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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리는 말, 죽이는 말 (엡 4: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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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발음 하나 차이로...

제가 포항에 오고 나서 제일 재미있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일이 바로 경상도 사투리였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세게 쓰는 분들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 좁은 나라 안에서 이렇게 다른 말을 쓸 수 있을까 재미있기도 합니다.

경상도 사투리의 가장 큰 특징은 쌍시옷 발음을 잘 못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쌀’이 아니라 ‘살’이라고 말하곤 하지요. 그러다 보니 가끔 이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살이 참 사다.” 분명히 쌀값이 싸다는 뜻이기 때문에 “쌀이 참 싸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지요. 저는 제일 재미있을 때가 찬송가  402장 후렴구를 부르실 때입니다. “선한 사움 다 사우고 으으 면류관” 정말 알아듣기 힘든 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발음한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조금 어려울 뿐이지 무슨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사투리 때문에 큰 봉변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삿 12:6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여기 보면 사사 입다가 길르앗 거민들과 더불어 에브라임 지파를 칠 때 어떻게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구분해서 죽였는지가 나옵니다. 그들은 요단 나루턱을 막고 지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쉽볼렛’이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쉽볼렛’이란 히브리말로 ‘이삭’ 혹은 ‘홍수’라는 뜻인데 안타깝게도 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사투리 때문에 ‘쉽볼렛’의 ‘쉬’ 발음을 못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에는 쉰(שׁ)과 신(שׂ)이 있는데 에브라임 사람들은 경상도 사람이 ‘쌀’ 발음 못하고 ‘살’ 발음하듯 이 ‘쉬’ 발음을 못 하고 ‘시’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붙잡고 “‘쉽볼렛’ 해봐!” 하면 ‘쉽볼렛’ 못 하고 ‘십볼렛’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너 에브라임 지파 아냐?” 하며 사정없이 죽였지요. 재미있으면서도 서글픈 이야기 아닙니까?

어느 책에 보니 우리나라 역사에도 이런 서글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 사람에게 분풀이를 했는데 조선 사람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를 하며 일본인들을 강간 혹은 학살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약 7천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어떤 사람이 조선인인지 구분하기 위해 일본어만의 특별한 발음인 ‘가․기․구․게․고’를 발음시켜 서툰 자는 무조건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역사는 반복되는지 참 기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오늘 경상도 사투리 이야기를 하고 성경과 역사에 나오는 발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말 한 마디, 언어 하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 잘 못하면 의사소통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쉽볼렛’ 사건이나 관동대지진 사건처럼 말 한 마디에 내 생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데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말 한 마디에 내 생명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내 말 한 마디에 남의 생명이 좌우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바로 ‘살리는 말, 죽이는 말’인 것입니다.

말의 힘, 말의 에너지

최근에 에모토 마사루라는 일본 사람이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꽤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읽어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인 즉은 저자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결정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에 착안해 “그렇다면 물 결정의 모습도 모두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물을 얼려 결정사진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 결정의 사진을 8년 동안 찍으며 놀라운 발견을 했다는 것입니다. 물에다 대고 ‘사랑’이나 ‘감사’라는 사진을 찍으면 그 물 결정이 아름다운 육각형으로 나타났지만, ‘망할 놈’, ‘바보’ 등 나쁜 표현을 하며 찍은 물 결정사진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말 뿐 아니라 글씨나 음악도 같은 결과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과학적 근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떠나서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가정에서 키우는 나무에도 매일 아침 ‘사랑한다’ ‘예쁘다’는 말을 하면 싱싱하게 잘 자라지만 매일 아침 ‘밉다’ ‘싫다’고 말하면 잘 자라지 못하고 시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마찬가지지요? 한 단계 더 나아가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말의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말이란 성대의 떨림에서 나오는 파장입니다만 그 말 속에는 강한 에너지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 에너지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왜 우리의 말 한 마디가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왜 아침에 출근하는데 부인이 “나는 당신이 참 좋아요.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 같은 남편 만날 거예요(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 가사 같지요?).” 하는 말을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신이 나고 활력이 넘치는데 반대로 아침에 부인에게 잔소리 듣고 바가지 긁는 소리를 들으면 하루 종일 힘이 없고 의욕도 없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왜 다른 사람의 한 마디가 나를 행복하게도 해주고 나를 불쾌하게도 만드는지, 왜 친구의 말, 부모의 말, 배우자의 말 한 마디가 좌절한 나를 살 맛 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반대로 죽고 싶게 만들기도 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보이지는 않지만, 말에는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의 힘을, 이 말의 강한 에너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새사람의 습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먼저 그 앞뒤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예정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창세전에 택함, 즉 예정하심을 받아 은혜 가운데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2장에 가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지 우리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니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4장으로 넘어가면 사도바울은 이 은혜를 받아 죄 사함 받은 성도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합니다. 엡 4:13을 먼저 읽읍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은혜로 죄 사함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화되어서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22~24을 읽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유명한 말씀이지요? 은혜로 죄 사함 받은 성도가 성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나쁜 습관, 못된 구습을 다 버리고 온전히 새 사람답게 새로운 습관과 삶의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말씀 다음에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옛사람의 구습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방법은 무엇이냐? 오늘 본문에 구체적인 예들이 나옵니다. 25절에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뭐가 옛사람의 구습입니까?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라는 구습은 버리고 뭐가 새사람의 습관입니까? 참된 것을 말하는 새사람의 습관을 입으라는 것이지요. 26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고 전혀 분을 안 내고 화 안낼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화도 나고 분도 낼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지요. 하지만 아무리 분을 낸다고 해도 죄는 짓지 말고 또 분도 해가 지도록 계속 품고 있지 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화난다고 해서 남을 해치거나 나도 똑같은 짓을 하면 그건 죄가 됩니다. 또 분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고 오랫동안 품고 심지어 내 마음 속에 쌓아두고 죽을 때까지 안 잊는 것 역시 죄가 됩니다.

27절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며 28절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뭐가 버려야 할 구습입니까? 도적질입니다. 내가 땀 흘리지 않고 공짜를 바라거나 노력의 대가가 아닌 남의 것을 불의하게 빼앗고 가로채는 일, 이것이 바로 도적질이요 구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새사람의 습관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구제하기 위해 제 손으로 땀 흘려 일하는 것입니다. 29절에는 또다시 말에 대해 지적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말이 성화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덕을 파괴하는 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게 됩니다. 은혜를 까먹고 파괴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어떤 말이지요? 지난주에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저주하는 말, 시기하는 말, 남에 관한 말을 함부로 하는 것, 함부로 말을 옮기는 것, 남을 판단하는 말, 남에게 상처 주는 말 등이 모두 더러운 말입니다. 이 더러운 언어습관은 바로 옛사람의 습관, 우리가 버려야 할 구습의 대표적인 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변화되지 못한 사람, 언어습관이 성화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새사람일 수 없습니다. 은혜 받아 죄 사함 받고 새롭게 변화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쓰는 말 한 마디만 들어도 우리는 그가 성화된 사람인지, 새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인지, 아니면 여전히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30~32절은 우리의 이러한 작은 습관들, 특히 언어습관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해서는 안 될 말과 꼭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줍니다. 31절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말, 반드시 버려야 할 언어습관을 지적하는데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입니다. 나쁜 말, 화내는 말, 남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말, 남 사이를 훼방하고 평화를 깨뜨리는 말들입니다. 본디 사탄의 이름 뜻도 ‘참소하는 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훼방하고 이간질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남 사이를 훼방하고 이간질한다면 우리 역시 사탄 노릇을 하는 셈이 됩니다. 반대로 32절은 우리가 꼭 해야 할 말을 보여줍니다. 인자한 말,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말, 서로 용서하는 말입니다.

이상과 같이 엡 4:25~32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첫째,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습관을 입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버려야 할 구습과 입어야 할 새로운 습관은 무엇이냐? 가장 대표적인 습관이 바로 언어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언어습관에 있어서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반드시 버려야 할 말들이고 하나는 반드시 해야 할 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반드시 버려야 할 옛사람의 언어습관은 ‘더러운 말,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이지요? 그 특징이 바로 남을 해치는 말, 남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 말의 강력한 생명 에너지로 남을 죽게 만드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반대로 꼭 해야 할 말은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 인자한 말, 불쌍히 여기는 말, 용서하는 말’이었지요? 그 특징은 남을 돕는 말, 남에게 힘을 주는 말, 남을 살리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의 종류에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바로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로 정의한 것입니다.

살리는 말

그러면 먼저 살리는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너무 많아서 이 시간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본문에서 지적하는 말 몇 가지만 보도록 하지요. 본문에서는 ‘덕을 세우는 말, 선한 말, 인자한 말, 불쌍히 여기는 말, 용서하는 말’을 지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들이 여기에 해당될까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서울 영세교회 김종수 목사님은 어디를 가서 설교를 하시든지 꼭 ‘사랑의 천국방언’이라는 것을 따라하도록 시키셨습니다. 저도 학생 때 이 분의 집회에 가서 열심히 이 ‘사랑의 천국방언’을 따라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천국방언’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따라 하세요. ①고맙습니다 ②감사합니다 ③미안합니다 ④죄송합니다 ⑤반갑습니다 ⑤사랑합니다 ⑥잘했습니다 ⑦믿겠습니다 ⑧예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 뭘 ⑨예야 괜찮다 다 나 때문이다.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생략합니다. 이 말들이 다 뭡니까? 감사의 말, 사과의 말, 기쁨의 말, 칭찬과 격려의 말들입니다. 그리고 아주 쉬운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데도 우리가 잘 못하는 말들입니다. 지난주 제가 고등학교 때 “너도 신학대학 가면 좋겠어.” 했던 전도사님의 말 한 마디가 저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고 했지요? 쉽고 간단한 말이지만 이러한 칭찬과 격려의 말은 얼마나 강한 생명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칭찬과 격려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상투적인 칭찬(여성들끼리 만나면 늘 하는 말 ‘예뻐졌다’ 같은 칭찬), 황당한 칭찬, 사실과 다른 칭찬, 아부성이 섞인 칭찬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만 그래도 더 좋은 칭찬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칭찬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잘 생겼다, 노래 잘 한다, 공부 잘 한다 하는 말보다 설교 잘 한다는 칭찬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처럼 우리가 칭찬할 때 그 사람이 제일 잘 하는 것, 제일 잘 하고자 하는 것, 제일 잘 해야 할 일을 칭찬해 보십시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래 사람이, 혹은 주변 사람(남편, 아내, 자녀, 동료 등)이 칭찬 1리터로 얼마나 많은 거리를 달릴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 칭찬 뿐 아니라 기쁨의 말과 감사의 말도 참 중요합니다. “당신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면 반찬이 달라지고 서비스가 달라집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늘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아요.”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참 좋지요? 마지막으로 이런 말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과의 말입니다. ‘미안해’라는 말이지요. 외국을 가보니 참 신기한 일이 많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툭하면 ‘실례합니다’(Excuse Me), ‘미안합니다’(I am sorry) 소리를 합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실례합니다,’ 혹은 ‘미안합니다’(스미마셍) 소리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요. 심지어 내가 남의 발을 밟은 것이 아니라 남이 내 발을 밟아도 ‘죄송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뭐가 죄송할까요? “내 발이 당신 지나가는데 당신 발밑에 있어서 죄송합니다.” 하는 것이랍니다. 반면 우리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 안 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실례를 해도 절대 안 합니다.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않은 행동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정신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말

마지막으로 남을 죽이는 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까요? 분노의 말, 남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말, 남 사이를 훼방하는 말, 저주하는 말, 시기하는 말, 함부로 말을 옮기는 것, 남을 판단하는 말, 남에게 상처 주는 말 등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말에는 강한 에너지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에너지를 ‘말의 비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날카로운 비수의 칼끝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칼로 요리를 하고, 과일을 깎고, 외과 수술을 하면 남을 살리고 남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칼끝이 되지만 그 칼끝으로 남의 가슴을 찌른다면? 사람을 죽이는 칼끝이 됩니다.

지난 주 저에게 격려의 말을 주신 전도사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의 한마디 격려가 저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고 말씀 드렸는데 바로 그 즈음 또 다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고1때에야 교회를 나갔기 때문에 모태신앙을 가졌거나 교회 오래 다닌 친구들, 부모님이 중직자인 친구들에 대해 열등감이 있었다고 했지요? 바로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권사님 집사님이고 모태신앙이며 중고등부 때는 학생회 임원까지 지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저는 지금 목사가 되었는데 그 친구는 지금 교회에 안 다닙니다. 지금도 가끔 만나지만 앞으로도 교회 나올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친구와 대화하면서 그가 교회에 안 나오게 된,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안 나올지도 모르게 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고등부 문학의 밤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행사를 다 마치고 학생회 총무인 그 친구가 찾아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교회를 관리하던 사찰집사님이 다른 친구들 다 있는 데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야, 너 총무라는 녀석이 이게 뭐야? 행사 끝나고 제대로 치우지도 않고 말이야. 이따위로 할 거면 교회 오지 마!” 이 말을 들은 순간 말 할 수 없는 수치심에 친구의 얼굴은 화끈거리고 엄청난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친구는 그 행사가 끝나고 난 바로 다음 주부터 교회를 안 나오기 시작해서 아직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입니까? 그 시절 들은 한 마디 칭찬과 격려가 평생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결심하게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몇 마디 꾸중과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 그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할 수도 있는 시기입니다. 이래도 말의 힘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우리의 말은?

오늘 여러분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특히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았는지, 내가 남에게 한 말이 도대체 몇 마디나 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나의 그 수많은 말로 인해 살린 사람들은 몇 사람이나 될지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말로 죽인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상당 부분 우리가 그동안 한 말로 인해 주님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개야, 너의 말로 인해 이만큼 많은 사람을 살렸구나, 아니 네가 던진 그 짧은 말들, 네가 너무도 쉽게 한 말들, 네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그 말들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었구나.”하고 말입니다. 그 말들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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