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혜로운 삶 (엡 5:15~21 (신 4:9~14)

  • 잡초 잡초
  • 284
  • 0

첨부 1


- 설교 : 강석공 목사 (광야교회)
 
  해마다 8월이 되면 그 지긋지긋한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감격적인 해방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애당초 우리 민족이 겪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제 식민 통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치욕적인 한일합방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 8월 29일, 오늘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날로서 우리는 경술국치, 또는 국치일이라고 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94년 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는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어야 했을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한 마디로 어리석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막지 못한 당시 지도층 인사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들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여간 지혜가 없을 것 같으면 개인이나 가정, 나아가 나라와 민족이 망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또한 이웃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꽤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모세도 밝힌 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10년, 20년 남아 있는 것 같아도 학자들이 조사,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그 중에서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3분지 1도 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아끼려고 합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식기세척기를 사용합니다. 가능하면 비행기도 직항기를 이용합니다. 버스를 타더라도 고속버스나 직행버스를 타지 않습니까? 또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집안 일을 시킵니다. 또 가능하면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서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사람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시간 경영’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되지 않았습니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만들어 벽에 붙이기도 하고, 전자 수첩이나 휴대 전화에 스케쥴을 입력하기도 합니다. 과연 ‘시간 경영’은 주어진 시간을 활용함에 있어서 아주 좋은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경은 ‘시간 경영’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그 무엇보다 권위가 있는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시간 경영’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성경이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시간이란 써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잘 쓰고 나중에 갚아야 할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무슨 약속이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세월을 아끼라!” 뭔가 나중에 갚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시간을 포함한 주어진 모든 것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시간 경영자가 아니라 기회 경영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양의 개념이 아니라 기회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어진 시간이라는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집에 어떤 교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런 덤덤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암으로 투병하다 죽었습니다. 장례를 다 치른 후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강가에 나아가 밤새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옆집에 사는 그 교인이 밤새 그와 같이 있어 주었습니다. 그 교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서 걸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을 뿐입니다. 해가 강물 위로 떠오를 때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아침 식사나 간단히 하러 갑시다.” 얼마 후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에 다닙니다. 옆집 사람이 다니는 교회에... 그가 나에게 보여 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종교라면 그것이 바로 내가 원했던 것이고, 나는 그런 종교에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가 사는 동안 나도 그렇게 사랑하고 싶고 또 사랑받고 싶습니다.” 무엇이 이런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요? 그것은 슬픔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위로의 주님을 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그 때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해하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뜻을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알면 골치 아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주님의 뜻을 알게 되더라도 그 뜻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열 므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부류는 성실하게 책임을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한 므나를 받아 열 므나를 남긴 종과 다섯 므나를 남긴 종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노력의 대가로 각각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종은 여기에 더하여 악한 종이 갖고 있던 한 므나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고 악하고 게으른 사람은 그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맡은 바 책임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둘째 부류는 책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감당하기 싫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부류가 설 곳은 결코 없습니다.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화를 돋굴 뿐입니다.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진 것까지 빼앗기는 수모였습니다. 셋째 부류는 책임을 부정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한 므나를 내놓은 종의 경우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그러나 만일 그가 한 므나라도 남겼더라면 과연 악한 종이라고 책망을 들었을까요? 또 설사 그가 한 므나를 내놓았지만 그 한 므나가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던 것이 아니라 노력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므나만 내놓게 되었어도 꾸중을 들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주인의 말씀에 복종하여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신명기 기자도 오늘 신명기 4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즉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참 지혜요 지식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한 백성이요 지혜와 지식이 있는 민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 계명을 잊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잊지 않게 마련 아닙니까? 만약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다면 지킬 수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사는 비결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성령 충만함을 받을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는 범사에 감사할 것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단지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가 악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어진 모든 것, 특히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늘 기회가 오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으로 굳게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받은 바 구속의 은총을 늘 감사하며 성령 충만한 복음의 증인으로 죽도록 충성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항상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