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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내 것이라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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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아프리카 땅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반도 남쪽 끝에 봉우리 같은 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폭풍의 벼랑, 절망의 벼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최남단을 넘어 동쪽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포루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라는 사람이
여기에 도전하여 마침내 그는 동쪽으로 달려가서
맑고 깨끗한 인도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곳은 죽음의 벼랑이 아니라
포르투칼 왕 주앙 3세가 희망봉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불렀습니다.
우리 일생에도
폭풍과 절망의 벼랑 같은 많은 역경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과 부딪히기도 전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면
포기의 곳이 희망의 출발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43장은 장차 바벨론 포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구속과 회복을 선포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도 삶을 살다보면 환경에 의해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나옵니다.
그러나 믿음 없으면 우리 신자까지도 365일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신자와 달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현재 내가 절망의 벼랑에 서 있더라도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뜨여져
그 자리가 희망의 봉우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떠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갖가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과 자기 숙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암에 걸린 것은 아닐까? <2>
우리 주변에 암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험 중에 생명 보험이 으뜸이요
생명 보험 중에는 암 보험이 으뜸이라고 합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하면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까봐,
직장을 잃어버릴까봐, 명예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는 심리적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특별한 현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밀폐공포증, 광장공포증 고공공포증, 세균공포증, 등입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두려움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쌓이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건강마저 해치게 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쥐 1백 마리를 철책 속에 가두어 놓은 후
그 주위에 무서운 고양이 한 마리를 묶어 놓고 쥐들을 위협하게 만들었습니다. 1백일 후에 쥐를 꺼내어 해부해 본 결과
대부분의 쥐가 심장병,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쥐들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주더라도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어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만병의 원인이 됩니다.
아라비아 우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라비아 사람이 바그다드로 가다가 전염병을 만났습니다.
[ 전염병아, 너는 어디를 가는 중이냐? ] 아라비아인이 물었습니다.
[ 나는 바그다드로 가는데 거기서 5000명을 죽일 것이다 ]
얼마 있지 않아 바그다드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돌았고,
그로 인해 오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 후 아라비아인은 다시 그 전염병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 야! 너는 지난번에 오 천명을 죽이러 간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오만 명을 죽였느냐? ]
그러자 전염병이 대답합니다.
[ 그렇지 않아, 나는 5,000명만 죽였을 뿐이야.
나머지는 나에 대한 공포로 죽은 것이야 ] 하더랍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두려움에 싸여 살아갑니까?
바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3>
1절에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창조자에 대해서 묵상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분의 능력입니다.
창조과학회 한 과학자가
[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우주 만물을 돌아볼 것도 없고
생명체가 바로 하나님의창조의 능력의 표본이다 ] 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체가 왜 창조의 증거가 되는가?
생명체는 생명체가 아닌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늘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보면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매끄러운 바늘이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여기저기 흠집이 있고 표면이 거칠며 정교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아주 작은 곤충을 확대하여 보면.
모기 한 마리를 현미경으로 보면 날개의 결과 발바닥, 뾰족한 침까지 너무나 정교하고 섬세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과는 그 정교함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늘끝을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날카롭다고 생각했던 바늘끝이 사실은 거칠고 뭉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본 바늘끝에 좁쌀 같은 것들이 붙어 있는데
그것이 대장균입니다.
이 대장균들은 펑퍼짐한 바늘끝에 올라가서
체육대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다고 합니다.
대장균이 바늘끝에서 운동회를 할 수 있도록 만드신 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너를 조성하였다고 하십니다.
이 대장균 한 마리도 다시 확대하고 확대하면
이 미세한 대장균 안에서도 설계도를 찾을 수 있는데
그런데 이 대장균 한 마리에 기록된 설계도의 메시지를
기호로 옮겨 다 기록하면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미세한 대장균도 그러할진대 인간은 어떻겠는가?

최근 과학기술 발달로 개발된 컴퓨터 칩 1개에는
640권 분량의 메시지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컴퓨터 칩의 몇 만 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의 인체의 적혈구 1개에 1,000권 분량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 생명체를 만드신 분은 또한 디자인의 천재이시다 ]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명체들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을 못 볼만큼 많이 고장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 분은 누구인가? <4>
그 역시 우리를 설계하신 설계자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놀라웁도록 회복되어질 줄 믿습니다.

특히 성도는 세상 살면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창조주시오 나의 조성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밀하게 생명체를 만드신 이유는
다 적자생존 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도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2)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 종수 박사는 "너는 내 것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어떻게 함께 해주셨는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할뿐더러 배경도 없었습니다. 여러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서울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가서 암전문의가 되기까지 어떻게 섬세하게 돌보셨는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섬세하게 돌보셨습니까?
원 종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 종수 박사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같은 물건이라도 주인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KBS 2TV 진품명품에 보면 누구의 소유냐에 따라서 값이 매겨집니다.
세종대왕의 벼루, 이순신 장군의 칼,
김홍도의 그림, 김정희의 글씨 같은 것은 값이 고가입니다.
외국에서도 피카소의 그림이나 링컨의 만년필, 에디슨의 시계, 같은 물건은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위인과 명사들의 소지품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어떤 물건이 국보 취급을 받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소유인 크리스찬들은 얼마나 고귀한 존재들입니까?
그래서 4절에
[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 ]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 말씀하십니다. <5>
지명이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택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시135:4절에 [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였음이로다 ]
지명하여 불러 너는 내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아셨다는 말입니다.
특별한 소유란 이 단어는 히브리어 <세귤라> 라고 하는 말로써,
장군이 전쟁터에서 얻은 전리품 가운데 자신의 몫으로
따로 떼어놓은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귤라>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방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특별한 선민으로 삼아 주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딛2:14절에 친백성이란 말로 나오는데
이 말의 헬라어는 <페리 우시우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페리'라는 말과
'우시우스'라는 두 단어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페리'는 영어로 'round', 즉 '둘러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우시우스'라는 말은 '나는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친백성'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과 은혜와 사랑 가운데 둘러싸여 살고 있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관심과 돌보심과 사랑 가운데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지명하여 부른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의 축복과 함께 보호와 존귀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물 속으로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불이 너를 피해가리라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는 데도 불구하고 <6>
물을 지날 때가 있고 불 가운데 행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강을 건너는 어려움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열심히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는데도
불구하고 불 가운데로 지나는 고통의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지고 있습니까?
임마누엘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하나님이 함께하면 물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 길에 풍랑이 일고,
불꽃이 나를 삼킬 것 같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나를 지명하여 불러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면 능히 이겨 나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하십니다.
이 불경기 가운데도 함께하십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당당히 살아가시는
내일의 하나님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이 침몰치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확인이 되어졌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세 청년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산성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머리터럭 하나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끔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경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A. W. 토저 는 이렇게 말했다.
[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단지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 …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거나 불행이 그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행이란 것도 사실은 겉보기에 불행으로 보일 뿐 실상은 불행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스런 참뜻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불행이라 여기는 것이다. ]
그렇습니다.
우리의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이 은혜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깨닫고 보면 <7>
우리는 한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가장 귀한 은혜가 3절과 4절에 나옵니다.
3절 [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절 [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죽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는
그들을 위하여 어떤 값을 치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애굽의 장자를 다 죽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좇아온 애굽 군대를 바다에 몰아넣어 몰사시켜 죽여버렸습니다.
구스와 스바는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10장에 나오는데 함의 자손으로 같은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스와 스바는 홍해가 갈라질 때 죽은 군대는 애굽 군대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애굽 군대,
그 군대 속에는 구스도 있고, 스바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구스와 스바를 홍해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면
구스와 스바로 네 생명을 대신하였겠느냐?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보다 더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롬8:32절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뇨? ]
하나님은 구스와 스바뿐만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은혜 중에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이 회복되어 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어느 목사님이 기차 여행을 하는 중에 <8>
굉장히 불안해하는 청년과 옆자리에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 청년 삶이 왜 그렇게 불안한가? ] 하니
[ 살아가는게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 불안하다 ] 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목사님이 볼펜을 들고는
[ 청년 지금 이 볼펜을 책 위에 바로 세울 수 있는가? ]
[ 아니 달리는 기차 안에서 어떻게 볼펜을 세울 수 있습니까? ]
그러니 목사님이 싱긋이 웃으면서 손으로 볼펜을 잡고는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청년이 하는 말이 [ 손으로 붙잡으니 볼펜이 설 수 있는 거지요 ]
[ 그래요 우리 인생도 누군가가 붙잡아 주면 바로 설 수 있어요
그 손이 누구의 손인가 하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손이지요 ]
그렇습니다.
사람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소속감의 결핍에서 온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엔가는 소속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고 지켜주고 인도해 주셔야 만이
우리 인생이 잘 나갈 수가 있는 데,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우리를 책임져줄 보호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원수마귀 사단에게 노출되어서
사단의 장난과 속임수에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 5,6절에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라 ] 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동서남북에서 내 아들과 딸들을 불러모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었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이 듣기워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워지기를 바랍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가서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삶이 회복되어지는데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듣기워진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마음이요 회복의 징조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43절 이하에 주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9>
[ 더러운 귀신이 사람들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들어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물 없는 곳은 성령이 없는 곳, 은혜가 없는 장소를 말합니다.
성령과 은혜는 항상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에 말씀이 없으면
귀신이 우리의 마음에 더 심한 장난을 친다는 것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내 마음에 항상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려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범브랜트(Richard Wurmbrand)목사는
그가 옥중에 있을 때에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 보았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1년 365일 매일 한번씩에 해당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이
날마다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의 말씀에 눈이 뜨여지면
우리의 영성이 밝아집니다.
우리의 영성이 밝아지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7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
이 말을 의역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켜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된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명하여 부르신 일에는 어떤 목적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10>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 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라 내 것만을 챙기기에 급급했고, 내 정욕대로만 살아왔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돌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난 일들을 기억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면 놀라운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다가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던 중
신학교 교수 목사님이 지나가면서 저를 보고 하는 말이
[ 김 전도사 하나님이 병 낫게 해 주시면 부자 만들어 준데이 ]
그때 저는 그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는 고사하고 병만 낫게 해주지 이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프리미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돌이킬 때 우리의 어려운 형편만 회복시켜 주실 뿐만이 아니라 복으로 산울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축복이 어느 정도인지 보세요

19절에 광야에 길이 날 정도로 축복을 주시고.
사막에 물이나 강이 되는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막막한 인생길에 길을 내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물이 없으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지만 물이 흐르면 옥토로 변합니다.
절망의 벼랑이 얼마든지 희망봉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과거의 실패는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축복하십니다.
현실에 축복을 주심으로
과거의 고통은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강원도 만한 크기의 땅에 5백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땅이 척박하여 농사짓기에는 아주 부적합한 땅입니다.
그러나 그런 땅에 농업을 발전시켜 농축산 물을 자급자족하고도
매년 30-40억불치 농수산물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한국은 <11 >
이스라엘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좋은 조건의 땅이면서도
매년 백억불 넘게 농산물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수십억 불어치의 농산물을 수출하고
우리는 훨씬 더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백억 불이 넘는 농산물을 수입하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한 외교관이
그네들의 농업이 그렇게 발전한 이유를
[ 이스라엘은 토라 농법을 사용하였기 때문 ] 이라고 했습니다.
<토라>란 말은 "말씀"이란 히브리어입니다.
토라 농법이란 말씀 농법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사야서 43장 18절에서 21절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말씀 농법의 중심이라 했습니다.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나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
이 말씀을 이스라엘 사람들을 농업에 적용하였다는 것입니다.
<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 는 말씀을 그들이 적용하기를
" 사막에서는 농사가 안 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려라"고 받아들였고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는 말씀을
" 광야에 농로를 닦고 사막에 수로(水路)를 열리라 "는 말씀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0Km 밖에서 수로를 닦아 물을 끌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사방에 농로를 닦아 트랙터가 자유롭게 다니도록 만들었습니다.
과학자들과 정부관리와 농민이 합심하여
척박한 땅에서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 나갔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방식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삶
이것이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축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창조주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나의 특별한 소유 친백성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도 자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고 축복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회복되어지고 축복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지기를 바랍니다.
200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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