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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녹의 믿음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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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흥준 목사 (전주광성교회)

이철환씨의 <연탄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신부 아버지가 신부와 같이 입장을 하는데 신부는 다리를 절면서 걸어들어 옵니다. 신부가 신랑 앞에 거의 왔을 무렵에 갑자기 신부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객들은 당황하고 신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객들의 눈으로 믿기 어려운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감동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랑이 달려나오더니 아버지 대신 신부의 손을 힘차게 잡아 일으키고 팔짱을 키고 늠름하게 신부와 같이 걸어서 주례자 앞에 서게 한 것입니다. 그러던 신랑은 자신의 한쪽 발을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드려밀고 신부의 짧은 발을 자기 발등 위에 올려놓고 바치고 서 있는 모습이 하객들의 시선에 잡혔습니다. 안간힘을 다하면서 신랑은 만면에 건강한 미소를 머금고 신부의 발을 꽉 바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객들은 그 날 진정한 결혼이 무엇인가 결혼의 그림을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은 동행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같이 걷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도 동행입니다. 절뚝발이 인생으로 살던 우리가 어느 날 인생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평생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여행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여행을 믿음 때문에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에녹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1. 첫째로 에녹의 믿음은 인정받는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증거>라는 단어는 그것은 영어로 굳 리포트(good report)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인생을 살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는 믿음이 되었다 되었단 말입니다.

동양권의 전통유교윤리는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냐? 그는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효자 효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에서는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여전히 소중한 가치로 받아드리지만, 기독교 윤리는 부모를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 소개한 그런 다리를 절고 있었던 신부의 남편은 행복한 남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자기를 믿고 따라줄 수 있는 한 여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믿고, 나를 따라주는 신부의 존재가 신랑의 기쁨이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6절에 보시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단순히 두 가지만 강조했습니다.

①하나님이 계신 것, 그것 믿고 그 ②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찾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이 나에게 상급 주신다. 단순한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라고 오늘 본문은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좀 부족하여도 그냥 주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 따라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는 인정을 받았다 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타난 기사를 보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동행하는 믿음> 우리가 창세기 5:22절에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300년을 계속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

저는 누가 저에게 목사님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같이 걷는 삶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만났습니다. 전에는 내가 주인으로 알고 살다가 <아 아니로구나 하나님이 내 주인이로구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내가 만났다면 이제 주인 되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한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에녹의 인생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든 이유 적어도 두 가지를 추정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

1)첫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그러니까 두 사람이 뜻이 맞아야 동행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가정의 파경을 많이 목격하는 그런 불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이 파경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이 있을 수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근본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이유는 <뜻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뜻이 완전하게 맞는 그런 부부는 한 분도 없습니다. 어떤 부부도 자연인 그대로 두 사람의 뜻이 자동적으로 일치하는 경우란 저는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사랑하면 뜻을 따라주는 것이지요. 뜻을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배우자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상대방의 뜻을 따라준다 면은 대부분의 경우 결혼의 파경을 막아주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피차에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런 동기를 가지고 살면 건강한 부부관계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에녹의 경우를 보면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어려울 이유가 없지 않아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에녹이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정말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의 가장 주요한 동기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갈 준비만 되어 있다면 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이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분은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또 태초에도, 아니 영원 전부터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도 순간 순간마다 아버지와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밀이 뭐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행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인간성을 입고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도 고난과 시련 앞에서 평안을 원했을 것이고, 그래서 아버지 뜻과 일시적 충돌을 경험하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우리가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시면서 유명한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자기의 뜻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드릴 수가 있었던 예수님.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줄 곳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의 비밀이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이었으며, 이것이 또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가는 비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내 뜻을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내가 주의 뜻을 따르겠다 라는 각오만 되어있다면 저와 여러분의 생애 속에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멋진 삶이 펼쳐질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5:22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씀합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뉴우베리(Newberry)라고 하는 성경학자는 므두셀라의 본래의 뜻은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고대 부족 국가에서 싸울 때 제일 앞장서는 사람이 창을 제일 잘 던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오는 사람, 창을 잘 던지는 저 사람만 거꾸러뜨리면 저 부족은 끝장이 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의 이름에는 보편적으로 이런 뜻이 붙어 다녔다고 합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끝이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세상은 끝이 온다>.

에녹은 그때부터 아들, 므두셀라 부를 때마다 에녹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했습니다> 그 리고 그 심판의 자리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왜 인생을 개판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토해놓은 모든 말, 내가 취한 낱낱의 행동들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반드시 심판된다> 이 심판의 사실을 우리가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요?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죄의 심판, 멸망의 심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그 심판은 대망의 심판, 혹은 보상심판, 상급심판이라고 말하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랬습니다(고후 5:10).
우리의 살아왔던 결산의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적당히 살수가 있습니까? <오늘밤에 내 일생이 끝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내가 살아온 삶을 내가 결산해야 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좀 진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들어갔다고 성경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7:11절에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태어났을 때에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였는데,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는 므두셀라가 969세입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는 므두셀라가 969세에 죽던 해였습니다. 그 때 하늘의 창들이 열려 홍수심판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므두셀라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의 출생을 통하여 심판이라는 진지한 메시지를 받아 드리자 마자 그의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주께서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인도하는 삶보다 더 복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첫머리에 연탄 길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 다리를 절고 있었던 신부의 결혼식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 신부의 친구 한 분이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는 너무나 가슴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후에 자기의 친구 신랑 신부의 신혼 살림을 찾아갔다가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신혼 앨범 사진첩을 보다가 거기에서 신랑이 신부에게 쓴 편지하나가 뚝 떨어졌어요. 신랑이 다리 저는 신부 자기 아내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우리 인생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인생이 모두가 다 절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절름발이, 인생의 짐을 지고 너무너무 힘들어서 인생 길에서 쓰러짐에 경험을 한 모든 사람들은 절름발이의 상처와 경험을 가진 인생입니다. 내가 인생 길을 걷다가 쓰러졌을 때에 아무도 나를 일으킬 세워줄 생각을 아니했을 때에 그러나 내가 쓰러지는 그 자리에 내게 다가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와 상처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그분, 그리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시사 살아 계신 주님! 살아있는 목자가 되겠다고 말씀하시던 그분이 달려와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사건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자 걷기가 얼마나 힘들었니, 나는 네 고난과 상처와 눈물의 의미를 알아, 인생은 혼자 살기에는 너무 힘들고 나무 벅차고 너무나 어려운 길이기에 함께 가야해, 내 손을 꼭 잡아라. 그리고 우리는 이제부터 함께 동행하는 거야, 저 하늘나라 도착할 때까지 내 손을 잡고 나를 따라야해,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고 그대의 곁에 서있는 나의 임재를 확인하면서 나와 더불어 걸어야해>

때로 그분을 잡고 걸어가면서도 넘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분은 또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그랬어, 내 손 꼭 잡으라고, 다시 일어나라고>, 그 때 마다 내 손을 잡고 인생의 길을 함께 동행하시는 바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 마침내 어느 날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여행에 이 아름다운 결실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에녹이 보여준 동일한 믿음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을 향한 가장 중요한 뜻으로 받아드리고 그의 곁에 바짝 서서 그를 붙들고 걸어갈 수만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에녹의 동행은 바로 우리의 삶의 동행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 그분의 손을 잡고 주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의 나라를 향해 다시 서서 걸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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