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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2가지 사명 (요 2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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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진짜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

성경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딤후 3:1-4).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말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문제는 사랑이 변질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제는 커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정한 사랑의 회복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한 포기의 화초도 사랑을 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어떤 분이 나무 열두 그루를 심고 각 나무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써 붙였는데 가룟 유다라는 이름의 나무만 점차 죽어갔다고 합니다. 쳐다보기만 해도 미운 생각이 드는데 잘 자라겠습니까? 한낱 미물도 사랑 없이는 자라지 못하는데 하물며 내 가족이 나의 사랑 없이 어떻게 영혼과 정신의 키가 커질 수 있겠습니까?

소련 때, 나라에 흉년이 거듭되자 소련 당국은 1%의 사람들을 특별히 선별해 나쁜 박토를 주고 자유롭게 농사지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몇 년 후, 그 1%의 농민에게서 생산된 농업 생산량이 전 소련 농업 생산량의 27%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례를 통해 소련 고위 당국자는 공산주의 노선을 수정하는 수정주의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농사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의 성공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진정 성공을 원하면 먼저 내 사랑이 건강한 사랑인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을 원망하며 “내가 20년 동안 식모살이했다.”고 불평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과 인간관계가 이렇게 비참하게 됩니다.

왜 삶에 두려움과 절망과 허무가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을 잃었다는 표시입니다. 세상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어차피 세상은 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나의 사랑에 문제가 있습니다. 인생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진짜 문제는 항상 내게 사랑이 없는 문제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큰일을 하고 싶으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일을 잘 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의 큰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귀가 열리면 축복도 열립니다 >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큰일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15-17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성경은 어느 한 말씀도 그냥 지나칠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계속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때 “또 잔소리구나!”하고 들으면 귀가 닫히면서 축복도 닫히고, “중요하니까 저렇게 반복하시는구나!”하고 들으면 귀가 열리면서 축복도 열립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특별히 강조합니다. 축복된 삶의 필수 기초과목이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삶이라고 생각하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여러 번 강조하는데,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잔소리로 듣지 않고 기쁘게 듣고 실천하면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어떤 성경 본문 말씀은 자주 듣습니다. 그때 “나도 잘 안다!”하고 가볍게 들을 수 있지만 하나님 말씀은 항상 겸손하게 들어야 합니다. 몇 번 듣고 기독교 진리를 다 이해할 수 없고, 몇 번의 체험으로 성자가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계속해서 들으라고 있는 것이고, 성령님은 계속해서 체험하라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 말씀도 다음번에 보면 얼마나 맛이 다르게 느껴지고, 새롭게 진리가 발견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계속 보면서도 볼 때마다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가수가 한 노래를 히트 시키려면 5천 번을 불러야 하고, 연주자가 한 곡을 잘 연주하려면 천 번 이상 연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계속 들어야 그 말씀이 능력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해야 능력 있는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매일기도와 매일성경읽기가 중요하고, 그 두 가지가 병행된 새벽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반복해서 말씀을 대하고 반복해서 기도할 때 그 말씀과 기도가 우리 삶에 용해되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 성도에게 주어진 2가지 최대 사명 >

그러면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했을까요? 베드로가 가야바의 뜰에 있는 숯불 앞에서 새벽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디베랴 바닷가의 숯불 앞에서 새벽에 똑같이 세 번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받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때 역시 세 번 반복해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양떼를 먹이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성도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아주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 인생은 가장 복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면서 다른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앞으로 얼마나 충성할래?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이며, 힘들어도 사명을 버리지 않을 거냐?”하는 질문을 하지 않고 그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매이면 세상으로부터 매이지 않고 사는 능력이 생기고 진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매이지 않으면 세상에 매여 오히려 진짜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매이면 재미없이 살 것 같지만 진짜 재미를 누릴 수 있고, 세상에 매이면 재미있게 살 것 같지만 진짜 재미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송아지가 자라 코뚜레를 할 때, 송아지는 농부에게 코뚜레를 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농부가 말했습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될 텐데.” 송아지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코뚜레를 해야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두 배로 일을 잘할 테니 두고 보세요.”

결국 농부는 송아지의 코뚜레를 하지 않았고, 송아지는 처음에는 약속대로 잘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꾀를 부리고, 일을 거부하고, 농부를 뒷발로 찼습니다. 어느 날, 그 송아지가 마을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주인이 도살장으로 보낸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코뚜레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고통은 일종의 코뚜레입니다. 우리가 그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코뚜레를 하고 우리의 고삐를 주님께 드릴 때 우리에게는 진짜 사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한번 세상에 매이면 빠져나오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이주일 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담배 피우지 마세요.”라고 TV에서 호소했습니다. 그 후, 담배 매상고가 뚝 떨어졌다가 넉 달 후에 다시 올라갔다고 합니다. 사람은 담배 하나에서도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어딘가 매여 사는 존재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매이고, 하나님의 사명에 매일 때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2. 양떼를 먹이는 것

성도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두 번째 사명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받은 다음에 바로 양떼를 먹이라고 하셨습니까? 결국 ‘예수님 사랑’은 ‘양떼 사랑’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는 양떼를 사랑하는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3번이나 반복해서 양떼를 먹이라고 하신 것은 이웃 사랑이 쉽지 않음을 잘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다 사랑하겠다고 각오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귀찮고 힘들고 실망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에 미리 단단한 마음을 먹도록 주님은 계속 내 양을 먹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목회는 겉으로 보면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모습으로 사는 목회자들은 열 명 중의 한두 명에 불과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대략 목회자 10명 중에 2명이 보통 사람 이상의 삶을 살고, 10명 중에 2명이 보통 이하의 삶을 살고, 나머지 10명 중의 6명이 최하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

보통 이상의 삶을 사는 분들도 마음고생은 똑같습니다. 목회 자체는 행복한 일이지만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많습니다. 목회뿐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사람을 먹이고 세워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 양육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양육과 이웃 사랑은 성도의 최대의 사명인 줄 알고 그 일에 대한 수고와 관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최고의 인격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격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사람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을 무시하면 자신의 가치도 떨어지고,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 중의 관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을수록 내게 나타나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할 때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가르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자기 자녀가 친구를 무시하는 왕따의 주동자 역할을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가지고 자녀의 그런 모습을 즉시 제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그런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커서도 그 버릇을 버리기 힘들게 되고, 그때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사람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내 이웃을 나무로 알고 그의 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내 이웃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전해주고, 편안함을 주는 소중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속담에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로에서 뺨을 맞아도 한강에서 화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야단맞았어도 집에 와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남을 배려하며 사는 만큼 하나님의 축복도 커질 것입니다.

< 절대 사랑은 절대 능력을 줍니다 >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세 번의 질문은 같은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다 다릅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보통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둘째는 친구간의 사랑을 뜻하는 필레오, 셋째는 어머니의 사랑을 뜻하는 스톨게, 넷째는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15절의 첫 번째 질문과 16절의 두 번째 질문에서 사용한 단어는 아가페였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어서 두 번 모두 “제가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17절에서 세 번째로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즉 베드로가 아가페로 도달하도록 다그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필레오로 사랑의 기준을 낮춰주시고 눈높이를 낮춰주신 것입니다.

또한 용어만 눈높이를 낮춰주신 것뿐만 아니라 말씀의 강도에서도 눈높이를 낮추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질문할 때 15절에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베드로가 자신 없게 대답하니까 두 번째 질문할 때에는 조금 강도를 낮춰 ‘이 사람들보다’라는 구절을 빼고 그냥 “네가 나를 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도 자신 없게 대답하니까 마지막으로는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베드로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주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육신의 사랑이 있어야 진정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선교사가 옷을 안 입는 부족에게 선교를 갔는데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자기가 걸친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니까 비로소 원주민들이 마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두꺼운 자존심의 옷을 포기해야 비로소 삶에서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성육신의 사랑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 사랑은 본능이지만 자기희생에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런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바로 아가페라고 합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자기를 조각조각 찢어 남에게 주고 자기는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절대 사랑을 말합니다. 절대 사랑은 절대 능력을 주고, 절대 변화를 일으키고, 절대 축복을 줍니다. 남의 희생을 강요하면 잠깐만 살게 되지만 자기희생을 각오하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육신의 사랑은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많이 체험했습니다. 겸손하면 은혜가 주어지지만 교만하면 은혜가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제일인줄 착각하지만 그런 착각에서 자기를 지키는 길이 인생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옷을 걸치면 다른 것 같지만 벗으면 다 똑같습니다. 사실 가장 똑똑한 것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정신 나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용인 정신병원에서 설교하는데 한 병자가 킥킥거리며 웃으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그를 쿡쿡 찌르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얘는 가끔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미친 사람이 남보고 미쳤다고 하니까 너무 웃겨 목사님이 설교하다가 막 웃으니까 그것을 보고 다른 정신병자가 “어, 저 목사도 미쳤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은 자기가 미쳤다는 진리를 그날 처음 발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과 우리는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일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하는 일마다 막다른 골목을 만나겠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하게 행동하면 우리 앞에는 시원한 대로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 원수 같은 과거도 사랑하십시오 >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 베드로를 일으켰습니까? 주님의 겸손한 성육신의 사랑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사랑은 과거의 수치를 이기게 하고 깨진 관계를 복원시켜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과 상처, 그리고 힘든 삶의 여정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실제로 세 번의 질문이 끝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질문이 자기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질문인 줄 알았는데, 세 번의 질문을 주고받는 사이에 어느새 마음의 질병이 다 치료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과거의 수치를 깨끗이 잊고 누구보다 훌륭한 제자의 길을 새롭게 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붙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면 얼마나 불행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회를 먹다가 체한 후로 더 이상 회를 먹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는 잘 먹었는데 그 한번의 체한 기억이 맛있는 회를 먹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그처럼 과거에 실패한 경험을 잘 극복하지 않으면 삶의 일부분이 파괴됩니다.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생긴 실패의 경험을 잘 극복하지 않으면 삶의 상당 부분이 파괴됩니다. 그때 무엇이 필요합니까? 바로 사랑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원수 사랑이 필요합니다. 링컨은 원수는 마음에서 없애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링컨에게 원수를 없애버리라고 할 때 링컨은 말했습니다. “당연히 원수를 없애야지요. 저는 원수 사랑으로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려고 합니다!”

우리가 진정 복된 삶을 살려면 원수 사랑을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원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진짜 원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와 수치의 기억입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그 기억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원망과 과거의 아픈 기억을 버려야 합니다. ‘원수 같은 과거’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원수 같은 과거’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 같은 과거를 그냥 잊어버리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더욱 훌륭한 일은 그 원수 같은 과거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수치가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겸손할 수 있었구나! 그 실패가 있었기에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가 되었구나!” 그런 넉넉한 믿음의 고백으로 원수 같은 과거까지 사랑으로 품고 승화시켜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가장 복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3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육신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원수 같은 과거까지 사랑하고 승화시킴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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