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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발 아래 여인 되자!(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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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인식 목사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베다니(요 11:1, 12:1) 마을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이들의 오빠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방문하셔서 살려 주신 적이 있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분주하게 음식준비에 바빴습니다.
마르다는 “여 주인”이라는 뜻인데, 여주인 답게 부주하게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도와 달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가서 동생보고 언니를 도와주라고 명령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① 이미 부탁하였는데 동생이 말을 안 들었을런지도 모릅니다.
② 자기가 이렇게 정성껏 주님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10:41-42절에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많은 자리가운데 예수님의 발 아래를 자기가 있을 곳으로 선택하였습니다.
  발 아래 앉은 그 자리를 주님은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결코 빼앗길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후부터 마리아는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아래 있는 기사가 성경에 모두 세 번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울었습니다.
  요 11:32절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2)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을 때 하필이면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요 12: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3) 본문입니다.
  눅 10:39절에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리아는 발아래 여인이었습니다.

  발 아래 여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1. 상대방 중심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언니 마르다와 동생 마리아는 대조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 하시는 분임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을 주님은 더 기뻐하심을 알았습니다.

  마르다는 자기 중심의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상대방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르다는 부엌의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발아래 사람이었습니다.

  발 아래 앉았다는 첫 인상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비굴할 정도의 순종입니다.
순종을 넘어 복종까지 가는 자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다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예화> 원숭이와 물고기가 같이 친하게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비가 몹시 내려서 온 땅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원숭이도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간신히 나무위에 올라가 살았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 쉰 원숭이는 자기 친구 물고기가 물속에서 얼마나 고생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건져서 나무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고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에게 자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상대방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자세를 마르다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언제나, 상대방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예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때 자기 아들을 출정시켰는데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영국 여왕의 자리를 이용해서 안 보낼수도 있었고, 혹 보내더라도 안전한 보직으로 뺄수도 있었지만, 최전방 총받이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위정자들과 비교하여 봅시다.)
왜 그렇게 귀한 아들을 가장 전쟁이 맹렬할 때 보냈느냐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여왕은 대답하였습니다.
“내 아들이 귀하면, 남의 아들도 귀하지 않겠습니까?”
  참 존경할만한 인물이 아닙니까?

  예화> 청일 전쟁때, 4성 장군이던 일본의 노기장군은 두 아들을 모두 제일 위험한 직책인 척후병으로 보내어 전사하게 하였습니다.  맏아들이 전사하자 둘째 아들까지 전쟁터에 보내려 할 때 부하들이 적극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귀하면, 남의 아들도 귀하지 않는가?”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여왕이나 장군이 있는 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나라가 됩니다.
(남의 사정을 알아보지도않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2. 헌신의 사람을 말합니다.
  발아래 사람이란, 헌신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수선을 떨었지만, 결과는 밥 한끼 대접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아래 붓게 됩니다. 
  빈 수레 소리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물은 소리없이 흐르는데, 또랑물은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는 법입니다.
  마르다는 떠벌리면서 요란스럽게 예수님을 대접한 것 같지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접한 것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엄청난 사랑의 헌신이었습니다.
  마가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막 14:3절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붓는 것을 본 가륫 유다가 말했습니다.
  막 14:5절에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줄수 있었겠도다”

  3백 데나리온은 1,500만원 정도되는 액수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기 때문입니다.
  소리없이 마리아는 헌신하였습니다.
말없이 일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마리아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막 14:6-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발아래 여인이란 말없이 봉사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화> 언젠가부터 119봉사상이 수여되었습니다.
수년 전에 상을 받은 사람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한 집에 불이 났습니다.
소방관들이 불을 끄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불 자동차 싸이렌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건물속에 갇혀 있는 사람, 창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소방관들이 구하여 내느라고 요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다리차를 가진 사람이 와서 창가에 매달려 구조를 요청하는 이들을 4명이나 구하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소방관들은 이 사람을 백방으로 찾아내어 119봉사상을 주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4명이나 살리고 왜 말없이 사라졌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것이 왜 상받을 일입니까?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사닥다리 차가 있는데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심정입니다.
발 아래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같지만, 1,500만원 상당의 향유를 헌신할 수 있는 여인입니다.
교회에는 작은 일을 하고, 크게 떠벌이는 사람이 있고,  큰 일을 하고 겸손해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3. 겸손의 사람을 말합니다.
  발 아래 앉았다는 첫 인상은 역시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 아래 앉고 싶겠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발 아래가 자기 자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던 어느 날 당당한 모습으로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막 10:28절에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 데 보상이 무엇이냐는 교만한 물음이었습니다.

  막 10:29-30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보상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1,500만원 상당의 향유를 붓고도 보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겸손이 그의 특징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랑만 있는 여인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할수 있기에 발 아래 앉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명령만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니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교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자기 과시가 항상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발 아래 여인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4. 한가지 일만 선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식탁에 무엇을 차릴까 염려하지 말라, 내가 이 집에 온 것을 짐으로 여기지 말라,
  내게는 한 가지면 족하니라”
  마르다는 음식을 여러 가지 준비하느라고 마음까지 바빴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지면 족하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듣는 일 한 가지만 하였씁니다.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편을 잘 선택하였습니다.

  예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우톤은 자기 일에 너무 열중하느라고 다른 일에는 너무나 실수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인류를 빛낸 이들은 “한 가지 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는 수많은 조소에도 불구하고 방주 만드는 일을 120년간 지속한 한 가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유> 만일 수백평에 가득찬 기계실에 들어가 처음으로 근무하여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여 보십시다.
  그 많은 기계의 성능을 일일이 다 알려면 수십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많은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데는 오직 한가지면 족합니다.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것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한 가지만 듣고 있으면, 그 안에 모든 원리가 다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① 상대방 중심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② 헌신의 사람을 말합니다.
  ③ 겸손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④ 한가지 일만 선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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