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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눅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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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열 목사 (대구선교교회)

요  절 6: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 6:5)

  어제 밤에 우리 나라 축구 선수들이 열심히 싸웠으나 4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제는 여자 단체 양궁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마지막 한 발을 어떻게 쏘느냐에 따라서 금메달이 될 수도 있고, 비길 수도 있고, 은메달에 그칠 수도 있는 경우가 되었습니다. 그 선수가 9점을 맞추면 비기고, 8점을 맞추면 은메달, 10점을 맞추어야 챔피온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수는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딴  박성현 선수였습니다. 그때 그 심적인 부담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한 발을 10점을 맞추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성현 선수는 올림픽 2관왕이 되었고, 한국 여자 양궁 5연패를 이루어내었습니다.

192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400미터 중장거리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릭 리델(Eric Liddell)이라는 스코트란드 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원래 100 미터 단거리 선수로 우승 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경기를 해야 하는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에릭은 그리스도의 안식일날 자기 명예를 위해 경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나가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주님과 주님의 날을 경홀히 여기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일이 알려지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광신자로 비웃었습니다. 그가 출전할 수 없다는 소식은 파리 신문의 1면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에릭은 결국 주일 경기에 나가지 않았고
금메달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또 나라를 욕되게 하는 사람이요, 심지어 매국노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에릭은 게시판에 400미터 경주는 주일이 아닌 다른 날에 열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400미터는 에릭의 주종목은 아니었지만 감독에게 찾아가 400미터 경주에서 달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지금까지 관례상 없었던 일이었지만, 감독은 허락해주었습니다. 에릭은 예선 경기에서 이겼습니다. 그 다음 경기에서도 이기고 마침내 결승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승전 바로 전에 마사지 담당자가 에릭에서 종이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는데 거기에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 2:30)라고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에릭은 결승전에서 달릴 때, 그 말씀을 붙들고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세계 신기록을 기록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 100미터는 자기 힘으로 달렸고, 나머지 300미터는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달렸다고 간증했습니다.

  후에 에릭은 중국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중국 선교사로서 너무나 헌신적이었습니다. 청일 전쟁에 청나라가 폐할 때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 수용소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에릭은 매춘부와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던 사업가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또한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고 석탄을 날라다 주었고, 어린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에릭은 수용소에서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장례식에서는 선배 선교사인 아놀드 브리슨(Arnold Bryson)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에릭 리델은 예수 그리스도 정신을 그의 성품과 삶 속에 가장 탁월하게 나타내었던 사람이었다'

  영국의 영화 감독인 데이빗 푸트남(David Puttnam)이 그의 생애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불의 전차"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세계적인 갈채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어떻게 존중히 여기시는지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뉴욕 영화 비평가인 렉스 리드(Rex Reed)는 그 영화를 가리켜 "지금까지 제작된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인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갈등이 점차 고조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문둥이를 고쳐 주심으로 소문이 온 마을에 퍼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는 분은 바로 메시야라는 사상이 유대인들에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셨음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은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의 집에 가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며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이 문제로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유대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갈등은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6장에 넘어오면서 안식일 문제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구체적으로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여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11).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기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3가지 자랑이 있었는데, 첫째는 성경이요, 둘째는 성전, 셋째는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문제요, 유대인 공동체를 묶어주는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문제는 제4계명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ꡒ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ꡓ(출 20:7-10) 출애굽기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엿새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안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다해서 힘써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엿새 동안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에게 안식일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이 전인격적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육체의 노동을 쉬면서, 생존경쟁에서 오는 긴장을 풀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함으로써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영혼의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나, 종들이나, 가축까지 쉬게 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사랑과 자비를 베풀도록 하신 거룩한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신분의 차별을 없애고 하나님 앞에 동등된 자격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런데 신명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해 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는 안식일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날로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분명하고 강하게 명령했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니”(출 31:14) “무릇 이 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찌니”(출 35: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민 15:35).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복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복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하루를 구별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므로 구원의 은혜와 삶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켰습니다. 심지어 전쟁기간에도 예루살렘 성전이 훼손 당할 위기가 아니라면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마카비 시대에는 전쟁 중에 안식일을 지키다가 몰살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헬라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유대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폐하고, 성전 제사를 폐지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일어난 운동이 바리새 운동이었습니다. 그 핵심이 안식일을 지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BC 2세기경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39개 조항 234항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식일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짐을 운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무게 이상 되면 짐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새 알만한 돌의 무게 이상 되는 짐을 옮기는 것은 안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또 여행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몇 키로 이상을 여행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2 km 이상 걸으면 안 된다고 규정했습니다. 또 안식일에 의료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죽어 가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금지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응급처치만 하도록 되었습니다. 또 안식일에 추수를 하거나 맷돌을 갈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이나 비비는 것까지도 금지시켰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까다로운 율법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안식일의 계명의 원래의 정신은 사라지고 까다로운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안식을 잘 지키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 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신명기 23장 2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 23:25) 이 계명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들고 들어가 곡식을 베는 것은 금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손으로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평소에도 가끔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율법적인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랐으므로 추수를 한 것이요, 비비었기 때문에 맷돌질한 것입니다. 또 ‘후~’하고 불었을 것이기 때문에 키질을 한 것입니다. 또 안식일에 음식을 장만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도록 명하셨습니다. “제칠일은 여호와의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2,3) 심지어 안식일에 거울을 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거울을 보면 흰머리가 보이고, 뽑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흰머리를 뽑는 것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제자들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고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을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짓을 하는가?”하며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이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요구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고 했습니다. 또 세리와 죄인들은 상종치도 않았습니다(눅 5:30). 이들은 까다로운 규칙만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까다로운 안식일 세칙에 얽매여 끊임없이 요구하고 판단하는 마음때문에 한 사람도 품고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배고픈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다가 사흘을 굶고 심히 배가 고팠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먹을 것을 구했으나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뿐이었습니다. 이때 제사장 아히멜렉은 이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1:1-6). 다윗은 진설병을 집어먹고 자기와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제사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레 24:9). 그러나 제사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굶겨 죽이는 것은 더 큰 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비벼 먹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 사랑과 자비의 눈으로 보십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의 마음으로 배고픈 사람들의 형편을 이해하십니다. 한창 젊을 때는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돌아서면 또 배고픕니다. 그래서 친구 자취방에 몰래 들어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들킨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바리새인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남의 집에 들어와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볼 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남의 장막에 들어가 라면을 끓여 먹었을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려면 ‘어찌하여’가 ‘얼마나’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의 기준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나 신자들 사이에서 법과 절차를 따르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결핍으로 해서 바리새인들의 집단이 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은 하지 않고 오직 비난과 판단과 정죄가 가득한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하게 되고, 사랑이 없는 교육은 반항하게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지성은 교활하게 되고 사랑이 없는 힘은 난폭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했습니다. 열심히 사랑하며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함으로써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의 좋은 점만을 찾으며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신 후에 무슨 말씀을 하였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을 가리키는 말로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신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요. 안식일의 창설자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주일에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요, 안식일의 참 주인(Lord)이십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주일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예배 시간입니다. 이 예배의 중심은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와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를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무시하고 등한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구약의 명령이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도 모든 날이 주의 날이기 때문에 반드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 5일 근무제도가 실현되고 있는 지금, 일요일 대신 금요일 오후나 저녁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도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의 주일을 준비하는 예표입니다. 사실 구약의 거의 모든 제도는 신약 시대를 준비하는 예표들입니다. 양을 잡아서 제사 드리던 것은 십자가의 제사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교회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신약의 주일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구약 시대 잠깐 동안 주어진 제도가 아니라 대대로 영원히 지킬 제도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3).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출 31:16,17).

  신약의 교회는 주일날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안식 후 첫 날인 주일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 둘째 주일날 또 나타나셨습니다.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날을 새로운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제정하신 것이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도 주일날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일날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사도 바울도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함께 모인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20:7).

  신약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약의 주일은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찌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찌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 이렇게 볼 때 구약과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요한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요한 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안식일은 영원한 하늘의 구원과 안식을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 교회는 아무 갈등 없이 유대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노동을 하지 않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에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주일에는 자기 생업을 계속하면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터툴리안의 글에 ‘어떤 열심 있는 사람들은 주일에까지 일을 쉬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2세기까지는 주일에 생업에 종사하면서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회적인 약자로 존재했던 기독교가 주일날에 쉬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모두 안식일을 지키지 말고 주일을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2세기경의 문서인 디다케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주일은 특별한 날이므로 함께 모여 죄를 고백하고 떡을 떼며 감사를 드릴 것이다.”
이그나시우스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 이는 그 날에 우리들의 생명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2세기의 변증가 져스틴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사람들이 한 곳에 모였는데 이 때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글이 읽혀졌다. 일요일은 하나님이 어둠을 변케 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는 321년 칙령을 내려 일요일에는 휴식할 것을 명했습니다. “모든 법관들과 도시의 시민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영예스러운 날인 일요일에는 휴식을 취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일 성수는 처음 시기부터 매우 광범위하게 인정되었으며, 주일 성수는 안식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날이며,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첫째로 주일은 축제의 날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기본적인 개념은 기쁨과 축제라는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 주일에는 이런 일을 해선 안 되고, 이런 데는 가선 안 되고, 이런 것은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의 전통 위에 서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 데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유케 하신 날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장차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누릴 진정한 안식을 소망하여 즐거워하는 축제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주일 성수는 삶으로 드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구약시대의 사회는 굉장히 단순한 사회였고, 그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노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차례씩 모든 노동력이 쉬게 해야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매주 휴식을 취하도록 한 사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한 번은 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일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모든 육축까지 쉬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신다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주일에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주일에 가게문을 닫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주일 성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없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물질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요구하셨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칠분의 일을 요구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여 주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삶의 근거를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구속의 주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일 성수는 그리스도인의 존엄성을 지켜 줍니다.

  구약 시대 노동자들은 일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노동력의 착취가 애굽에서의 생활이 아닙니까! 이제 자유함을 얻은 이스라엘은 심지어 이방인과 나그네들, 육축에 이르기까지 모두 쉬도록 합니다. 주인만 쉬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들과 종들까지 쉬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두가 은혜로 자유를 얻었기에 사람들은 모두가 그들의 신분이나 재력, 권력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입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을 했는데, 다시 쉼 없이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일의 노예가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가치들 보다 더 존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따라서 그 존엄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일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고, 일의 노예가 되고, 제도의 노예가 되고,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하게 될 뿐입니다. 스코트란드의 육상 선수 에릭 리델과 같이 운동선수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금메달을 포기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 그리했을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상급을 주셨고, 중국 선교 역사에 귀히 쓰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축복하시고 그를 ‘불의 전차’와 같은 위대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주일을 거룩히 지킴으로서 세상의 압박과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주일은 공동체의 연합을 누리는 날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위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숙제와 시험으로부터, 여행과 레져 등과 같은 일들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예배 공동체에 두어야 합니다. 주일은 성도들이 지체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그러므로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예배의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부족한 점들은 보완하기 위해서 기관과 부서 모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신 또 다른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주일에는 오직 주의 일을 위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소교리문답 103문은 우리가 4계명을 지켜야할 의미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예배적인 활동들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을 인식하는 것과 함께, 성령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세상의 힘겨운 일과 악으로부터 벗어나 이생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일 성수를 통해서 우리 앞에 놓인 영원한 안식을 내다보며 미리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주일을 위해 많은 것들을 투자하고 헌신하려는 결단을 하십시오. 이렇게 굳은 신앙 고백을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을 진정으로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년에 제정)에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규정하면서 거룩하게 지킬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날에는 그들의 세속적 직업과 오락에 대한 일이나 말이나 생각으로부터 온 종일 쉬어야 할 뿐 아니라 공적 내지 사적 예배행사와 자선의 의무를 수행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한다.” 미국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촬스 핫지는 주일성수를 무시할 때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업무와 오락을 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배와 함께 하나님의 일로 시간을 보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들의 일주일간의 생활과 시간계획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엿새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들만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놀다가, 주일에 공부하려는 사람은 주일을 지킬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 엿새를 투자해야 합니다.

  1920년대 한국교회에 큰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김익두 목사님은 ꡒ주일을 거룩히 지키자ꡓ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 되어서 구약시대에는 일하는 사람은 다 때려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일 범한 사람들은 구약시대 같으면 다 때려 죽일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때려죽이지는 않지만 죄는 죄입니다.” 그만큼 주일 성수룰 강조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만드신 계명입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안식일 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의 주 하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며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세상 일을 쉼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봉사하며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무엇이 축복입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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