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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금과 빛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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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노강국 목사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에 김선희 학생이 오셨습니다. 이로써 우리 교회에는 김선희 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모두 세 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 기분이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집권 여당의 의장 되시는 분이 “이부영(李富榮)”이란 분인데, 이 분과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은 분이 중국에 있다고 합니다. 중국 발음으로 “리투롱”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이부영 씨와는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생년월일도 1942년 9월 26일생으로 똑같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부영 씨는 새벽 5시에 태어났는데, 이 리투롱 씨는 새벽 4시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리투롱 씨는 현재 중국의 체육 총국의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원래는 탁구 선수였다고 합니다. 1972년도 미국의 닉슨(Nixon)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하기 전에 이른바 “핑퐁 외교”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이 서로 친해지기 시작할 때, 미국을 순회하면서 탁구 시합을 했던 장본인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이부영 씨는 약 5년 전에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한번 만났고,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아 게임에서도 만났다고 합니다. 이번에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서 또 이분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우연치고는 아주 희한한 우연이라고 여겨집니다. 며칠 전, 인터넷을 보다가, 한국의 MBC TV에서 새로운 연속극을 시작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그 광고를 보면서 깜짝 놀랐는데, 그건 그 연속극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강국”이란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성은 잘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별로 흔한 이름이 아니라, 이제까지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것을 보면서 등장인물을 많이 대해보았지만, 저와 같은 이름은 이제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MBC TV에서 새롭게 시작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바로 저와 같은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한국에서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 가운데,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마 내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더군요.

사실, 우리 모두도 실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이름을 주시는 것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명하신 “소금”, “빛”이란 공통된 이름을 생각해 보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름을 붙이셨는가? 그리고 이러한 이름에 합당한 모습이 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신분(identity)을 먼저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신분을 먼저 분명히 제시해 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 속에 제자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을 다른 모습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세상의 소금이 되느냐, 빛이 되느냐 하는 모습에서 바로 제자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제자다움의 모습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인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이나 빛의 역할을 생각할 때, 우리는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만 생각하다 보면, 이러한 소금과 빛의 모습을 지닌 구체적인 제자다운 모습은 그냥 지나쳐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소금과 빛의 역할을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는 데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소금의 경우, 맛을 내고,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보존해 주는 역할 그리고 빛의 경우는 밝게 해주는 역할, 따스하게 해 주는 역할을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도 이렇게 이 세상이 부패되지 않게 하고, 이 세상에 살맛을 가져다주며, 또 빛과 같이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어주고, 추운 곳은 따스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린 말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는 우리 크리스천으로서의 독특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양심적이거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습의 삶을 살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이 아니어도 이러한 일들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제자됨의 모습으로서의 소금과 빛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금과 빛의 역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자체를 가지고 볼 때, “소금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빛의 역할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는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는 말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착한 행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과연 세상의 소금이나 빛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깨닫는 데 있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독립적으로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성경의 책은 장과 절이 없었습니다. 마치 위에서 아래로 통으로 짠 옷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의 어느 내용을 따로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아서, 처음에는 장(chapters)으로 나누었고, 오랜 후에 절(verses)로 또 분류를 해 놓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편리한 점도 있지만 때로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원치 않게 본래의 뜻과는 동떨어진 해석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소금과 빛”을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도 함께 염두에 두는, 소위 문맥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해석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만 불쑥 던져놓고, 이에 따른 역할이나 행동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만 하시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그 문맥을 잘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1. 제자됨으로서의 “소금”의 역할

소금과 관련해서 예수님은 부정적인(Negative) 표현으로 간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소금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긍정적 역할보다는 “짠맛을 잃은 소금의 무용성”만을 언급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짠맛을 잃은 소금(saltless salt)”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에서 소금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러한 짠맛을 잃은 소금은 바로 “제자됨을 잃은 제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이란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의 아람어(Aram)의 뜻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소금의 짠맛을 잃었다”(to be saltless)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뜻은 “미련스럽게 말하다”(to speak stupidly)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이 짠 맛을 잃는다는 표현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인격적으로 표현한다면 “미련스럽게 혹은 우둔하게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화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소금은 화학적으로 그 짠맛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사용하신 아람어의 용법에서 본 “짠맛을 잃은 소금”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소금의 짠맛을 제자들과 연관시켜서 “제자들의 지혜(the wisdom of the disciples)”, “제자들의 선포와 설교(proclamation)”, “모든 삶에서 기꺼이 희생하려는 자세(willingness to sacrifice and their manner of living)”로 해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세기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소금처럼 기꺼이 희생되고자 하는 모습이고, 짠맛을 잃은 소금이란 물에 물탄 듯한 그러한 의미의 평범함(mediocrity)과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prattle)”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짠맛을 잃은 소금을 “소금이 벙어리가 되면(the salt become dumb)"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U. Luz, Matthew 1-7).

그러면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인 정황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너희는”이라고 제자들을 특별히 지시하였습니다. 여기서 “너희는”이라는 말은 이 앞에 있는 11절 이하의 “너희는”이라는 표현과 동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자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너희”를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 11절과 12절의 두 말씀에 “너희”라는 표현이 5번이나 나옵니다. 이 “너희”가 바로 13절 이하에서는 “소금과 빛”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제자됨으로서의 소금의 역할이란, 진리로 인해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고 핍박을 받더라도 그 현실에서 적절하고 필요한 말을 제때에 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의 삶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의 삶을 제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으로서의 제자됨의 한 구체적 적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소금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때에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2. 제자됨으로서의 “빛”의 역할

소금을 설명하실 때에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이라고 부정적으로 설명하신 주님은 빛을 설명하실 때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봅니다. 등불을 켜서 탁자 밑에 두지 않고, 높은 데에 둔다는 것이나, 산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는 표현은 바로 빛의 속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는 표현에서처럼, 착한 행실을 사람 앞에 비취는 빛의 모습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적극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이란 높은 곳에 매달려 있어야 하고, 강하게 비췰 때에 빛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과 같은 희생적인 자세를 무릅쓰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빛으로서의 적극성도 지녀야 할 줄을 압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착한 일”과 결부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착한 일”이란 어떤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도 추상적으로 착한 일을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착하다는 모습을 그저 유순한 모습으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착한 모습에는 유순한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순하다고 다 착한 모습만은 아닌 것입니다. 유순한 모습에는 우유부단한 모습도 있어서 어떤 책임회피적인 자세도 나올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의 유순한 모습을 착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착한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말씀하셨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문맥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예수님은 착한 일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연관을 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착한 행실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연결시키는 이유는 바로 착한 모습이 그저 막연한 모습이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란 표현이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경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부모님들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자녀들이 훌륭하고 잘 되고, 남들에게 칭찬받고 상 받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자녀들이 이러한 자리에 나아가면 부모된 우리들은 얼마나 기쁩니까? 뿐만 아니라, 다른 부모들도 우리들을 향해서 “자녀들을 참 잘 두셨다”고 칭찬하고 부러워하면 바로 그것이 부모로서 자녀 때문에 받는 영광이겠지요.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자녀된 우리들이 칭찬받고 상 받을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칭찬받고 상 받는 모습을 쉬운 말로 표현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 받은 모습”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한 행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복을 받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행실을 말합니다. 그러한 행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이는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복의 모습과 연관이 됩니다. 복을 받는 자리에 나아가는 착한 행실이란 바로 “슬퍼할 줄 아는 자세, 매사에 온유한 말과 행실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그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행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삶에서 실천되는 모습, 늘 평화를 염두에 두고 힘쓰는 모습”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요? 이런 모습과 행실들이 바로 복을 받는 조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때,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또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장선생님이 공부 잘한 학생들에게 상장을 줄 때, 거기에 자신의 자녀가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복을 받고자 하는 모습과 노력에는 어떤 원칙이 필요합니다. 그 원칙이 바로 오늘 본문 다음 17절부터 나오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바른 해석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로 잘 깨달아 모든 삶에서 “슬퍼할 줄 알고, 온유한 말과 행실을 지니며,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이를 위해 수고하고자 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늘 평화를 조성시키고자 힘쓰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없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 결과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유심히 공부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막연하게 내 기분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스포츠를 하더라도 게임 규칙대로 해야 되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이러한 주님의 원칙 가운데에서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빛의 역할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됨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규정해 주시면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그 속성에 합당한 자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이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하고 복된 자리에 나아가게 된 감격을 늘 잊지 말고, 소금과 빛의 그 역할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제자들을 규정하신 “소금과 빛”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그 자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받습니다. 우리들이 이 주님의 말씀을 달게 받아서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복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귀한 모습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하옵나이다. 성령께서 늘 도와주셔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원칙에 합당하게 모든 일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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