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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 이어져야 할 사도행전 (행 2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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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계속 이어져야 할 사도행전
본문 / 행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이 퍼저 나가는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사마리아, 안디옥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을 거처 마케도냐로 그리고 이제 바울의 선교를 통해 로마까지 전파된 것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상을 다루고 있기에 사도행전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전파의 주도적인 역할은 성령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라는 명칭보다 오히려 성령 행전이라고 해야 맞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으로 바울의 동역자였던 의사 출신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 복음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습니다. 원래 누가복음과 전,후권으로 이어져 있었으나 주후 2세기경 내용의 독자성을 따라 별도의 책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시작하여 부활 승천까지를 사건을 다루므로서 복음의 시작을 기술하였다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두 가지의 비젼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젼과 사도 바울의 비젼입니다. 예수님의 비젼은 1:8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비젼을 바울은 어디까지 받았습니까?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비젼은 로마까지였습니다.
  그는 행 19:2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주님의 목표요 주님의 비젼이라면 그 비젼을 이루는 일에 사도 바울의 몫은 예루살렘에서 로마 까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자시 셋집에 유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바울의 비젼이 성취되는 장면에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은 로마에 도착한 바울이 2년 동안을 셋집에 머물면서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의 시기심과 모함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고소당하여 결박되게 되었는데 로마의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호송되어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해서 가이사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이년 동안 그는 로마의 어느 집에 연금 상태로 갖히게 되었습니다. 30절에 말씀을 보면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여... 라고 한 것을 보아 이것은 감옥이라기 보다는 재판을 기다리기 위해 억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자신의 돈으로 집세를 물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든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했던 바울의 꿈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까지....” 라는 바울 선교의 완성입니다. 결코 예수님 비젼의 완성이 아닙니다. 즉 
  사도행전의 끝이 선교의 완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그 다음의 역사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종료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기록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 1:8절에서 복음 전파의 마지막은 땅 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바라보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날 사도행전은 끝이 날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계속 이어져야할 신 사도행전 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 초대교회 때에 역사하신 성령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록은 종결되었어도 성령을 통해서 기록되어지는 선교행전은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신 사도행전입니다. 신 사도 행전은 성령행전이며 선교행전입니다. 주님이 바라보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비젼을 이루어가는 것이 신 사도행전입니다. 
  어떻게 신 사도행전의 주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1)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 충만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신 사도행전의 주역이 되려면 성령 충만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말할 때 항상 성령의 은사적 충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은사적인 것 즉 방언, 예언, 환상과 같은 신령한 은사 행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란 한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인으로 섬기기 시작한 다음부터 이루어지는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얼마만큼 예수를 닮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에서 어느 정도 예수화 하였는가 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성령의 충만의 척도가 아닌 성령의 열매가 성령 충만을 말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갈 5:22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 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합니다.
  갈 5:25절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 시대의 사도행전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헨리 포펜’ 은 중국에 가서 40년 간 선교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전도 여행을 하다가 산간벽지 마을을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하나가 나서서 말하기를 예수가 자기 마을에 와서 살았었고 자기는 그분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말을 듣고 그것은 당신들이 잘못 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선교사를 공동묘지로 데려가 묘지 하나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와서 살면서 그들을 도와주다가 죽은 한 미국인 의사가 묻혀 있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의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생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예수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수 비슷한 냄새라도 나게 하여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에게서 예수 냄새가 나게 만들고 숨길래야 숨길 수 없도록 살아가는 사고방식 속에 예수의 모습이 배여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초기의 부흥 목사님었던 이성봉 목사님은 6,25 때 목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심한 고문과 조롱과 핍박이 그에게 가해졌습니다. 어느 날 한 공산당원이 말했습니다.
  “어이 영감, 천국 좀 보여주지”
  “예 천국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니 죽어서 말고 지금 당장 보여주란 말이야!” 지금 당장 천국을 보여 달라는 공산당에게 이성봉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 지금 당장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천국 본점이야 내 소관이 아니니까 보여 드릴 수 없고 지점은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제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제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천국 지점이 설치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빌 1:27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령 충만 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궁극적 목적이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의 삶에서 복음이 전파되면 그것으로 성령 충만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삶에서 성령 충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폴 길버트’ 는 “당신이 하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는 말로써 당신은 매일 매일 한 장의 "복음"을 씁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나 있는 사람이나 사람들은 당신이 쓰는 것을 읽습니다. 당신이 기록하는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글은 겨우 낡은 펜으로 끄적 거리는 것에 불과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희미하고 거기다 온갖 더러운 것들로 얼룩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썼는지도 모릅니다. 성령 충만이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그런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한 여인이 구멍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친절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정직한 이 여인이 운영하는 가게로 몰렸습니다. 어느 날 여인의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길 건너에 있는 가게에 손님들이 들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는 구료”
  그 날부터 여인은 자기 가게로 찾아와 물건을 사려는 손님에게 “손님 찾으시는 그 물건은 저희 가게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길 건너 가게에는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길건 너에 있는 가게는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유명한 소설 빙점을 쓴 일본의 “미우라 아야꼬” 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1964년 일본 아사히신문 창립 85주년 기념 1천만 엔 소설 공모에서 응모작 731편 중 쟁쟁한 문인들의 작품을 물리치고 자신의 작품 『빙점』 이 1등으로 당선된 후 당선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소설 쓰는 것을 통해 전도하고 싶다. 입선되지 않아도 심사하는 선생님들은 읽어 주실 것이니, 그 선생님들에게 만이라도 전도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삶속에 뿐 아니라 그의 소설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빙점이란 물이 어는 온도를 말합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의 빙점을 녹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들의 빙점을 녹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삶속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사도행전을 계속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선교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고 성령행전은 선교행전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 ” 라고 하신 행1:8절의 말씀은 성령 강림의 목적이 선교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선교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 강림이 우리들에게 어떤 신비한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할 때 임하는 권능 자체도 선교를 위해서입니다. 권능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기위해 주신 수단 즉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무조건 선교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선교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래서 “타오름이 없는 불은 불이 아닌 것처럼 선교하지 않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내는 선교사가 되든, 가는 선교사가 되든 선교에 대한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선교에 부담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도행전을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천국에서 계속 기록되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기록도 쓸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며 영혼구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물질을 드리든, 몸을 드리든, 시간을 드리든 영혼 구원을 위해 선교를 위해 무엇인가를 투자해야 만이 신 사도행전의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 한화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교회에 등록한 성도가 한분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 교회를 처음 나오신 분입니다.
  계속 주보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일 주보가 배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주 교회에 본인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계속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새가족 소개하는 시간에도 말씀하시면서 계속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왠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온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밖에서 힘든 일로 지쳐있을 때 따듯한 엄마의 품에 안겼을 때 흐르는 눈물처럼 그분에게 주님이 크신 위로가 임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보를 넣고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고 헌금을 드리고 하는 일들 모든 것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책에서 교인들을 몇 가지 종류로 분류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달구지 같은 교인 / 달구지 교인들은 항상 밀어야만 움직이는 교인입니다. 동력이 자신에게 없어서 남의 힘을 빌어 조금 움직이는 수동형의 교인을 의미합니다. 
  연 같은 교인 / 연 같은 교인은 끈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날아가 버리는 교인입니다. 그래서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고 구역장이 담당 전도사가 끈을 놓아버리면 세상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고양이 같은 교인 / 고양이 같은 교인은 줄곧 토닥거려 주어야 만족하는 교인입니다. 잘한다고 예쁘다고 칭찬하고 쓰다듬어 주어야만 기분 좋아 하며 움직입니다.
  럭비공 같은 교인 / 럭비공 같은 다음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교인입니다. 엉뚱한 일을 저지르기 잘하는 교인, 예측 불가능한 교인이 럭비공같은 교인입니다. 
  풍선 같은 교인 / 풍선 같은 교인은 잔뜩 부풀어 있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만과 불평이 가득 들어있어서 조금만 건드리면 터저버립니다.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교인 / 감정이 쉽게 식었다 뜨거워졌다 하는 교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쉴새 없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떤 교인의 유형에 속합니까?
  우리교회 성도들은 위의 유형에 속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엡 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하신 말씀처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소원인 영혼구원에 전력 투구할 수 있는 교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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