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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바나바 (행 9: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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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 목사

부활절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얻음은 바로 이 부활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면 살아가는 낙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새로운 생명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 천국을 소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 저들의 삶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지난 1월 26일과 29일부터 바나바 사역 훈련을 시작하여 2주 전에 제 1 기 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13명이 시작하여 9명이 수료하게 되었는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바나바의 삶에 대해 수 차례 그의 삶에 대한 교훈을 나누었지만 오늘 이 신앙의 선배에 대하여 다시 상고하면서 우리 교회 모든 지체들이 바나바로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지도자는 군주형이나 카리스마형, 섬기는 형 등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 가운데 바나바는 섬기는 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필요 중의 하나가 이런 지도자요, 그런 대표적인 성경의 한 지도자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왜 바나바를 말하는가? 바나바의 삶을 통해 얻게되는 지도자형은 종과 같이 다른 사람을 잘 섬길 수 있는 지도자입니다.

바나바 사역자 훈련에서 사용된 교재를 통해 그는 누구였는지,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의 바나바 됨을 위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바나바는 어떤 사람인가?

바나바는 본명보다 별명이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보다 교회에서 신자들과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신앙과 삶의 결과로 사도들이 지어준 이름이(행4:36) 더 알려진 신앙의 인물입니다. 호세아는 모세가 지어준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시몬은 주님이 지어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마 16:17-18)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사울은 자기가 예수를 믿은 후에 변화되고 선교 여행을 다니며 얻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행13:9) 더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해서 사도행전 몇 곳에서 이 바나바라는 인물을 접근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나바란 인물에 대한 최초의 소개는 사도행전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4: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 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12지파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혈통의 사람들인 레위 지파에 속한 그는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인 구브로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출신지는 구브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곳은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라는 섬입니다.
바울 당시 초대교회 때만 해도 사이프러스는 아주 부유한 도서 지방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광산이 있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었으며 기름이 났고 벌꿀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구브로 출신이라고 하면 부자로구나 하는 연상을 할 정도로 구브로는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섬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방 출신이었던 바나바는 아마도 부친의 배경을 타고난, 상당히 넉넉한 재산을 가진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본명은 본명은 요셉인데, 요셉은 히브리 이름으로 그 뜻은 '더함'입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별명을 얻습니다. '바나바'는 아람어의 이름으로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 또는 '선지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바나바'의 뜻을 '권위자'로 해석하였습니다. '권위자'란 '위로하는 자'(consolation), '칭찬하는 자'(exhortation)라는 뜻입니다.
바나바에게 지어진 이름은 바나바의 교회 생활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한 좋은 증거가 됩니다. 바나바는 사도도 아니었고, 교회의 집사도 아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평신도에게 신앙과 삶을 나타내는 별명을 지어준 경우는 바나바 외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별명은 무엇입니까?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 쉽게 오늘의 상황에 적합한 말로 바꾸면 이 사람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격려해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인생의 용기를 얻습니다. 새 힘을 얻습니다.

그는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그가 어떤 일을 합니까?
마지막 구절을 보면 자기에게 있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헌납하는 일을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계속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항상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재원도 필요했습니다.
지도자들이 곤고한 상태 속에서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를 토론하고 있을 때, 자기 재산을 팔아 헌납했던 바나바의 헌신은 교회를 향한 얼마나 커다란 격려였겠습니까?
"이렇게 써보십시오"하고 지정한 것이 아니다.
지정헌금도 필요하지만 내가 쓰기를 바라는 방향대로 내면 그 헌금은 아직도 내 돈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데, 하나님이 필요하신 대로 그것이 쓰여져야 합니다.
절실한 교회의 필요와 하나님 나라의 필요성을 보고 서슴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 밭을 내놓았던 이 바나바의 헌신은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서 성장하고 있었던 초대교회에 얼마나 큰 격려요 용기요 위로요 힘이 되었겠습니까?
위로의 아들, 격려자라는 별명은 이 사람에게 참으로 합당한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2. 바나바의 인격

성경이 말씀하는 바나바는 다음과 같은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나바의 인격과 그 행한 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위로의 사람 (행4:30)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사도들이 지어준 [바나바]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바나바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는 나라가 없는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였고, 더욱이 모세의 율법과 유전의 계율로 짓눌린 예루살렘의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협박과 위협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초대 교회의 상황 아래에서 바나바의 눈과 마음은 주를 믿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것이었습니다.

2) 착한 사람(행 11:24)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성경은 바나바를 "착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서 착한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은 바나바 한 사람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스스로는 착하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사람이나 문제를 상대했을 때 그 반응이 악하다 또는 착하다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 하고 칭찬받아야 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3) 중보자(행 9:27)

바나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중보자였습니다. 교회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들어왔을 때 교회의 반응은 두려움과 불신이었습니다.(행11:26) 중간에 막힌 담이 두꺼웠습니다.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 박해를 일으킨 주동자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행 8:1).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 그 일을 지휘하였고(행 7:59),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하다고 여긴 사람이었습니다.(행8:1).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를 불문하고 결박하여 옥에다 넣었고 성도들을 크게 해쳤습니다.(행9:2.13). 남성 위주의 유대인 사회에서 여자를 끌어다 감옥에 넣는다는 것은 악랄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핍박은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고,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붙잡아 결박하여 예루살렘에 데려오려고 대 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청하여 받았습니다.(행9:1-2) 스스로 고백한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였습니다.(갈1:13). 이러한 사울이 교회에 들어오니 제지들과 성도들이 두려움과 의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바나바는 두려워하고 믿지 않는 제자들과 사울 사이에서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길에서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 전한 것을 말하였습니다.(행9:27). 결국 바나바의 중보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한 가족이 되었고,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함께 살고 같이 교제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나바의 중보는 화목의 좋은 결실을 보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화목은 바나바로 인하여 얻어진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사역이 있은 후에 성경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행9: 31)라고 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숨은 사역자들을 통하여 교회가 평안해진 것입니다.

4) 긍정적인 사람(행 9:26-27)

바나바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분위기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는 과거에 붙잡혀 현재를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사울이 교회에 들어 왔을 때를 생각하겠습니다. 사울이라는 새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고 거듭난 후 예루살렘으로 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두려워하며 불신하였습니다. 사울의 과거 때문입니다. 큰 핍박의 주동자 중의 하나인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많은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핍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과 의무와도 달랐습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사람의 감정과 판단 사이에서 주님의 가르침에 멀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교회에 들어와 교인들과 사귀려고 교제의 악수를 내미는데 거절한 것입니다.
바나바도 사도들이나 성도들을 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으로 비난하거나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갖추지 못한 부족한 면을 보고 뒤를 돌아 부정적인 자리에 서서 사람을 판단하거나 불평하거나 탓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가 나서서 부족하게 보이는 것을 스스로 채우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보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으로 나누입니다. 사람이 부정적인 면에서 문제를 보면 부정적인대로 문제에는 상당한 이유와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똑같은 문제인데도 귀하고 아름답고 감사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컵의 물을 보는데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문제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보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분쟁하는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감사와 확신을 잃지 않은 긍정적인 눈을 가졌습니다.(고전1:4-8). 가나안을 정탐한 열 두 명의 정탐군들은 똑같은 것을 똑같은 날에 보고 왔는데도 부정적인 사람들과 긍정적인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긍정적인 사람인 바나바를 통하여 사울을 얻게 피었고, 교회는 바나바로 인하여 더 커다란 그릇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사울을 영접한 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을 과거의 사실로 판단하지 않는 넓어지는 마음과 신앙의 폭을 갖게 되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바나바의 긍정적인 자세는

첫째로, 사울을 두려워하며 믿지 않는 사도들에게 사울을 데리고 가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둘째로, 사울에게 일어난 일을 사도들에게 대변하여 화목시키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좋은 일, 화목의 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5) 동역하는 사람 (행 11:25-26)

행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자기 혼자 독점하지 않고 언제나 함께 나누어 동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명예나 자랑보다는 하나님의 영장에 집중되어 함께 동역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협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 바나바는 사울을 생각하고 사울을 찾아가 사울을 데려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후에 사울이 다른 사람과 동역하는 일은 바나바를 통해 배운 결과입니다.

동역하는 사람은

(1)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역하는 사람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열립니다. 자기 욕심에 빠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는 눈에 소경이 됩니다.

(2) 때를 분별하는 지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동역하는 마음을 가지면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할 때를 적시에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동역하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며 자기를 회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동역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회생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동역자가 붙게 되는 것입니다.

(4) 일을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누어서 하는 사람이 됩니다. 몸에 각기 다른 지체가 여럿이 있고 이 지체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듯이 하나님의 일을 함께 나누어 하는 사람이 됩니다. 눈과 귀의 기능과 역할이 다르듯이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갖는 장점과 특색과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5) 동역자를 용납하는 사람입니다.

동역하는 사람은 자기의 입장에서 상대방이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게 됩니다. '그럴 수 있을까'하는 것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러한 사람됨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위대성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가정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우리 민족을 살리는 사람,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리고 더 많은 사람을 세우기 위하여, 아니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그런 바나바는 어디 있습니까?

이런 인물의 대표가 바로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극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예수님.....
여러분과 제가 바로 그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라면,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 민족 안에서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겠습니까?
지금은 바나바를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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