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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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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악인과 악행의 문제

  오늘도 주님의 율법 해석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악인에 대한 대응법입니다.  惡人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악인?  ponhrov"  “나쁜, 해로운, 쓸모없는, 무익한, 도덕적으로 악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악한 자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목양관에 盆栽 한 그루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잎이 우수수 떨어져 있어요.  제때에 물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은 殺身成仁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메마른 환경에서 버티기 위해 물의 소비를 줄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잎이 스스로 알아서 떨어집니다.  악착같이 붙어서 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무 자체를 살립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스스로 희생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돈 없다고 남의 재산을 훔치고, 빼앗고, 생떼를 씁니다.  내 몸이 좀 불편하다고 남에게 원망 불평을 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보복을 합니다.  아주 고약한 본성입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해서 아주 뻔뻔합니다.  까뮈의“이방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느 날 돌발적으로 살인을 합니다.  재판정에서 그가 밝힌 살인의 동기는 단지 햇볕이 너무 강렬했다는 것입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데 대한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여자 친구와 만나 코미디 영화를 봅니다.  사람들은 그 점에 대해서 욕하지만 뫼르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는 날까지, 그는 별다른 마음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구경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한다면 그는 사람 사는 사회에서 別種입니다.  그래서 異邦人입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도덕과 관습에 대한 부적응, 죄의식의 부재!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뫼르소 대신 사회를 비판합니다.  현대 사회가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뫼르소에게 죄가 없다는 말입니까?  모두가 뻔뻔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악인에게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양심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죽여도 가책이 없습니다.  그냥 무덤덤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섭섭하지도 않고 슬프지 않습니다.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요즘 범죄자들을 보세요.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살인 강도짓을 하고도 붙잡힌 것만 억울해 합니다.  양심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둘째로, 잘못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도적질 하고 감옥에 가서 회개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도적질을 계획하고 나옵니다.  강도질 하고 감옥에 가서 또 다른 강도질을 생각합니다.  투기꾼이 남들이 욕한다고 투기 안 합니까?  계속 투기 합니다.  독재자가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독재 안 합니까?  계속 독재 합니다.  사기꾼은 계속 사기치고, 간음하는 사람은 계속 간음합니다.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의 본성적인 죄악성에 있습니다.  악한 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악인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  성경에 보면 악인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친동생을 죽인 가인(창4:8), 축첩을 하고 살인을 노래한 라멕(창4:23), 백성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왕(왕상21:1), 남편을 부추겨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은 이세벨(왕상18:24), 친 손자들을 몰살시킨 아달랴(왕하11:1), 소수 민족을 노예로 학대하는 바로왕(출5:6), 동생의 아내를 가로챈 헤롯 안디바스(마14:1),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마26:14), 교회에서 착한 사람을 헐뜯고 훼방한 디오드레베(요삼1:9) 등등.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악한 짓을 안 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약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으려고 여종을 취했습니다.  가정불화가 일어나자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았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라반은 조카를 부려먹기 위해서 두 딸을 아내로 주고,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로 알고 관계를 맺습니다.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관계를 맺어 못된 자식을 낳습니다.  아간은 전리품을 훔쳐서 동료 군인들을 패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알려진 다윗은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가로채기 위해서 우리야를 전쟁에 앞장세워 죽게 만듭니다.  솔로몬은 일천 명에 가까운 궁녀들을 두어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불에 태워 죽이자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스토리입니다.  악인이 따로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다 악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악인들의 소행을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첫째는 뺨을 때리는 행동인데, 이는 신체적인 폭력과 危害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뺨을 때린다!  뺨이란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  혹간 주먹으로 때려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뺨을 맞은 것보다는 덜 기분이 나쁩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모욕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회초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뺨을 때린 적은 없습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신체적 위해 이전에 경멸입니다.  요즘 드라마에 보면 뺨을 때리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폭력배들이 등장하여 개판으로 싸우는 장면들도 자주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에서 학생들도 조폭 흉내를 냅니다.  평범한 남편들도 아내를 구타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체적 폭력은 인간의 품위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악행입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킵니다. 

  둘째는 訟事로 남의 옷을 빼앗는 행위, 즉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행위입니다.  송사하여 속옷을 뺏어간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당 잡은 옷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말씀합니다.(출22:26)  왜냐하면 옛날 중동 사람들에게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옷이지만 밤에는 이불입니다.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입니다.  그런데 송사하여 속옷까지 뺏어간다면 보통 잔인한 행동이 아닙니다.  요즘도 벼룩의 간을 빼먹는 놈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채를 주고 말도 안 되는 높은 이자를 받아먹습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에게 취업 사기를 칩니다.  평생 노력해서 모아 놓은 퇴직금을 가로채는 놈들도 있습니다.  평생 남의 돈만 떼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약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 업주들도 있습니다. 

  셋째는 억지로 5리를 가게하는 행위, 즉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관습에 의하면 전쟁에 징발한 被征服民들을 일정 거리를 동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군인이라고 해도 강제 노역을 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요즘도 사람을 후려서 강제로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종의 人身賣買犯들입니다.  어린 아이를 섬에 끌고 가서 40년이나 노예처럼 부려먹은 사람이 붙잡혔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최근 한 연설에서 한국의 여자 아이들이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가장 나쁜 죄악입니다. 

악인에 대한 응징의 문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악인에 대한 응징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응징에 관심이 많습니다.  악인을 어떻게 응징해야 할까요?  악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뭔가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이완용의 후손들이 재산을 찾겠다고 합니다.  독재자의 자손들이 不正蓄財한 돈으로 잘 살아요.  사기꾼이 사기 친 돈으로 떵떵거립니다.  이들을 어떻게 조치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인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9절)  대적하지 말라!  ajnqivsthmi = ajntiv +++  i{sthmi,(anti stand)  반대편에 서다.  즉, 대적하다, 대항하다, 거역하다, 반대하다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적대적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무저항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구약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2-25)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24:19-20)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신19:18-21)  유대인들은 이 법을 보복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세요.  이 법은 보복법이 아닙니다.  재판법입니다.  말씀의 초점은 보복이 아닙니다.  정확한 처벌입니다.  사실상 이 법은 지나친 보복을 금지하기 위한 법입니다.  즉, 악인에 대한 최대한의 응징이 아닌 최소한의 처벌에 초점을 맞춘 법입니다.  그나마 그 처벌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개인은 어떤 이유에서도 범죄자를 응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누가 응징합니까?  두 가지 응징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공권력에 의한 처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1-4)  국가는 개인을 대신해서 범죄자를 처벌합니다.  국가 권력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은 勸善懲惡을 담당는 기구입니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된다면 개인적으로 당한 억울한 일을 얼마든지 풀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공권력이 올바로 행사되도록 감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국가 권력이 개인을 대신해서 악인을 응징하지만,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악인에 대한 응징이 미흡합니다.  때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잘못 판단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 법관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심판하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십니다.  사람은 잘못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잘못 판단하실 수 없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욥34:21-22)  아합과 이세벨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왕조의 몰락과 함께 파멸당했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사람들 눈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정확하게 응징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자식들 사이에 살인과 간음이 벌어졌습니다.  자식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신하들이 반란에 동참했습니다.  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엄청난 방법으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질병, 재앙, 천재지변, 전쟁, 기근, 사고, 배신...심판의 방법은 무수합니다. 

  악인의 처벌과 응징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국가 공권력으로 악인을 재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심판하십니다.  사람의 손으로 심판할 수 없는 부분들을 친히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악인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악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악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첫째로, 마음의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응징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복수심은 증폭됩니다.  즉, 실제로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크게 갚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것만큼 너도 당해봐라!  그런데, 실제로는 내가 당한 것보다 훨씬 크게 갚아줍니다.  우리의 정서가 그렇잖아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발병만 납니까?  염병, 등창, 곱창, 다 나라!  내 돈 떼어 먹은 놈은 자손 三四 代까지 거지나 되라!  그게 바로 보복의 심리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머물 때에 누이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세겜성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끔찍한 보복을 감행했습니다.(창34장)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아들들이 당한 것보다 몇 백 배 지나친 보복입니다.  요즘 중동 전쟁이 그렇습니다.  아랍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끊임  없는 피의 보복이 반복됩니다.  한 명 죽이면, 두 명 죽이고, 두 명 죽이면, 열 명을 죽입니다.  보복의 악순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마음의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입니다. 

  둘째로, 관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9-42절)  관용하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관용은 실제로 가장 유익한 방법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세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익은 내 자신의 평안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과민이 됩니다.  내게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푸대접을 합니다.  잘못하면 정신병에 걸립니다.  이미 손해 본 것도 억울한데, 왜 더 시달려야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미 지난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잊든지 관용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두 번째 유익은 가해자에 회개의 기회를 주게 되는 일입니다.  요즘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이미 세계 100개국이 넘는 나라들이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지른 살인이야 過去之事입니다.  범인을 사형에 처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살인범이라 해도, 또 다른 생명을 강제로 빼앗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살인범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면 오히려 회개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범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세상 종말을 앞당기지 않고 연장하시는 이유는 악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한 때 살인자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잡아 죽이러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죽이지 않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복음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관용은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줍니다. 

  세 번째 유익은 공동체를 살리는 일입니다.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찰 때, 공동체는 와해됩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 미워해 보세요.  가정은 무너집니다.  만일 성도들이 서로 미워해 보세요.  교회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관용의 정신은 공동체를 살아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악인을 관용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잘못된 반응입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들을 관용할 때에, 그들이 관용을 악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더 괴롭히고 못살게 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적절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했지, 악을 추종하거나 범죄에 협력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범죄의 협력자가 되거나, 악을 방조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지, 모든 악한 사람들을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세요.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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