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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사랑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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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사람은 큰일을 겪으면 용기를 발휘하고 협동심을 발휘하고 또 창의성을 발휘합니다. 리처드 칼슨 박사는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큰 어려움을 당하면 가족들이 서로 합심을 합니다. 가족 중에 어려운 일이 있다, 사업에 어려움이 있다, 혹은 가정에 혼사가 있다, 개업을 한다는 이런 큰일에는 우리 가족들이 다 합심을 합니다. 그런데 사소한 것 가지고 서로 다투고 싸움합니다. 휴가를 동해를 갈까? 서해로 갈까? 이것을 가지고 서로 다툽니다. TV를 보다가 드라마를 보자, 스포츠를 보자 이것 가지고 다툽니다. 치약을 쓰는 것 가지고도 서로 다툽니다. 허리부터 잘라서 쓰면 치약을 왜 이렇게 쓰느냐 라고 주부가 한마디 합니다. 또 양말 벗어놓은 것 가지고 또 서로 다툽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 우리가 서로 다툽니다. 그런데 이 칼슨 박사님이 사소한 일을 극복하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행동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처음이란 ‘본래로’라는 의미이다

  처음 사랑이라는 이 말은 많은 의미를 포함합니다. 소위 우리가 주제로 많이 사용하는 첫 사랑이란 말인데 이 처음 사랑을 하나님이 에베소 교회에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첫 사랑의 추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사랑이라는 이 감정은 많은 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인 연구로 처음 사랑이 주는 그 감정은 사람의 감정에 한계 안에서 제일 오래 가면 3년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 평균치로 첫 사랑의 감정이 18개월 지나면 끝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훌륭한 교회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2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수고가 있었고 인내하는 교회, 이단을 척결했고 아주 부지런한 교회, 정의감이 있는 교회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왜 하나님이 에베소 교회를 보고 이 사랑 문제를 들고 나오느냐? 거기에 많은 주제가 있습니다. 믿음도 있고 희생도 있고 인내도 있고 수고도 있고 다 좋은데 처음 사랑을 버렸으므로 에베소 교회가 갖고 있는 그 장점이 퇴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으므로 네 수고와 인내와 너의 그 희생이 의미가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수고가 원망으로 바뀝니다. 인내가 원망으로 바뀝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얼마나 참고 희생합니까? 그런데 모두 만족합니까? 자식을 다 키워놓고는 ‘천하에 몹쓸 놈’이라고 자식을 향해서 원망을 퍼붓는 부모가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사랑을 담아서 수고해야 하는데 사랑을 담지 않고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부모사랑이 사랑을 담지 않으면 그 부모사랑은 원망과 불평으로 바뀝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네가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다 구제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위대성이 여기 나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에베소 교회가 훌륭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교만한 교회가 되었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관점입니다.

  사랑으로 개혁해야

  요즘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개혁’이라는 말입니다. 교계에도, 기업에도, 정부도 모든 분야에 개혁, 개혁합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포인트는 사랑없는 개혁은 절대 성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남의 잘못을 비판할 때도 사랑을 담아서 비판하세요. 사랑없는 비판은 무익합니다. 비판하는 나도 망가지고, 비판받는 남도 망가집니다. 우리가 자식을 향하여 벌을 주더라도 사랑을 담아서 벌을 주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와 분열로 가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사님들을 비교적 자주 만납니다. 우리 교단의 두 기구가 있는데 하나는 교육위원회이고 하나는 선교위원회입니다. 교육위원회가 처음 시작될 때 제가 부산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송길원 목사님이 초대 간사를 역임했는데 예산도 별로 없고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옆에 있다 보니 교육위원회 하는 일에 직간접으로 많이 관계를 해주고 때로는 도와주었습니다. 그 교육위원회 일을 보면서 제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 교단의 목사로서 인심을 많이 얻었습니다. 교육위원회 관계된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또 교육위원회는 각종 교육대회다 뭐다 하면서 행사가 굉장히 많습니다. 제가 일찍이 교단에 알려진게 교육위원회 때문입니다. 교육위원회에 관계된 목사님이나 장로님들 중에 제가 교육위원회 초창기에 수고한데에 대해서 다 압니다. 이근삼 박사님이 교육위원장을 하고, 송길원 목사, 나삼진 목사가 간사할 때 제가 나름대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교육위원회 일을 보면서 요즘 간사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초창기에 일한 분들과 조금 구별이 있습니다. 개 교회들은 이렇게 예산도 있고 돈도 있는 것 같은데 왜 교육위원회에 투자를 좀 안 해 주냐? 교육위원회가 하는 일을 좀 안 도와주나? 이런 불평을 더러 합니다. 그게 안 됩니다. 수고하는 것은 좋은데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그 수고를 따져보면 사랑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을 담아서 하지 않으면 결론은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진단을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원망과 불평이 없습니다. 결론에 가면 주께 영광이고 감사입니다. 사랑없는 지식, 교만합니다. 사랑없는 수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 실종된 사랑입니다. 대책은 사랑의 회복입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교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섬김은 처음 사랑을 담아서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가 결과적으로 주님 앞에 의미를 상실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회복하라

  본문 5절 말씀이 키포인트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데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 처음사랑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중심이동이 사랑의 자리에 이르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 위하던 마음이 남을 위하게 되는, 나만 집착하던 중심이 상대방을 위하는 중심으로 이동이 될 때 그것이 처음 사랑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목적이동입니다. 아가펜 프로텐이라는 처음 사랑이라는 말은 본질적이고 속성적인 것입니다. 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폴레옹 힐이라는 사람은 현대인에게 7가지 불안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관심을 가져야 될 고민이 바로 사랑의 손실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습니다. 7가지 불안은 경제적 불안, 질병에 대한 불안, 노쇠에 대한 불안, 자유 상실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 명예에 대한 불안, 그리고 사랑의 손실에 대한 불안인데 그 중에 현대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될 분야가 사랑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왜 사랑의 상실이 그렇게 위험한 일이냐 하면 사랑을 잃어버릴 때 모든 관계가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회복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무작정 회복이 안됩니다. 어디서 떨어졌느냐? 무엇을 하다가 내가 사랑을 잃어버렸느냐? 막연하게 사랑의 회복은 구호로, 성명서로 되지 않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야 됩니다. 여기에 이중으로 강조했습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회개하라는 것은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요즘 운동을 많이 합니다. 걷거나 뛰는 사람도 아주 많은데 뛰는 사람을 보면 그저 마구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때 황영조씨가 나와서 달리기에 대해서 특강을 했던 순서가 있습니다. 내가 거기서 아주 귀한 것을 배웠습니다. 달리기 할 때는 쿵쿵 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통을 흔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팔만 흔드는데 될 수 있는대로 팔이 뒤로 안 가도록 흔들라는 것입니다. 뒤로 많이 가게 흔들면 에너지 손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뛰기를 마구 하면 에너지만 소모되고 운동하고 나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운동하고 피곤한 것은 운동을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운동하고 나면 가뿐하고 새 힘을 얻어야 되는데 마구 뛰는 사람은 오히려 체력이 소진되고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은 거저 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프로선수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 적성에 맞는가? 안 맞는가? 이것부터 선택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적성에 맞는 것을 하고 자기에게 단점으로 다가오는 운동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방해된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라톤이 적성에 맞으면 그것을 붙잡고 해야지, 소질도 없는 다른 운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여 회개하라.” 단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처음행위를 가지라.”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표현은 다른데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는게 “본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가다가 방향을 잃거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점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제일 큰 죄가 무지라고 했습니다. 독일 철학자 피이테는 게으름이 제일 큰 죄라고 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교만이 제일 큰 죄라고 했습니다. 단테는 배신이 가장 큰 죄라고 했는데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보면 지옥의 제일 아래층에 제일 큰 죄인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와 시이저를 배반한 부르터스와 카시오스가 지옥의 밑창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사랑을 배신한 죄가 가장 큰 죄로 규정합니다.

  실천하는 사랑

  이제 조금 실제적으로 생각합시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첫 기쁨, 첫 감격,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영적인 처음 사랑, 그것은 우리 인간적 감정이 가지는 에로스의 처음 사랑과 다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항상 넘치는 은혜를 계속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응답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 사랑의 그 만족을 계속 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첫 사랑의 감정이 계속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계속 우리가 응답을 해야 됩니다. 그 응답을 안 할 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전도를 가장 잘 하는 시기는 예수 믿고 6개월 이내라고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계속 하다보면 예수님만 보고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져 버리고 예수 믿는데 예수외의 것들이 자꾸 좋아지는 이런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이게 영적으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예수님만 아시면 아멘이다, 그 감정이 우리에게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사람 눈에 나 버리면 그만 예수님이 눈에 안 보입니다. 예수님이 알아주면 되었다는 그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이 나를 멸시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했다, 교회가 나를 어떻게 했다, 목사님이 나를 못 알아준다, 예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다른 것 가지고 자꾸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행동이고 실천이고 능력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성구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행동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약속을 실행했습니다. 실천입니다. 죄인들이 믿고 영생을 얻게 했습니다. 능력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은 행동이고 약속이고 실행이고 능력입니다. 사랑은 그냥 이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에 행동이 있습니까?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행동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행동은 능력을 동반합니다. 사랑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낸 사랑의 행동과 실천은 죄인들이 믿고 영생에 이르는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소아시아 일곱 교회 메시지 가운데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에서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게 회개입니다. 그리고 충성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요구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교회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은 회개하라는 것과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고 이것이 바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회개는 수치도 아니고 회개는 상실도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중요한 성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적성이 안 맞는 것들은 다 버려야 처음 사랑이 회복됩니다. 우리에게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한 새 옷은 아무리 입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이 일에 방해되는 것을 과감하게 벗지 않고는 처음 사랑은 구호로 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처음 사랑의 회복은 생각하고 회개해야 됩니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진단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불신앙의 모습인가? 자기를 진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 많이 넘어집니다. 사랑이 상실되면 사소한 일도 전부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우리는 사소한 일뿐 아니라 큰일도 극복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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