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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인정할때 (마 10: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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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제가 어렸을 때 저희 가정은 참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회사를 그만 두시고 자전거를 타시면서 생선을 파셨는데 학교친구들하고 집으로 오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봤는데 일부러 외면하고 그냥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전거 타시고 생선 파는 모습이 창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해도 아버지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은 이런 적 없으십니까? 여러분은 부끄러워 다른 사람을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다시 한번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정말 대단한 결심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정말 주님과 함께 죽더라도 절대 부인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 주님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부인한 것 뿐 아니라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까? 그것은 지금 당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잡히면 자기도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오늘도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심을 그가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이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몸과 자기가 잡히면 위기를 당할 수 있다는 것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니엘의 3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느브갓네살 왕이 칙령을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느브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불에 던진다는 칙령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기들의 신을 부인하고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조서가 꾸며졌습니다. 그리고 느브삿네살 왕이 설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그들은 하나님이 건져내실 것을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시인하였습니다.

그들이 풀무 불 앞에서도 여호와를 시인하며 금신상에 절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는다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부인하지 않는 그들과 계셨습니다. 분명히 풀무 불에는 세 사람이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풀무 불에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시인하며 살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사람들 앞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시인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시인하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직장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동창 모임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동료들 앞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시인하고 있습니까?

시인한다는 것은 내가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까? 어디를 가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십니까?

자영업 하는 분들은 조금 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좀 사회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회사에서 믿지 않는 사장님과 또 믿지 않는 거래처 사람들과 일하면서 주님을 시인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서마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로마로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집행관이 말합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 그러나 그는 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80년 평생 주님은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폴리갑은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영화를 통하여 주기철 목사님의 일생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주목사님은 순교을 당하면서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금도 모슬렘권에서는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할 때 그들은 사회로부터 보장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정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슬렘권에서 정말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순교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걸고 주님을 시인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굳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까봐 숨기고 있지 않습니까?
평범하고 쉽게 살고 싶은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 신경이 많이 쓰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손해를 볼까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은 유승준이 군 입대하는 문제 때문에 별로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지만 그가 인기 있을 때 인터뷰하면서 ‘나는 엉터리로 살았습니다. 나쁜 짓도 많이 했습니다.’라고 자기가 잘못 살았던 것을 뉘우치면서 리포터가 “그럼 어떻게 해서 달라졌습니까?”라고 묻는 물음에 그는 서슴없이 “예 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부터 달라졌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시간만 있으면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유승준을 음악 전도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은연중에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금메달을 딴 이원희 선수는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멋지게 방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역도의 은메달을 딴 장미란 선수도 그렇고 탁구에서도 그렇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는 것을 세계 속에 알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 학생들은 교회에서 밥 먹을 때 기도하는 것처럼 학교에서 급식할 때도 분명하게 기도하고 밥 먹는 것입니다. 고개만 숙였다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식사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 볼 때도 시험지 놓고 꼭 기도하고 하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 

친구들과 사귈 때에도 나는 예수 믿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회사에 출근하면 기도하고 시작하십시오.
술좌석이나 유흥업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특별히 뇌물을 받을 때 분명히 거절하면서 그 이유가 바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불의한 일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주부들은 시장 가셔서 너무 깍지 마십시오. 너무 인색하게 하지 마십시오. 
어떤 집사님은 아파트 앞에 매일 과일 아저씨가 오셔서 과일을 파시는데 그분에게 과일을 사시면서 제일 좋은 골라서 담는 것이 아니고 좋지 않은 과일만 골라서 담아 그것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왜 저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들하고 다를까 생각하다가 결국은 이분이 예수 믿는 사실을 알고 과일 장사아저씨가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속에서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얼마든지 주님을 시인할 수 있는 방법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인정하는 것은 없습니다.
동창모임에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간증하는 것입니다. 계모임에서 돈만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주님을 인정하는 삶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입니까? 만약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서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주님을 시인한다면 주님께도 인정받고 또한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안녕을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배반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을 인정하시고 또한 사람들도 여러분을 인정할 것입니다.

폴리갑의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80년 평생 주님은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그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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