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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심이 아니다 (애 3: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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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재신 목사
 
  눈물의 선지자 고독의 선지라라 불리는 예례미아는 b.c 646년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이상의 오랜 시간을 독신으로 살며 예언 사역을 수행하다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당한 이듬해인 bc 585년(?) 경 애굽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BC 586년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망하였습니다.
  400년 동안 웅장하게 서있던 솔론몬 성전은 불탔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당시 유대의 왕 시드기야는 바벨론 군인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힌 채로 비참하게 쇠사슬에 묵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러한 비극이 왜 왔습니까?
  1:8절에 보면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하였기 때문” 이라고 하였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이 그렇게 죄를 짓더니 마침내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비극적인 파멸을 막아 보려고 애쓴 40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국 유다를 구하지 못한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 1:1절에 보면 이러한 예레미아 선지자의 슬픔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예레미아는 훼파된 성전 뜰에 앉아 울고 또 울었습니다.
  무너진 왕궁 터를 바라보며 사라진 왕국의 영화를 회고하며 비탄에 젖었습니다. 폐허가 된 적막한 예루살렘 거리를 거닐면서 뿔뿔이 흩어진 민족의 고난을 기억하고 오열하고 있습니다.
  애 2:11절에 보면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아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가 부른 눈물의 노래인 애가서를 “예레미아의 눈물”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원래 “‘애가” 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그 제목이 “에카”입니다. 에카라는 말은 “아! 얼나마...”라는 뜻으로 비통과 놀람을 나타내는 감탄사입니다.
  후일에 유대의 랍비들은 애가의 제목을 “ 키노드”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키노드란 원래 장례식에서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사용된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가입니다. 슬픔의 노래입니다.
 
  나라가 망한 백성들의 고초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 뿐 아니라 주권을 뺏앗겼습니다. 민족의 장래는 암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폐허가 된 성전터와 뿔뿔이 흩어진 민족의 비극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빛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노래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아 선지자의 절망과 백성들의 비통함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에게 임한 고통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애 3:32-3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본심이 아니시면서 성도들을 고생하게 하시면 근심하게 하실까요?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생하게 하며 근심하게 하실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징계 때문에 성도에게 근심과 고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멸망의 길로 가는데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책망합니다. 안 들으면 때립니다.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해야합니다. 

  야구와 골프를 통해서 한국을 빛낸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는 다면 여러분은 모두 박찬호와 박세리라고 말할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박세리 선수의 경우 처음 국내의 어떤 재벌 회사에서 후원을 책임지고 세계적인 프로 골퍼에게 코치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코치는 박세리를 때리거나 함부로 야단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훈련이 잘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리의 아버지는 세리에게 골프를 가르치면서 때리기도 하고 야단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엄격하고 강하게 훈련을 시켰는지 비가 오는 날에도 필드에 나가서 연습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세리가 왜 때려요 왜 못살게 구는 거예요” 라고 반항하며 대들었다면 오늘날의 박세리는 없을 것입니다.
  우승하는 순간 부녀가 껴안고 울었습니다.
  자기 딸이니까 때릴 수 있었고 야단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녀 관계였기에 눈물이 쏟아지는 호통과 매에도 정이 끊어지지 않았고 서로 껴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고 고통과 근심을 주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심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멸망하거나 고통과 근심 속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잘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과 아픔 속에서 있다면 이 진리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처하고 있는 근심 속에서 이 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일찍이 이런 진리를 발견한 시편 기자는 시 119:67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무엇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을 까요?
  주의 율례와 법도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교만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는 인격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은 심판의 성격을 띤 고난이 아닙니다. 잘되라고 때리는 사랑의 채찍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사랑의 채찍을 맞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버린 자식은 징계하지 않습니다. 망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는 망하면 안되기 때문에 채찍을 들고 징계의 회초리를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범죄 할 때 사랑의 채찍을 드십니다. 그러나 그 채찍이 임할 때 고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채찍의 고난을 받기도합니다.
 
  잠 17:3절에 보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십니까?
  연단을 받을 때 고통이 옵니다. 풀무불의 뜨거움이 금이나 은같은 쇠봍이를 연단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연단하는 것도 엄청나게 뜨겁고 고통스러울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구겨지고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육체의 질병이나 가진 재물이나 모든 것 다 잃어버리는 엄청난 고통이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연단합니다.
  잘 연단을 받으면 유익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에게 임한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3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주적인 섭리로부터 선지자는 이런 결론을 이끌어 냈습니다.
  “어찌 원망하랴” 포로로 고통 받고 있는 자들은 고통 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에 대하여도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받아야 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기 때문에 불평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되면 오히려 고난이 와도 감사하게 되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통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역경이 오거든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아시기 바람니다.
  히 12:11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구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로 인한 괴로움은 그것을 인내와 겸손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를 보다 깊고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되기는커녕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바른 길입니다.
  고통은 종종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의 아들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하시는 은혜스러운 수단인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통을 줄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 양치기가 매일 연한 풀을 가지고 양 우리로 들어갔습니다.
  한 주민이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 했습니다. 양을 들이나 산으로 몰고 나가서 풀을 뜯기지 않고 힘들게 풀을 뜯어다가 먹이는 것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가보니 우리에는 다리가 부러진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치기는 그 양에게 뜯어온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왜 다리가 부러졌습니까"라고 물으니 양치기는 "제가 일부러 부러뜨렸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상해 다시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처럼 양을 사랑하는 목자를 나는 본 적이 없는 데요?"
  "이 양은 자꾸만 길을 잃어 버립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자꾸만 슬슬 도망하곤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다리를 부러뜨려서 다른 곳으로 가지 못 하게 하고 매일 풀을 주면서 쓰다듬어 주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이 양이 저는 목자인 나를 알아볼 때까지 이렇게 할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은혜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꾸만 죄악으로 달아나는 인생들에게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안에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단지 고통이 온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깊은 뜻 본심을 이해하고 그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드릴때 고통도 물러갈 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이 여러분에게 열릴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오히려 복주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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