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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이유 (요 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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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영일 목사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1. 그 말 한마디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발끈하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섰습니자.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변명하듯이 대꾸를 하신 것이 바로 17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런데 오히려 이 말이 새로운 도화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과 미움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18절에 즉시 그 반응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사랑은 모든 말을 이해토록 만들지만 미움은 말 한마디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도록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사랑하며 살도록 애써야 합니다. 사랑은 더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합니다. 미움은 더 이상의 대화를 하지 못하도록 조심케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맙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그러나 애매히 미움을 받고 오해를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가 그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애매히 고난을 받고 신앙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우리 교회의 신축을 두고 부지 주변의 주민들 일부가 결사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교회가 제대로 구실을 잘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텐데. 범어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라면 서로 자기들 옆으로 와서 지으라고 할텐데 . . . 아무튼 교회가 문제야!” 혹 여러분! 우리 성도 중에 이런 생각에 동조하실 분이 계십니까? 사실 얼핏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그것은 억지입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이상, 다종교 다문화의 사회에서는 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과 상관없이 교회는 “비방을 받는 표적”입니다. 누가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탄생 기록에 보면,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이 예수님을 내려다보며 “비방 받는 표적으로 세움을 입은 아이”(눅 2:34)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 범어교회는 백년 가까이 이 곳에 있으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나쁜 짓 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고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삶의 행복을 나누어 준 교회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는 우리 대구를 사랑하며 대구를 위한 교회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새 성전을 통한 우리의 비젼은 분명합니다. 예배당 및 모든 기반 시설을 통하여 우리는 대구를 섬기는 열린 공간으로, 예배 공간, 교육 공간, 문화 공간, 휴식 공간, 친교의 공간, 깨끗하고 아름다운 녹지 공간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불법을 저지르는 나쁜 교회인 것처럼 위축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분명 공사 중에 일어나는 소음과 주민 불편은 있습니다. 그런 점은 건축 후 우리교회가 그들을 위한 공간으로 내어주면 그 피해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당당하게 그리고 겸손하고 부드럽게, 꿈과 환상을 가지고 기도에 전심전력합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2. 그 말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

18절을 다시 봅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그 말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려고 한 신성 모독 죄로 여겨진 것입니다. 아버지란 말로 예수님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신 것인데, 즉 인간의 가족 관계처럼 친밀함을, 나눌 수 없고 헤어질 수 없는 가족, 그것은 곧 하나됨을 나타내는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은 우리에겐 복음입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셔서 죄를 싫어하시며 죄인은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을 꾸중하시고 때리긴 하셔도 용서하시어 품에 안아주시고 쓰다듬어주시는 아버지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우리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두는 가족이 되어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열방은 더 이상 민족, 언어, 문화, 피부 색깔, 남녀 등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런 차이로 더 이상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서로 갈등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한 피 받아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시도 바울은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런데 유대인들은 즉시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한 존재’라고 주장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계급은 유대인들의 익숙한 개념입니다. 출애굽 시대에 만들어진 십 부장, 오십 부장, 백 부장, 천 부장 등은 당시 사회의 질서를 잡았던 통치 지혜였습니다. 뿐 아니라 제사장의 종교 직임에도 계급이 있었고, 직능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계급은 질서와 효율성을 위하여 매우 필요한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의 가치를 메겨버려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가치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등합니다. 그의 지위나 계급과 상관없이 동등합니다. 단지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 계약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위와 계급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단지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거나 큰일을 한 사람을 존중하고 치하하는 일은 좋습니다. 마치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말(아버지)에 과민반응을 한 것을 볼 때 그들에겐 계급이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런 사람과 사회는 병든 것입니다. 순수하지 못하고 건강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특히 종교가 계급화 되어 그 계급이 질서와 기능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면, 그 종교는 부패되어 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사도가 있었고 감독, 장로와 집사, 교사 등의 직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공동체를 위한 질서와 직능이었지, 실제로 그들은 서로 부르기를 ‘아들아!’ ‘형제여’ ‘자매여’ 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이런 호칭이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영적으로 건강하고 사랑과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염려와 달리 정반대로 사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3.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치의 신비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19-23절)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시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아버지 하나님의 기이한 일까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곧 심판의 권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산 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죽을 죄인을 살려 구원하시는 권능이 있음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구원의 권능을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두 맡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공경)하듯이 예수님께도 예배(공경)하는 것입니다. 예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일치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회가 유대교와 다른 것이고 이슬람교와 다른 것입니다.

유대교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배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고 예배합니다. 이슬람교는 알라(여호와)에게 예배 하지만 예수님을 지우고 예배합니다. 그들 예배 안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치의 신비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신비스러운 예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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