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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붕을 뜯어라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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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문제해결의 네 가지 유형

여러분은 살아가다가 인생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사람들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유형을 연구하여 이 사람이 성공할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실패할 가능성이 큰 사람인지 분석하기도 합니다. 카네기 성공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데일 카네기가 1936년에 출판한 책 <카네기 인간관계론>은 성공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사람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유형에 네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 소개하는 네 가지 유형 중 여러분은 어디에 해당되는지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유형은 적극적 유형인데 언제나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가능한 한 최고의 기대를 가지고 일하며,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접근하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발시키고, 솔선수범하는 형입니다. 반드시 성공할 만한 유형이지요. 두 번째는 휴가 유형인데 이 사람은 늘 휴가 온 사람 같은 자세로 참가하면서, 기본적인 것마저도 대충 시늉만 내고 늘 오락적인 분위기만 즐기는 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면서도 나도 알 건 다 안다는 식으로 억지 주장을 펴곤 합니다. 세 번째는 포로 유형입니다. 이 유형은 다른 사람의 권유나 윗사람의 지시에 의해 별 수 없이 일을 하는 유형으로써, 일에 하면서도 불평불만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관심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서 탈출하려는 것뿐입니다.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운 것은 물론 애초에 기대도 안 했기 때문에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테러리스트 유형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 유형은 자칭 만물박사로서 어지간한 분야는 웬만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누구에게 지시를 받을 필요도,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딴죽을 걸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이 유형은 발전이 없이 제자리에서만 맴돌게 됩니다. 이 중에 나는 어떤 유형일까요?

네 사람이 대면한 문제들

이렇게 세상이나 교회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보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적극적인 유형의 가장 좋은 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가서 치유 받게 한 네 사람입니다. 사실 이 네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는 보통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성경에는 이들이 친구라는 어떤 증거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3절에 나오는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는 내용을 근거로 이 네 명이 자기 의지로 중풍병자를 메고 온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사람들이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봅니다. 즉 이 네 사람의 신분은 종인데 그 주인이 바로 환자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중풍병 들린 친구를 위해 자기 종들에게 대신 메고 가도록 시켰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 이 중풍병자의 가족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네 사람이 어떤 관계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이 네 사람의 이름도 신분도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만 성경은 이들의 이름이나 신분이나 관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중풍병자를 메고 온 이 네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피하지도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정면 돌파하여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자세가 어떠했기에 예수님이 저희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기까지 하신 것일까요? 먼저 이들의 자세를 살펴보기 전에 이들이 맞닥뜨린 문제가 어떤 것들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제 1) ‘중풍병’

이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중풍병이었습니다. 전에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환자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 중풍병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중풍이란 뇌출혈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나 반신 또는 몸 전체가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는 말하는 것은 물론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 중풍병으로 거동조차 못 하고 식사는 물론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사람은 이 중풍병 환자를 상채로 메고 예수님께 가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치유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이들의 목표인데 문제는 이 꼼짝도 못하는 환자를 상채로 메고 어떻게 예수님한테까지 가서 치유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들이 대면한 첫 번째 문제입니다.

문제 2) ‘수많은 군중들’

그런데 이들이 애써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이 계신 가버나움의 한 집으로 갔더니 이미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수많은 군중 가운데는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사람,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러 온 사람, 병을 고쳐보려고 온 사람, 게다가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이 수상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러 온 사람 등 정말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좁은 집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더라.” 집안은 물론이고 집 바깥 문 앞에도 그야말로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네 사람을 가로막은 두 번째 문제였습니다.

물론 이 네 사람은 급한 마음에 그 군중들을 뚫고 들어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저희가 급한데 양보 좀 해 주십시오.’ 하고 양해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급하기는 다 마찬가지였지요. 우리가 급하니까 먼저 들어가게 해달라면 누가 양보하겠습니까? 모두가 급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순서를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군중들과 네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문제 3) ‘지붕’

이들이 직면한 세 번째 문제는 ‘지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네 명은 문 앞에 서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가능성을 찾습니다. 2차원적인 사고, 소극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전후좌우밖에 못 보기 때문에 ‘내 앞뒤좌우에 사람이 꽉 차서 꼼짝도 못하는구나, 기다리는 수밖에.’ 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지만, 3차원적인 사고, 적극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전후좌우가 막히면 위(하늘)를 봅니다. 위를 쳐다보니 지붕이 보입니다. ‘아, 지붕으로 가면 예수님께 접근할 수 있겠구나...’  팔레스틴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집 바깥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눈에 바로 지붕이 보인 것입니다. 이제 네 사람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에 분명히 또 다른 해결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입니다. 집 위에 올라가 보니 이제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지붕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 지붕이 바로 이들이 직면한 세 번째 문제입니다.

네 사람의 문제해결 방법

지금까지 이 네 사람이 대면한 세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꼼짝달싹 못하는 중풍병자를 상채로 메고 왔는데, 수많은 군중들이 앞을 가로막고 또 지붕 위로 올라가 보니 지붕이 막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네 사람은 이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방법 1) ‘믿음을 가져라 : 확신 있는 태도’

이들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께 가면 이 중풍병자가 반드시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라면 반드시 고치실 수 있다.’ 하는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이 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어떠한 시련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수단방법을 다 써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한 힘, 그 원동력은 바로 이 예수님의 치유능력에 관한 확신에 있었던 것입니다.

방법 2) ‘힘을 모아라 : 협력하는 태도’

이 네 사람은 중풍병자 한 사람을 위해 모두가 협력하는 본을 보여 줍니다. 중풍병자를 데려오기 위해 네 사람이 상의 한 귀퉁이씩을 메고 왔습니다.  또 상을 함께 지고 지붕을 향해 계단을 올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지붕을 뜯고 네 귀퉁이를 끈에 달아 내립니다. 장례 때 하관을 하는 것을 보면 관 귀퉁이에 광목 끈을 달아 네 사람이 조심조심 내립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내리거나 덜 내리면 큰일입니다. 이와 같이 네 사람은 상을 메고 갈 때, 상을 달아 내릴 때 행여나 환자를 떨어뜨릴까, 환자가 불편해 하지는 않을까 배려하며 조심조심 힘을 모읍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도의 협력과 주의를 요구하는 행동들입니다. 이 네 사람은 중풍병자 한 사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정성을 모읍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힘을 모았기에 우리는 이 협력을 주저 없이 ‘아름다운 협력’이라고 부릅니다.

방법 3) ‘지붕을 뜯어라 : 적극적인 태도’

이들은 마지막 세 번째로 앞을 가로막은 지붕이라는 장애도 거침없이 뜯어냅니다. 지붕이 막힌들 어떻습니까? 뜯어버리면 되지요. 뜯는 일이 어려워 보입니까? 아닙니다. 한국 같은 가옥구조에서 기와와 지붕을 다 뜯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팔레스틴의 지붕은 얼마든지 쉽게 손으로 뜯을 수도 있고 또 쉽게 보수할 수도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 지붕은 나무로 약 1미터 간격의 들보를 걸친 후, 들보 사이를 짚과 흙으로 채워 비를 막도록 되어있었습니다(2:1~28). 따라서 네 사람은 급한 대로 손으로 지붕을 덮고 있는 흙과 짚을 떼어내 들보 사이로 제법 큰 구멍을 뚫은 것입니다. 해보면 가능한 일, 쉬운 일인데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하고, 생각을 하더라도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않습니다. 이 네 사람은 가능성을 보고 도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군중들과 이 네 사람 간의 또 하나의 차이점입니다.

또한 지붕을 뚫을 때 분명 먼지와 흙이 집안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집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의아해서 지붕을 쳐다보았을 것이고 이윽고 지붕이 뚫리면서 빛이 들어오고 그 빛에 비추어 네 사람의 얼굴이 집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마치 뽕나무에 올라간 키 작은 삭개오가 모든 사람들 눈에 띄어 웃음거리가 된 것처럼 완전히 사람들에게 노출된 것입니다. 또한 감히 예수님 머리 위의 지붕을 뜯고 소란을 피우다니 무례하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병자를 치유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직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이들은 모든 부끄러움과 비난을 개의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들의 확신, 협력, 적극적인 태도와 용기를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부르십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환자 자신의 믿음이 아닌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나음을 받았다는 것은 특이한 경우입니다. 환자 자신의 믿음은 아니지만 이 네 사람의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켜 중풍병을 낫게 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믿음과 적극적인 신앙으로 다른 사람을 천국 가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제해결의 결과 : 일어나, 가지고, 가라

이제 예수님은 이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일어나’와 ‘가지고’와 ‘가라’입니다. 이 세 가지 명령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명령 1) ‘일어나’(Arise)

이 일어나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미 환자가 치유되었음을 뜻합니다. ‘네 병이 벌써 나았으니 일어나라.’ 하신 것이지요. 게다가 예수님은 중풍병만 치유된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는 말씀을 통해 이 사람의 죄가 전인적으로 치유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내 육신의 병과 문제뿐 아니라 내 정신과 영혼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됩니다.

명령 2) ‘가지고’(Take)

예수님이 ‘네 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신 것은 이 상이 바로 치유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상’이란 헬라어로 ‘크랍바토스’인데 침대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이 쓰던 짚으로 만든 1인용 깔개를 뜻합니다. 이 허름하고 볼품없는 상은 지금까지 그가 꼼짝도 못하고 깔고 살아야 했던 인생의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인생의 짐이 이제 치유의 증거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의 모든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며,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모든 인생의 짐과 문제들이 변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됩니다. 병이 나았는데 그 병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됩니다. 물질적 고통에서 해방되고, 가정의 불화나 자녀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명령 3) ‘가라’(Go)

이 ‘집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이제 그동안 이 중풍병으로 인해 파괴되었던 가정으로 돌아가 네 가정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환자처럼 이 중풍병자도 여러 해 이 병으로 고생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 가정은 가장을 잃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크게 피폐해 있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병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된 것이지요. 이렇게 모든 인생의 질고는 연쇄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물질이 어려우면 가정도 불화하고, 건강도 해치고, 신앙도 멀어지게 됩니다. 문제는 문제를 낳고, 고통은 고통을 낳습니다. 경험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육신의 병이 치유된 이 사람을 향해 네 집으로 가서 가정을 회복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치유이고 이 치유로 인한 회복은 전인적 회복입니다. 병의 치유를 통해 연속적으로 가정과 삶이 온전하게 회복된 것입니다.

맺는말 : 우리는 어떻게?

이제 설교의 결론을 맺기 전에 꼭 지적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6절부터 나오는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이란 율법을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 당시 가장 중요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소프림’입니다. 소프림이란 영어로 counter, 즉 숫자를 세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세느냐? 이들은 율법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면서 틀리지 않기 위해 글자의 숫자까지 다 세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서기관 하면 성경의 글자 수까지 다 셀 정도로, 성경을 그야말로 달달 외울 정도로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대립하고 예수님을 공격한 무리들로 등장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들이 성경을 그토록 잘 알고 정통한 학자들이었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들의 성경지식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리었던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다 아는데 절대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될 수 없어, 절대 저 예수라는 자는 메시야일 수 없어.”하고 미리 눈과 귀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들이 볼 때 이단이고 참람죄를 짓는 죄인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보고 시비를 겁니다. ‘어찌 하나님 아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들의 모습을 보니 마침 설교 첫머리에 인용한 네 가지 유형 중에 테러리스트 유형이 생각납니다. 자칭 만물박사로서 자기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여 자기는 결코 누구에게도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딴죽 걸기 일쑤인 사람 말입니다. 이런 유형은 결코 발전이 없이 제자리에서만 맴돌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태도는 앞서 지적한 군중들의 안일한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실에만 안주하고, 적극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자기 지식에만 의존하고 자기 경험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서기관과 군중들의 태도는 중풍병자를 메고 왔던 네 사람의 태도와 분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찾고, 모든 장애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과 정성을 모으고, 부끄러움도 비난도 개의치 않는 용기를 보여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의 본으로 인정받은 이 네 사람과 완전히 다른 안일하고, 교만하고, 자기도취적인 태도에 빠져 조금도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유형입니까? 우리에게도 반드시 문제는 생깁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건강과 물질과 또한 교회에 문제는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수많은 문제에 대면했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로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삶이 가로막혀 있느냐? 인생의 무거운 짐과 시련이 너를 짓누르고 있느냐? 그렇다면 ‘지붕을 뜯어라!’ 적극적인 자세와 진취적인 믿음으로 이 모든 장애와 문제를 극복해 나가라, 오늘 너에게 어떤 문제가 있느냐? 어려움이 생겼느냐? 그렇다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마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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