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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냐민의 낳은 자 (대상 8: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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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막내’하면 우리 모두가 다 퍼뜩 떠올릴 수 있는 인상이 있습니다. 주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면서 자라고 그래서 응석받이 내지는 버릇없는 아이가 되기 쉽다는 것이라든지, 똑똑하면서도 별난 데가 있어서 잘 되면 크게 되고 못 되면 또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다든지, 개성이 강하고 천재적인 자질이 숨어 있는 것 -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막내를 생각할 때 주로 연상되는 것들입니다. 그저 만사가 무난하고 평범한 스타일이 되기 쉬운 장남에 비해서, 막내는 아무래도 자유롭게 극단을 왔다 갔다 하는 위험과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 또한 내포되어 있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할만 하겠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제일 막내는 바로 베냐민이었습니다. 위로 배다른 형들까지 포함해서 열한 명의 형이 있는 중에 제일 막내로 태어났으니 그 역시 평범한 보통형의 스타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내용을 보아도 역시 그런 톡톡 튀는 개성이 베냐민에게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 베냐민 지파의 역사를 보아도 또한 양극단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역사로 채워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야곱도 그의 마지막 임종의 침상에서 그를 가리켜 예언하기를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지파가 좋게 말하면 용맹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호전적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와 같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런 막내둥이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사용하셨는지를 증거해 주는 아주 특별한 역사입니다. 평생 꼴찌로 살 수밖에 없어 보였던 그 베냐민 지파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막내의 자리를 벗어나서, 결국에는 유다 지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스라엘의 선두 주자가 되었습니까? 오늘날에도 철없는 막내둥이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선두 대열에 가담하게 되는 신자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1. 자기중심의 인생을 하나님의 구속사 중심의 인생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만년 꼴찌 인생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본문 역대상 8장 1절의 「베냐민의 낳은 자는」이라는 서두로부터 16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은 베냐민 지파가 자기 나름대로 세력을 확장하며 번성해간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록되어 있는 족보는 성경의 족보들이 대부분 다 그렇듯이 꼭 직계 자손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몇 대를 건너 뛴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족보를 가지고 그 베냐민 지파 자손의 정확한 가계와 연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통하여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이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막내의 강한 개성과 끈질긴 생존력을 발휘하여 자기 생활 터전들을 꾸준하게 개척하고 확장해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6절에 보면 「에훗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저희는 게바 거민의 족장으로서 사로잡아 마나핫으로 가되」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개역 성경에는 「저희」들이 누구를 사로잡았는지 알 수 없도록 애매하게 번역되어 있는데, 좀더 정확하게 다시 번역하자면 ‘저희는 게바에 살았던 가문의 족장들로서 게바 주민을 마나핫으로 사로잡아 가되’라고 해야 합니다.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모압을 물리치고 80년 간 태평시대를 이끌었던 자인데, 이 본문에는 그 아들들이 게바란 지역의 주민을 강제 이주시켜서 마나핫이란 곳으로 데려 갔다는 것과, 거기서 계속 자손을 두고 번성했다는 사실을 이하 7절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확한 연대와 배경은 알기 어렵지만 하여튼 베냐민 자손의 적극적이고도 호전적인 기질이 엿보이는 한 장면입니다.

그 다음 8절에 보면 「사하라임은 두 아내 후심과 바아라를 내어보낸 후에 모압 땅에서 자녀를 낳았으니」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사하라임이란 자는 이혼을 두 번이나 했고 또한 이방 땅 모압에서 이민 생활하며 살았던, 아주 자유분방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과 10절에 보면 그는 세 번째 결혼 이후에도 자녀들을 많이 두고 그 아들들은 다 족장들이 되는 등, 그런 복잡한 가정 속에서도 육신적으로는 꽤 번창한 집안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는 그 사하라임이 이혼했던 첫 번째 아내 후심의 자녀들 역시 마을들을 세우는 등 사회적으로는 왕성하게 활동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3절에 보면 「또 브리아와 세마니 저희는 아얄론 거민의 족장이 되어 가드 거민을 쫓아내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하 16절까지 그의 자손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베냐민의 두 자손 역시 족장들로서 「가드 거민」 즉 강력한 블레셋 족속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하는 용맹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상의 몇 집안의 예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베냐민 족속은 여러 불안하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자기 생활을 개척해 나가고 자립하는 데에 있어서 남다른 끈기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형들에게 눌리면서 서럽게 자랐기 때문에 절로 갈고 닦게 된 독립심이 이 지파로 하여금 처절한 생존 경쟁의 환경 속에서도 자기 인생을 지키고 생활 터전을 보존해 나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가 정말 돋보이고 정상 궤도에 올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시작한 것은 결코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런 생활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지파가 본격적인 축복을 받기 시작한 것은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유다 민족이 해방을 받고 고국에 돌아올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다 민족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새로운 해방 조국을 건설해 나갈 때,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베냐민 지파가 가장 적극적으로 그 유다 지파를 도왔던 것입니다.
본문 17절 이하 32절의 말씀은 해방 이후 베냐민 지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하여 살게 된 사실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7절에서 27절까지에 여러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고 그 문단의 제일 끝에 해당되는 28절에 보면 「이는 다 족장이요 대대로 두목이라 예루살렘에 거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베냐민 지파는 포로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도 예루살렘 지역에 살고는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때가 아니라 포로 후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즉 이 17절 이하 27절에 기록된 것은 모두가 다 해방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거기 정착한 베냐민 지파의 족장들과 두목들의 이름들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29절 이하 32절의 말씀에도 보면 기브온 자손을 언급하면서 제일 끝에 「이 무리가 그 형제로 더불어 서로 대하여 예루살렘에 거하였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기브온은 원래 가나안 족속이었는데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에 이스라엘과 약조를 맺어서 살아남게 되었던 족속입니다. 그들이 모여 살던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외곽 지역으로서 사울 왕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즉 이 기브온 족속은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으로 귀화해서 베냐민 지파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 유다인들이 포로 해방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이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포로 해방 후에 이 베냐민 지파가 유다 지파와 함께 동조하여 그 조국 건설에 참여한 주력 지파가 된 것은 베냐민 지파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개성이, 그들의 능력이, 그들의 용맹이 그저 자기 자신의 생활을 지키고 확장하는 데에만 쓰였습니다. 하지만 포로 시대 이후 이들은 메시아 왕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이 큰 역사에 그들의 몸을 던져 동참함으로써, 그들의 개성과 능력과 용맹은 이제 더욱 값진 일에 쓰이게 되었으며 실제로 유다 재건에 크게 기여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막내에 지나지 않았던 베냐민 지파였지만 이처럼 다윗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메시아 왕국에 대한 충성에 자기네들의 생활의 초점과 목표를 맞추게 되자, 일약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구심 세력으로 쓰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자신의 생활에만 모든 인생의 목적을 부여하고 거기에만 정성을 쏟아 놓고 산다면, 어떻게 되든지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고 자기 가족 하나 먹여 살리는 것은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가 끝없는 내리막길을 치닫고 가계부는 연일 적자이기는 하지만 악착같이 붙잡고 살면 산 사람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생이 어렵고 복잡하다고는 하지만 이를 악물고 발버둥치면 자기 한 몸 정도야 어떻게든지 살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정도로 겨우 살아가는 것이 자기 인생의 전부가 된다면 정말 비참한 꼴찌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토록 자기 한 사람만 아는 철없는 막내둥이 같은 인생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높고 넓은 시야, 보다 성숙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중심 생활이라는 이 ‘우물 안의 개구리 ’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인생 목표를 설정하고서 이 차원 높은 역사의 중심부에 뛰어 드는 ‘큰 물에서 노는’ 삶을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싸우고 빼앗고 쫓고 쫓기는 이 다람쥐의 쳇바퀴를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의 현장으로, 교회로, 그 구속 역사의 사명 구심점 속으로 우리의 삶이 이주되어질 때, 우리 인생의 진짜 전성기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혼자 먹고 살겠다고 아웅다웅하는 자기중심의 인생을 벗어나 하나님의 이 크신 구속사의 현장에서 생의 목표를 높이 설정하고 크게 쓰임으로써, 만년 꼴찌 인생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원래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가 후에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살게 되는 것이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인생 전환입니다.

본문 역대상 8장 33절 이하 끝절까지에 기록된 내용은, 시기로 따지면 오히려 32절 사건 훨씬 이전의 베냐민 세대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베냐민 지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던 사울 왕가의 족보를 기록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33절과 34절에서 「넬은 기스를 낳았고 기스는 사울을 낳았고 사울은 요나단과 말기수아와 아비나답과 에스바알을 낳았으며 / 요나단의 아들은 므립바알이라 므립바알이 미가를 낳았고」라고 시작하여 이하 40절까지 이어지면서 끝으로 「베냐민의 자손들은 이러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왕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삼상 9:21)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울은 자기가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라 현실이 그러했습니다. 사사 시대 때 베냐민 지파는 크나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이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던 기브아 사람들이 한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여 죽게 만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 모두가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들고 일어났는데,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기브아 사람들을 옹호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형제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을 대항해서 전쟁을 걸고 나왔던 것입니다.

자기네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존심이라든지 다른 열한 지파를 상대로 혼자서 싸움을 거는 맹랑한 자신감 - 이것 역시 베냐민 지파의 막내 기질을 여실히 보여 준 한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싸움에 능했던 베냐민 지파는 그 전쟁의 초전에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에는 다른 모든 지파의 연합군의 세력에 밀려 거의 전 지파가 멸종될 정도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이 베냐민 지파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그런 까닭에 사울은 자기를 가리켜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사람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베냐민 지파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지파들 중에서 가장 고집 세고 말썽 많고 문제거리였던 지파, 전 민족을 상대로 싸움을 걸고 그래서 스스로 망하고 이제는 명맥만 겨우 남게 되었던 그 지파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첫 왕이 나오게 하셨으니 사울뿐 아니라 모두에게 있어서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울 왕의 끝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런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에는 스스로 겸손하여 좋은 출발을 했지만, 나중에는 교만하고 하나님을 떠난 왕이 되고 만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 사건은 원래 저주 아래 있다가 은혜를 입게 된 지파가 또 한 번 저주 아래 영원히 떨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사울 한 사람 때문에 거기서 끝나게 되지는 않고, 실로 자상하고도 섬세하게 이어지게 됩니다. 33절과 34절에 보면 그 사울의 집안이 요나단과 므립바알을 통하여 계속 대가 이어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들은 요나단을 위시하여 모두가 일찍 죽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사울의 집안사람 중에 살아남은 자를 찾았을 때 오직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만 살아 있었습니다. 그 므비보셋이 본문에는 「므립바알」이란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절뚝발이 불구자 므비보셋은 다윗이 자기를 찾아서 오히려 선대해 주고 사울의 모든 재산을 자기에게 물려주었을 때 그 다윗 왕에게 말하기를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 9:8) 하고 감격하며 엎드렸습니다.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사울왕가에 속한 사람이었으니 그야말로 세상 다른 나라에서라면 삼족을 이 잡듯이 찾아서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원수 집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혈족을 오히려 왕과 같은 신분으로 격상시켜 주었으니, 므비보셋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은혜’ 그 자체였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죽은 개’와 같은 미천하고 약한 존재였던 그 므비보셋을 통하여 그 사울의 자손이 이어지도록 하시는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짓을 자청한 베냐민 지파였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크게 실패했던 사울의 집안이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시고 자상하신 돌보심 덕택에 그 지파와 그 집안은 대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포로 후기에는 아까 앞에서 보았던 대로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 재건에 유다 지파와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원래 꼴찌였고 그것을 더욱 악화시키는 죄악을 저질렀던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베냐민 지파의 명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어져 갔으며, 바로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보존해 주었기 때문에 그 베냐민 지파는 결국 이스라엘 왕국 재건 대열에 제일 앞에 나서서 쓰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 교회의 앞날도, 오직 이 하나님의 한량없이 크신 은혜 아래 있게 될 때만이 참된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개인은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실패를 반복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은 확실히 얻었지만 그 이후에도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덟 번 일으켜 주어도 아홉 번 또 넘어지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해 나가는 일 역시 부분적인 시행착오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선한 일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딴에는 옳은 일 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자신감이나 교만에 가려지고 하나님 앞에서나 지상의 다른 교회들 앞에서 죄가 될 때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로 감사한 것은 우리 인생의 앞날이, 우리 교회의 미래가 그런 현재의 실패 때문에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시행착오는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미래는, 비록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미래는 그처럼 취약한 우리 인생보다는 훨씬 더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이미 요지부동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은혜라는 것을 또 한 번 기대할 수도 요청할 수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이 얼마나 고맙고도 소망스러운 것입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사죄의 은혜는 우리가 저지르는 그 어떤 죄악도 한 순간에 소멸시켜 버리고 맙니다. 한 번 부르신 자를 끝까지 견인해 주셔서 결국 완전 성화의 자리에까지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우리가 저지르는 그 어떤 시행착오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것입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우리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이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은혜를 의지하고 체험함으로써, 절대로 다시는 재역전될 수 없는 이 택자의 복스러운 반열에서 앞장서서 섬기며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역대상 7장에 이 베냐민 지파의 족보가 한번 간략하게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8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시 한번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지파에는 어떤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지파, 그 말썽 많고 문제 많고 고집 세고 교만하고 자신만만하던 막내둥이 지파가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는 특별히 돋보이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자생력만을 믿고 자랑하며 자기 인생에만 집착해서 살던 베냐민 지파가 이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 지파는 막내의 자리를 벗어나 어른이 되었습니다. 시행착오와 실패를 반복하고 형제 지파들로부터 ‘미운 오리 새끼’와 같았던 베냐민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부어 주셨을 때, 그 지파는 겨우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재건 역사에 요긴하게 쓰이는 선두 주자 대열에까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인생만 알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면 만년 꼴찌 인생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고 자기라는 우물 속에서 제 잘난 줄만 알고 살면 그 인생은 실상 자기 엉덩이를 저주의 자리에 평생 붙여 놓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기만을 위해 사는 대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삶에 투신함으로써, 가장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며 가장 나중 된 자가 오히려 먼저 되는 은총의 반열에 나란히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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