그리고 결정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예수님께 나의 인생과 영혼 전부를 의탁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는 인격적 결단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복음을 정직히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주되심의 복음을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지 않고 명확하게 증거하는 교회로 서야 합니다.

상업주의적, 자본주의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조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2:8>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마침내 예수님께서 통치자이심을 믿고 인내하여 예수님의 주님되심의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와 관계해서 두 가지 사실을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3:2>”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의 수고 여하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좋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켜서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다려야지요?

또 하나는,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복음을 마치 심판자처럼 들이대서 증거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더욱 큰 사랑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님되심에 직면하는 두려워합니다. 마치 자기의 어떤 것을 잃어버릴 것같고 내가 하기 싫은 것 주님께서 하라고 하시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광신자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직힌 복음의 멧세지 앞에서 이 두려움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사람들,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약속처럼, 더욱 정성스런 사랑을 나눔으로써 영혼들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자신을 의탁하도록 하는 것이 바른 방법,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주인되심을 강요, 공갈, 협박하시지 않지 않았습니까? 도리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써, 그 감동으로써 우리 스스로 오만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꿇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방법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자로서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지요.

소망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여 예수님이 약속한 믿음의 생명, 기쁨, 능력을 누려가는 모습입니다. 종교인의 껍데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믿는 것이 이렇게 신나고 좋고 행복한 것임을 함께 누려가는 것입니다.

소망은, 저희 교회가 예수님의 주되심을 복음을 사랑으로써 정직히 증거하는 통로가 되는 모습입니다. 교인들 양산하려고 호기심을 자극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벤트 회사가 아니라, 저희와 만남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온전히 믿고 의탁하도록, 사랑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교회가 되는 모습입니다.

그 가운데, 세상의 것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우리 교회가 가난하여 돈 때문에 어려움 겪고 불편함 겪을지라도, 하나님의 것은 생생하게 넘치도록 살아있는 교회로 서는 모습이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의 기쁨,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과 가치를 배우는 감격적인 깨달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교통하심이 무엇인지 느끼고 아는 행복, 우리 심령을 치유하시고 우리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가시는 은혜의 능력, 넉넉히 체험하여 아는 교회이고 싶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을 믿는 곧은 길이고 맑은 물, 정직과 순결의 공동체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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