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약 4:4-6)

  • 잡초 잡초
  • 335
  • 0

첨부 1


-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자 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이제 더위도 한 풀 꺾이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곡백과가 영글어 가는 즈음에 우리의 신앙도 무르익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흩어진 열두지파에게 보내는 야고보의 편지를 계속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때로 야고보서를 이해하는데 겪는 어려움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하는 것보다는‘왜 이 말을 여기에서 하는가’하는 것이 납득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말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왜 갑자기 “간음하는 여자들아”이렇게 다그치는지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4장 1절에서 3절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야만 합니다.

거기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그렇게 싸우고 다투고 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기도하는데도 못 얻었다면 그것은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이어서 본문4절에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ꡓ라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야고보 선생은 신앙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다가 공동체의 형편없는 영적인 수준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는 짓이라고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뿐이요  하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서로를  향한 험담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참을 수 없는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한다고 밤을  새우기도 하고 사흘씩 밥을 안 먹기도 하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전체 자기 욕심에 따라서 구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보았을 때 답답해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향해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ꡓ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말이 있어도 그렇게 직선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금 변죽만 올리고 그냥 좀 돌려 가지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야고보 선생은 아주  직선적으로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흩어진 열두지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ꡑ라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느닷없이 신앙인들을 그 남편에게 불성실한 여인으로 몰아치고 있습니다. ꡐ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ꡑ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여자들만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공동체 전부를 다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이 모두 간음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말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1.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질책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배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에게 신실해야 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도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시고 우리는 그의 아내라고 그렇게  비유를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슨 폭군과 신하와의 관계가 아닙니다. 일을 시키는 무서운 주인과 그 일을 해야 되는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때로는 부자지간으로 때로는 부부지간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신자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랑으로 말하면서 오시는 그분을 맞이해야 되는 우리의 신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렇게 남편과 아내 사이와 같이 사랑스럽고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그 사랑에 일치하지 못한 삶을 살지 못 할 때에 ꡒ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ꡓ라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남편이 아내 사랑하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긴 남편들 가운데서는 아내사랑을 제대로 하지를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몇 달 안 되는 자매도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몇 년씩 함께 살아도 불만이 점점 쌓여 갈 수 있습니다. 아내들이 바라는 것처럼 사랑할 줄 아는 남편들은 드문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성경은 남편들을 향해서ꡐ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ꡑ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명하지 않으면 못할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울산교회 소속의 모든 남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듣고도 아멘 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겠다는 이야기입니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해도 집에 가서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화가 끌어 오르는데 여기서 아멘도 안 해놓으면 더더욱 힘들어 집니다.

남편이 아내 사랑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자기 남편 떠올려서ꡐ 아~ 역시 하나님도 그래서 나를 이렇게 골탕 먹이는구나ꡑ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남편은 이상적인 남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남편과 비교되지 않게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했으면 우리가 정말 초라했을 겁니다. 모두 소돔 같고 고모라 같이 다 멸망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거기에 따라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떻게 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원이나 상상을 초월한 사랑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구약 성경에는 고멜과 호세아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호세아는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 아내 고멜은 시대의 바람둥이였습니다. 남편의 눈만 벗어나면 벌써 다른 남자하고 눈이 맞아 놀아나는 여자입니다. 그리고는 그 남자를 따라 가버립니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용서하고 데려오라는 겁니다. 데리고 와서는 조용한 한적한 광야에 가서 두 사람만의 단란한 시간들을 가져서 관계를 회복하라고  명하십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데려온 지 일주일도 안 가서 또 사라졌습니다. 또 어떤 남자를 쳐다보고 그 남자를  따라가 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가서 데리고 와라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아니  돈을 주고라도 다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갑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 여러분 아내가 마음에 안 들 때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뚜껑이 열리거나 그러지만 말이죠. 그래도 여러분 아내는 고멜 보다 났지 않습니까? 그런 아내 고멜도 데리고 와서 사랑하라고 하니까 선지자는 사랑 하더라고요.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호세아와 그 아내 고멜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의 이야기를 그림처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호세아가 끈질기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고멜은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면 ꡒ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ꡓ “우리가 똑똑해서 잘 살지” 말은 안 하지만  태도가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답답합니까?  하나님이 보다가 못해 딱해서 좀 도와주면 ꡐ잘했어!  역시 내가 머리가 좋아 투자를 잘했어. 응 ~ 주식을 잘 샀구먼ꡑ 상승주를 잘 샀다는 것입니다.

땅값 뛸 것을 골라서 사놨다며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나와요 그렇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습니다. 재산이 좀 생기면 교회에 나와서도 어깨에 힘을 딱 주고 앉아 있습니다.

옛날에 어려워서 갈급했을 때 눈물 콧물 흘리며 부르짖던 그때하고 다릅니다.  역시 신앙생활을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말씀 들었지만 한두 챕터에서는 안 듣고 넘어 간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조금도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그런 자세로 나온다고 하나님이 포기하실 것 같습니까?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추적합니다. 집요하게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해서 다시 당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보답하는 시간이 예배시간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자세히 한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어떤 삶을 살아 오셨습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ꡑ하는 표현이 심한 것인지 우리의 삶이 지나친 것인지 한번 판가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정말 지금 쯤은 정직한 그리고 심각한  평가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에이브러험 링컨일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니까 사람들이 이 사람 저 사람 천거를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한자리 앉혀달라고.

한 사람을 보더니 더 이상 길게 이야기 안하고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추천했던 친구가 ꡐ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보고만  속단 하냐고 시비를 거니까  대답이ꡐ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ꡑ얼굴 보면 한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표가 난다는 것입니다.

나이 40이라고  하면 후히 잡아도 인생의 반을 산 것입니다.  그 동안 여러분이 추구한 것하고 그래서 손에 넣은 것하고 한번 정확한 평가를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기와 다툼, 불화와 반목까지 하면서, 친구들 사이에 의리에 금이 가기도 하고 친척들 사이에 따돌림을 받기도 하면서까지  추구해왔던 것을 그래 얼마나 손에 넣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중간평가 해 봐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갖지 못하고 손에 넣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분이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무릎 꿇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기도하지 않아서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여러분 중에서는 “목사님! 내가 얼마나 열심히 구했는데 섭섭하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결혼하고 나서 지금껏 구했는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받아 누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왜 내게만 주시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우리는 불평을 합니다. 원인을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잘못된 동기에서 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기도했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 거짓되고 신실치 못한 피조물들아! 너희들은 마치 남편 대신 다른 남자를 사모하는 악한 아내와 같다.ꡑ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2. 세상과 벗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여러분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성경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ꡐ간음하는 여자들이여! 간부(奸婦)와 같은 인생이여!ꡑ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수긍하기 싫더라도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왜 그런 극단적인 표현으로 질책할까요? 우리 모두 세상을 향해서 기웃거리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벗된 삶은 세상을 향해서 바라보는 삶입니다. 반평생을 바쳐서 추구한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세상을 추구하고 산 것입니다.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 지금껏 생을 바쳤다면  헛되게 인생을 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창조세계에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즐기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들에 핀 아름다운 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꽃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제대로 감상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을 들녘이 무르익어 가고 단풍이 울긋불긋 들어 갈 때에 그것을 우리가 즐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만물을 우리에게 주셔서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셨을 때에는 자기 자신만을 돌아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것 가지고 이웃을 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저 물질을 모으는 데만 신경을 쓰고 세상을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신 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것을 관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일을 하시잖아요.

여러분은 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십시오. 어떻게 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생각 하십시오. 대학 다니는 것 봐 가지고 신앙이 좋은지 나쁜지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젊었을 때는 모두들 이상적입니다. 돈 그런 것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들 하지만 졸업하고 나면 달라지더라고요. 누가 더 연봉을  많이 받는가 신경을 쓰게 됩니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느냐는 대해서 만족을 누리려고 듭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된 길로 빠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이웃을 섬기는 도구이지 우리가 추구해야할 대상은 아닙니다. 축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으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 보십시오. 자기 자신, 자기 식구들밖에 생각하는 삶에서부터 벗어나십시오. 자신의  육신의 쾌락추구를 도모하는 그 일에서부터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실 때는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주신 것으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성도들을 돌아보십시오. 선행과 사랑을 더욱 힘쓰라고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기쁨이 가득한 한해로 삼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매달 주시는 수입 가운데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위해서 좀 구별해 보았습니까? 섬기는 기쁨  베푸는 즐거움을 여러분은 이 여덟 달 동안에 몇 번이나 경험해 보셨습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온갖 좋은 것을 때마다 선물했습니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예쁜 옷도 사 주어서 그런데 이 아내는 길가면서도 얼굴 잘생긴 남자 보면서 그쪽으로 눈길이 갑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남편 보는데서 버젓이 자기감정 따라서 가는 겁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 왔던 말 던 채팅하던 것 계속하는 여자들이 세상에는 많이 나타났습니다.

남편이 보는 데서는 하다가도 중단하고 들키면 부끄러워하고 이런 기본적인 예의가 남아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면 말세가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꼭 그렇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주시는 것으로 살면서도 여차하면 세상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주어진 시간을 한 푼이라도 더 버는 데만, 신경을 쓰고 번 것 가지고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즐길 것인지만 신경을 쓰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하나님의 눈에 벗어난 삶을 쉬이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가, 칭송, 영광을 얻기 위해서 우리를 지으신 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ꡐ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ꡑ이라니까‘성경이 좀 심하네’그런 생각이 듭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라니” 하고 시큰둥하게 여기지 말고 왜 그렇게 말하는지 한번 자신의 삶을 지금 돌이켜 보십시오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분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해 보셨습니까?

한 주간 살면서 여러분이 어디에 마음을 쓰고 어디에 여러분의 혼을 빼어 주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ꡐ간음하는 여자들이여ꡑ라고 호통 치는 성경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그러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사시렵니까?

3.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인정하시지요. ꡒ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됨이니라.ꡓ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만 아니라 주님 역시 동일한 경고를 합니다. ꡒ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ꡓ

화끈하게 한쪽을 사랑하고 한쪽을 미워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예배시간에 와서는 하나님이 제일입니다. 고백하고는 나가서는 눈길 끄는 데로 시선을 팔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처음 느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될 분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런 일에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설교 시작할 때 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고 부르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 진리를 알기 위해서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이라고 제가 구별해서 부릅니다. 왜요? 교회를 나가면 사람들이 자기가 신자라고 생각을 해요 찬송 몇 개 배우고 예배에 분위기 흩트리지 않고 따라 갈 수 있는 정도 되면 나도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본인만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도 그렇게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더운 여름도 함께 지내봐야 되고 추운 겨울도 같이 한번 보내봐야 됩니다. 시간이 흘러봐야 사람을 알 수 있어요.

오자마자 석 달도 안 되어서 집사 주는 이런 풍조가 여러분의 영혼을 위험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 집사 되어서 살다가 암이라도 걸려 보십시오. 자기가 믿고 사랑하며 섬기기로 했던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밉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가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집사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갈 때는 종합 보험 드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고 나갔는데 암이 걸려서 죽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다고 생각이 들 때 배신당한 느낌이고 하나님이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주스럽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서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첫사랑을 경험해야 될 사람이 교회 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분들 있습니다. 그 사랑을 처음 경험했을 때에 감격했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기억으로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와도 그냥 권투 선수 의무 방어전 하듯이 나와서 앉아 있는 거지 한 말씀 한 말씀 꼭 들어야 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야장천 사시절 설교만 시작되었다면 5분도 안되어서 졸고 있다고요. 지난 8년 동안 계속 했으면 이제는 자신의 영적상태를 돌아봐야 됩니다. 밥상 갖다 놓았는데 밥상 앞에서 졸고 있으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람 아닙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지칠 때도 있고 교회와도 졸음 올 때 왜 없겠습니까? 난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에 어느 예배에 정근두 목사 말고 16명 설교 하는 사람 또 있지 않습니까?  누가 설교자든 상관없이 졸고 있는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적당하게 예배 시간 다 되어서 나오고 일이 있으면 빠져 버리고 이것은 사랑이 식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연애 안 해 봤습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 데이트 약속 해 놓고 그렇게 주야장천 지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뭐 바쁜 일 있다고 만나기로 해 놓고 그냥 안 가버리고 바람 맞추고 그것은 아예 갈라서기로 마음먹은 것이지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절대 그런 짓 안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니까요 우리 하나님 사랑을 회복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매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세상이 안타깝게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흠모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형국이 참 염려스럽고 걱정스럽고 그 길을 쫓아가는 인생들이 불쌍하게 느껴져야 정상적입니다.

우리의 소속이 분명해지면 우리가 세상하고 어깨동무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확실하게 입장이 정해지면 지나가던 총각마다 그렇게 여러 번 쳐다보지 않습니다. ‘누구 여자다’라고 딱 찍혀 버리면 그렇게 사방에서 유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그런 사람이 있기도 해요. 골키퍼 세워 놓았다고 축구 못 차냐? 이러면서 있다 그래도 대쉬 못하는 사람 없지 않아 있지요.

우리의 태도가 희미하면 세상은 우리를 더 유혹하려고 들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면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일도 없고, 세상이 우리를 사랑할 일도 없습니다. 세상은 오히려 우리를 미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은 삶을 어떻게 사시렵니까?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정신없이 지금껏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사시겠습니까?  남은 해도 그렇게 살고 남은 인생 그렇게 살다가 끝내시렵니까?  세상의 눈치를 살피면서 신앙생활 한번 하는 것도 신앙고백도 한번 분명하게 하지 못하고 그렇게 인생을 다 보내버리시렵니까? 늘 세상 친구들처럼 되지 못해서 한숨쉬면서 부러워하고만 살 겁니까?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 유혹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가도 세상에 유혹이 들리기도 하고 눈앞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물며 우리의 마음이 흩트려 졌으면 얼마나 유혹 당하기 쉽겠습니까?

여자가 유혹을 당해서 러브호텔로 같이 들어 갈 때는 나올 때부터 마음이 반쯤은 허물어졌던 거지요 확실하게 태도를 결정해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 싶어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기로”고의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고 하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려고 발버둥 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세상과 동화되어 갈려는 강열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신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요 택함 받은 신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물질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신없이 돈벌어서 헌금 팡팡 하면은 하나님이 그냥 “꾸벅” 해 가지고 여러분만 쳐다보고 여러분만 복 주려고 하는 분이신 줄 압니까? 성경의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다” 내가 정성을 쏟는 만큼 따낸다고 생각하니까 뭐 온갖 일들을 다 하지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신앙의 정조도 없이 어울려 다니면서 말은 잘합니다. 내가 전도하려고 그런다고 그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신다니까요? 여러분의 속  마음을 아신다니까요. “입 벌려봐” 그렇게 안 해도 안다니까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ꡒ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ꡓ 여러분이 사랑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렇게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사랑하는 부모 자식지간에는 한 달에  얼마를  송금하느냐 액수에 따라서 평가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을 얼마나 귀히 여기면서 존경하며 사는 지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인격적인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연보액수가 먼저가 아닙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사실 이런 말을 하기도 겁나요. 사람은 모두가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돈 액수는 중요하지가 않다”라고 그러더라 그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가보세요. 마음이 먼저가면 무엇이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교회서 한번 봉사하러 나오라고 그러면 나올까말까 엄청 따지잖아요. 고민하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부모로서 여러분이 필요하다면 여러분이 고민하고 나갑니까? 바로 쫓아 나가잖아요. 전화 받자마자 바로 나가잖아요. 택시 타는데 가슴이 뛰어 어쩔 줄 모르고 달려가잖아요. 그 애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내가 가야 될까 말아야 될까. 김 집사는 갈까 말까 이것 따져 가지고 내가 갈까 말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사랑이 한참 식은 이야기지요.

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헌금 십 만원 백 만원 하면 평생토록 안 잊어버릴 만큼 큰일처럼 생각 돼요 그렇죠? 무슨 큰 실수나 한 것처럼 여기지만 여러분 자녀를 사랑하면 어떻게 해요 한 달에 몇 십 만원씩 들어가는 것도 아깝지 않지요? 등록금 입학금해서 몇 백 만원 그것도 없어서 못 줄지언정 주는 것이 아까워하는 부모는 없지 않습니까? 사랑은 그런 차이를 만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지 거기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존경해야 그게 예우가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울산 시장 취급하면 대통령이 기뻐 할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든지 나는 주의  군사 되어 충성을 맹세하기를 주께서는 기대 하십니다.

한 푼을 드릴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어도 주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십일조 못 내었다고 세금 못 낸 것처럼 하나님께서 언제 추징금 때립니까?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금 제대로 안 하다가 한번 당하지” 하며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국세청장하고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모든 율법의 요구에서부터 해방 시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다 지불했다” 내가 저희 몫을 다 청산했다고 하시며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보답하는 양으로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큰 축복을 따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남편 되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끔찍이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외아들까지 십자가에서 포기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곁눈질하면 하나님 마음이 섭하지요.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여기 새 신랑도 앉아 있고 저기 30년 40년 함께 산 분도 있지만 어떤 남편이 세상에 아내가 하루 세끼 밥만 해주면 나는 아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그런 너그러운 남편이 있습니까? 질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적인 헌신입니다. 99%의 헌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헌신 그것을 성도인 여러분들에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오늘처럼 교회에 나오셨고 오셔서 헌금도 하고 찬양도하고 기도도 하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 못지않게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잊어버리고 우리를 향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던 그 사랑으로 그 사랑이 반응하는 자기 백성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마음에 가장 귀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드리세요. 기도하고 성경 읽고 하는 일들 기본적인 일부터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맛있는 것 있다고 그냥 먹지 않습니다. 감사기도 하고 먹습니다. 피곤하다고 그냥 눈감고 자지 않습니다. 기도하고 잡니다. 일어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일들 아닙니까?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사시려고 생각합니까? 세상에 정을 쏟고 살아가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을 드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남편 되신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극하게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향해 곁눈질하는 여러분을 향해서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정을 세상에 쏟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바치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한 주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