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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닫히는 문 (겔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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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예용범 목사 (여의도제일교회)

윌리엄 바클레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성경 주석가입니다.
그가 목회 초년시절 어느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인을 심방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고통을 말하면서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클레이는 이 말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 청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여인에게 또 묻는 다는 것은 부담을 주는 것 같고 오직 용기를 준다는 마음으로
「아~~! 그러세요! 좋은 생각이네요
나도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여」 하는 말로 조언을 주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여인은 자살 포기는 물론 건강까지 되찾았습니다.

바클레이의 닫힌 귀가 한 여인을 살려낸 것입니다.

1) 우리 삶

우리네의 삶을 보면 모든 것이 닫혔다고 생각될 때가 참 많습니다.

이때 하늘은 무너지는 것 같고,
앞은 캄캄하게 보이는 등
낙심과 좌절이 엄습해와 당황되고 더러는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① 사도바울의 경우를 봅시다.
그에게도 문 닫혀진 때가 많았습니다.

  고후 11:23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에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뿐만 아니라 사단의 사자라고 할만한 중한 병에 걸려서 이것이 떠나기 위해서 3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yes가 아닌 No의 대답이 오기도 했습니다.

② 구약의 요셉을 봅시다.
자신의 마음과 뜻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애굽에 팔려갔고 가옥에 내려갔습니다.
겹겹이 닫힌 문에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③ 아브라함은 어땠습니까?
사라의 태가 닫혀서 후손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성경의 위인들조차 우리와 시대와 지역만 다를 뿐 닫힌 문의 주인공인 것에는 다르지 않습니다.

2) 고백 유형

이러한 닫힌 문 앞에서 문 두드리는 유형을 보면 더욱 우리와 같음을 실감합니다.

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욥의 부인이 대표자입니다.

욥의 부인은 자식들 죽고 재산 도둑맞고 남편마저 병들자 그녀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남편에게 윽박질렀던 것입니다.

② 읍소형이 있습니다.
다윗이 종종 그랬습니다.
다윗에게는 유독 닫힌 문이 많았습니다.
그때 닫힌 문 앞에서 기도 했습니다.

  시 25:15-16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라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란에서 끌어내소서”

③ 따지는 형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④ 뜻대로 하소서,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마 26:42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입니까?
닫힌 문 앞에서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으며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평소 내 신앙만큼 내 믿음 따라 고백하는 모습을 갖습니다.

바라건대, 욥의 부인철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의 모습은 불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 더 크게 열리는 문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문을 닫을까요?

그 답이 있습니다.

  애 3:32-33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백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언젠가 누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었더니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의 본심?
궁금합니까?
정말 알기를 원하십니까?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잘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다가가서 왜 장난감을 뺏고 아이를 울립니까?

이와 유사합니다.
① 하나님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영광과 직결되고
그 하나님을 아는 인생에게는 영생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혹자는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 영광과 영생보다 더 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급하다고 해서 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급한 문제 때문에 귀한 생명을 잃는 인생을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② 더 큰 문을 열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바울의 생애와 신변에 닫혀진 문들이 2000년이 지나기까지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닫힌 문으로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그밖에
◦ 헬렌켈러의 3중 장애는,
미국 맹인장애재단을 설립하고 더 나아가 세계 맹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 시켰으며,

◦ 20세기의 영웅 루주벨트 대통령의 소아마비는,
그의 소원대로 소아마비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고,

◦ 16세에 맹인된 강영우 박사는
닫힌 눈, 닫힌 삶으로 인해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가 될 수 있었고,
그의 모든 식구들이 세계 인명사전에 오르는 명문가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닫힌 문을 보는 시각입니다.
닫힌 문은 열린 문만큼 이나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의해서 작용되는 은혜의 문입니다.

유감 되게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모르면 닫힌 문만 보다가 실의와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나
닫힌 문 저편의 하나님을 보면 삽니다.

이것이 똑 같은 닫힌 문 앞에서 살고 죽는 흥망의 관건입니다.

◦ 여러분은 닫힌 문의 창살을 보지 마십시오.
◦ 닫힌 문 밖의 하늘을 보고
◦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 문지기

감사한 것은
이 문을 주장하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곧 「아버지」이십니다.

  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

◦ 에덴의 동쪽 문을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고,
◦ 노아 방주의 문을 닫았고,
◦ 성막 문을 크게 만들도록 식양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은 물론, 교회, 기업, 개인의 모든 흥망의 문을 열고 닫으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5) 닫히는 문 앞에서

닫히는 문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을 내 듯에 맞추기 보다는 내가 하나님 뜻에 맞추고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① 재 위에 앉는 모습을 취해야 합니다.

이 모습은 스스로 겸비함을 취하는 모습입니다.
◦ 하나님의 관계와
◦ 자신의 신앙과 삶을 살피고 고치는 일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렇게 하므로 물고기의 입이 열어졌습니다.

②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는 악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훗날 내 죽음도 천국의 생활로 바꾸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와 내 때가 다를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 「기다림」필요합니다.

욥의 부인처럼 저주도 마고
하박국 선지자처럼 따지는 일도 말고
적어도 다윗처럼 간구하고
주님처럼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기다림 속에 있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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