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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막힌 담을 허시는 예수 그리스도 (엡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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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고나지 목사 (목양교회)

성경을 읽을 때 처음에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문장의 뜻을 알기 위해 많은 힘을 씁니다. 오늘 본문을 예를 들어보면 11절에 이방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할례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 말들의 뜻은 무엇인가,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이라는 복잡한 말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이런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정확하게 아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다 알기 위해서 지나치게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퀴즈를 풀 때 제한된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지혜로운 사람은 ‘통과!’ 합니다. ‘다음 문제!’ 하는 뜻이지요.
끝에 보면 이런 사람이 우승하는 일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 앞에서 알게 될 때까지 제자리걸음하지 마시고 ‘통과!’ 하시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성경을 끝까지 읽으면, 또 여러 번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됩니다.

성경을 읽는 더욱 성숙한 태도가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응용이라고도 하고 적용이라고도 합니다.
설교도 뜻을 설명하는 설교보다 적용을 강조하는 설교, 말씀을 삶에 잘 적용하도록 자극을 주고 인도하는 설교가 수준 높은 설교입니다.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이 참 귀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정말 귀한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영적 해방선언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누구나 칼 찬 순사를 보면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59년 전 바로 오늘, 일본이 항복을 하고 우리 나라가 해방된 이후에는 순사보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일제 시대 때 순사를 했던 사람이 사람들을 피해 다니기 바빴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우리는 죄와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들을 향해 ‘네까짓 것들이 무엇이냐?’ 호통을 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절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는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데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저는 그저 출애굽기 정도 못 보게 하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정도만 못 부르게 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CBS-TV에서 광복절 특집으로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그것을 보니까 그때 의외로 여러 권의 성경을 볼 수 없게 했고, 또 여러 장의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 때 신앙생활은 절름발이 신앙생활이었습니다.
8·15 해방은 정치적인 해방이면서 성도들에게는 신앙생활의 해방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에베소서 2장은 에베소서에서 전체의 중심이 되는 장입니다.
그 가운데서 14절은 에베소서 2장의 요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화평을 이루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평화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평화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태초부터 평화를 세우시고 마지막 날까지 평화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님은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둘을 말합니다.
할례를 받은 할례당과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을 말합니다.
동시에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나와 이웃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이를 막고 있는 담들을 허무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사실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특별히 이 말씀은 광복절을 맞이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첫째, 나와 하나님 사이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여러 가지 장기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에서도 심장은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사람이 죽은 것을 표현하는 말이 여럿 있습니다. ‘호흡이 끊어졌다,’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와 함께 ‘심장이 멈췄다.’는 말을 많이 씁니다. 심장의 이상은 곧 생명과 연결됩니다.
혈관이 막히면 심장이 멈추고 우리는 죽게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사망원인 가운데 아주 높은 것이 심장마비입니다.
특히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는 원인은 심장마비가 1위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심장과 같은 것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심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의 심장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하나님이 중요한 것은 모르는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혀 있는 것들이 있어서 교통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은 영적 심근경색에 걸린 사람입니다.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막거나 좁게 만드는 것은 기름기, 노폐물, 찌꺼기,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은 죄, 이기심,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 교만,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막히기를 원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에베소서와 비슷한 내용을 가진 성경이 있습니다. 골로새서입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쌍둥이 서신이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과 20절은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런데 사람들이 부주의해서, 우매해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슬프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것이 없는지, 영적 연합이 온전히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막힌 것이 있다면 막힌 담을 허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을 허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영적 연합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웃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것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수직적인 연결, 수직적인 평화입니다.
나와 이웃들의 관계는 수평적인 평화입니다.
수직적인 평화와 함께 수평적인 평화를 이뤄야지 조화를 이룬 평화, 튼튼한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어제 새벽에 아테네 올림픽이 개막되었습니다.
「중앙일보」가 올림픽 개막 기사의 제목을 ‘신과 인간도 남과 북도 하나가 됐다’라고 했습니다.
아테네가 신화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었다고 했고, 남한과 북한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했기 때문에 남과 북이 하나가 되었다고 한 것 같습니다.
인상적인 제목인데 ‘신들과 인간도’ 해야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들이 하나가 아니고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는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기독교만 유일신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한과 북한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합니다.
남한과 북한은 이런 국제대회에서 이번까지 다섯 번 공동 입장했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한 걸음 더 나가서 단일 팀이 구성되어야 합니다.
더 나가서는 하나의 나라로서 참가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남과 북이 하나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모퉁잇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0절에서 22절까지를 보세요.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두고 친히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1:42, 막12: 10, 눅 20:17)

모퉁잇돌은 어떤 일을 합니까?
가로와 세로를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
모퉁잇돌이 바로 놓여야 건물이 바로 세워집니다.
모퉁잇돌은 기준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있는 그 곳에서 모퉁잇돌의 역할을 잘 해야합니다.
그 단체나 사회가 잘 연결되게 하고 바로 세워지도록 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긴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인류의 대제사장으로서 드린 최후의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예배 드릴 때 거의 마지막에 목회기도 순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말하면 ‘목회의 중보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모델로 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기도에서 ‘내가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간구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21절과 2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장엄한 기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퉁잇돌로서 이웃들과 하나가 되는 일, 이웃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독일 뤼베크 성당의 낡은 돌판에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시인데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고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고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고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부르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소박하면서도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는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넣어도 좋을 줄로 압니다.

너희 날 화평이라 부르면서도 이웃과의 담을 허물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이웃과의 관계를 점검하면서 막힌 담을 허물면서 화평을 이루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께서(마5:9) 많은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이 말씀을 북한에 대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둘로 하나를 만드신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신다, 이 말씀을
우리는 북한에 대해 먼저 적용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전도특공대 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훈련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실습이 따릅니다.
이론을 배우고 실습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 날 훈련을 끝냅니다. 실습 나갈 때는 기대에 찬  얼굴로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기쁜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실습하셨어요?’ 물어보면 주변에 있는 아파트 이름을 대기도 하고, 동천동 동사무소 농협 앞에 갔다온다고도 하고 여러 군데를 말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좋은 전도 실습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알프스 등반을 계획하는 분들은 겨울철 설악산에 가서 빙벽 오르는 훈련을 합니다.
설악산은 알프스 등반을 위한 아주 좋은 실습장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는 신학교 졸업생들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강화도에 감리교회들이 많아서 그때 강화도에 가서 목회 초년병 생활을 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중견목회자들의 약력을 보면 첫 목회를 강화에서 한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강화도가 좋은 목회 실습장, 또는 실천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적용하는데 가장 좋은 대상이 있습니다. 북한입니다.
우리와 북한 사이에는 휴전선이라는 중간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불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도 있습니다.

오늘은 모든 감리교회가 북한선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북한선교주일은 화평이신 예수님, 둘로 하나를 만드시는 예수님,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남과 북 사이에 있는 이 담이 허물어지기를 기원하면서 우리가 그 일의 조력자가 될 것을 주님께 다시 약속하는 주일이 되어야합니다.

감리교회는 매년 광복절을 앞둔 주일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통일은 제2의 광복이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서 북한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 위에서 광복절을 앞둔 주간을 북한선교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일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 ‘막힌 담을 허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올해 북한선교주일의 주제입니다.

감리교가 다음 주간 금요일에 광주에 가서 호남선교대회를 하는데 북한의 함경도 함흥이나 청진 같은 곳에 가서 북한선교대회를 할 수 있는 날도 속히 와야 하겠습니다.
“‘왜 평양에 가서 북한선교대회를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와야 하겠습니다.’ 하지 않고 다른  데를  말씀하십니까?’ 질문하실 분들이 계시겠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선교가 가능해지면 거의 모두 평양으로 몰려가려고 할 것입니다.
평양이 북한선교 팀들로 만원을 이룰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더구나 해방 이전에 함경도는 장로교 선교구역이었기 때문에 원산 말고는 감리교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원산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강원도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도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함경도 쪽으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계획입니다.

북한선교주일이 가까우면 감리교의 북한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서부연회에서 ‘북한선교주일은 이렇게 지켜야 합니다.’ ‘북한선교주일에는 이렇게 설교하십시오.’ 하는 자료집을 만들어서 전국의 감리교회에서 보냅니다.
그 자료집 만드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데 재작년과 작년에는 이일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재작년 유월에는 서해교전,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꽃다운 젊은 장병 여러 명이 목숨을 잃고 다치는 일이 있어서 북한에 대한 감정이 매우 나빴습니다
작년에는 북한 핵 문제가 매우 심각해서 더욱 그랬습니다.
올해 제가 좀더 지혜로웠다면 자료집을 만드는데 아테네 올림픽에 남북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것을 잘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유월에 그 자료집을 만들 때는 그것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년에는 북한선교를 말하는데 도움이 되는 더 좋은 일들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 자료집에서 북한선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선교’라고 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  공감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북한이 많이 개방되었다고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인권상황, 헤아리기 어려운 부조리들, 고위층의 방탕한 생활, 주민을 너무 굶주리게 만드는 일등은 우리를 화가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북한선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 선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선교입니다.

북한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고 신학교가 있고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가정예배처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순수한 것인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매우 모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북한 선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 선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선교입니다.
북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매우 심합니다.
오늘 오후도 서울도심에서 진보진영의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와 보수진영의 나라 지키기 집회가 따로 열립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차이는 심합니다. 교회가 더 심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북한선교는 힘을 모아야 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 선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선교입니다.

북한선교를 하려면 손해 볼 각오를 해야합니다.
많은 비용이 들어가야 하고 갈등도 겪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북한선교는 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 선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먼저 실천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화평을 누릴 자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화평을 누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자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세로 북한선교에 임해야 합니다.

북한은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나라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멀리 있는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북한과의 사이에서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읽어 드린 13절에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장의 요절이라고 한 14절에는 “자기 육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자기 육체로 허셨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을 수직적으로 연결하고, 우리와 이웃을 수평적으로 연결합니다.
 
예수님은 손쉽게 화평을 이루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것도 손해 보지 않고 갈라져있는 둘을 하나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여러 가지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피를 흘려 화평을 이루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까짓 것쯤!’ 하시기 바랍니다.

이웃과 화평을 이루려면 여러 가지 손해를 보아야합니다.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고 바보 취급을 상할 때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
15절에서는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화평을 성취하셨습니다.
17절에서는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평안이라는 말, 화평이라는 말, 원어로는 다 같습니다.

화평은 행동입니다.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에 있는 막힌 담을 허무심으로 화평을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이제 11절을 보세요.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러분, ‘나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막혀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웃과 화평을 이루고 있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웃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주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북한선교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이웃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그것의 가장 구체적인 실천으로 북한선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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