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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단강을 건너려면 (수 3:1-6,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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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태권도 여자 57킬로 급에서 장지원 선수가 첫 금메달을 땄습니다. 물론 후반에 체력이 달려서 정신력으로 버티는 모습이 안쓰럽게도 보였지만 그녀의 메달은 값진 메달이라고 생각됩니다. 장지원 선수는 4년 전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탈락했습니다. 국제경기 경험이 많은 한체대의 동갑내기 정재은이 대표가 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코칭스태프가 경기 도중 기권 타월을 던졌던 것입니다. 1-1의 팽팽한 접전가운데 본인의 의사와는 전연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기에 장지원 선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출전권을 양보받은 정재은 선수는 시드니올림픽에서 결국 금메달을 땄지만 장지원 선수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장지원은 그 휴유증으로 2002부산아시안게임과 2003독일세계선수권 대표 선발에서 잇따라 탈락했습니다. 하지만 시드니 때의 설움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오기로 일어선 장지원은 지난해 11월 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는 쿼터대회에서 우승하며 자신감을 회복했고, 두 차례의 국내 대표 선발전도 모두 석권하며 꿈에 그리던 아테네행 티켓을 잡았습니다. 1미터74의 큰 키에 비해 체력이 약하다는 평을 들어온 장지원은 이번 대회를 위해서 ‘남들보다 특별하게’ 라는 좌우명 아래 하루 800차례씩 발차기를 하며 약점인 오른발 공격과 체력 보강에 힘쓴 결과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종종 건너야할 강이 있습니다. 그것은 슬럼프 일수도 있고,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큰 장애물일수도 있습니다. 그 장애를 딛고 일어나 극복하는 사람만이 그 분야의 정상에 우뚝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민족에게도 동일합니다. 한 민족의 발전과 흥왕의 배후에는 넘어야할 강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그의 “도전과 응전” 이라는 책에서 한 문명이 강하게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그 문명이 발흥한 뒤안길에 엄청난 도전과 시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도전과 시련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도전에 대하여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는 일단의 강한 창조적 소수 집단이 있었느냐가 그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마다 장애물과 같은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유프라데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은 “강을 건넌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자기 조상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24:2-3)

  아브라함은 유프라데 강을 건넘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입었습니다. 동시에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의 인도 하에 홍해를 건넘으로 노예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꿈꾸어오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요단강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제 지루한 40년의 광야생활의 끝맺음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 도강은 분명 축복이었지만 동시에 위기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랑민으로 전락할 것이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지순례를 가서 보는 요단강은 작은 개울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지금부터 3500년 전의 요단강은 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강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연중 수위가 가장 높은 시기였습니다. 요단강은 모맥(밀과 보리)거두는 시기에 항상 물이 넘쳤습니다. 이 시기가 보통 4월이었는데, 북방 헬몬산의 많은 눈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오고 이 호수가 범람하면서 요단강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에 아주 수위가 높은 시기였습니다.

  위대한 사역을 일으키고자 할 때는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와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건너지 않으면 안 되는 지뢰와 같은 위험한 상황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민족이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난관을 만날 때 그것을 단지 하나님의 징계로만 여기거나 피하면 피할수록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어떤 전략을 지시하셨고 백성은 어떻게 순종하였는지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어 봅시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분들이나 인생의 질고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분들, 건축을 시작하려는 우리 교회 공동체에 적용되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1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호수아는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새로운 도전 앞에서 일찍 일어나 행동하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신앙의 성숙이나 능력있는 삶을 원하는 크리스챤이라면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가 사업가라면 시간을 더 내어서 사업장을 돌보고 연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처한 직장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직장인이 되기 원한다면 더 연구하고 개발하는 직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부지런한 사람이되 또한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요단에 이르러 3일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하여 귀를 열어놓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헌신할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 국민들은 깊은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수상인 윈스턴 처칠 경은 영국의회를 통해서 온 백성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대영제국 여러분, 우리는 이제 옛 시대를 뒤로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고, 우리는 이 길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수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국을 수호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피, 우리의 땀, 우리의 눈물, 우리의 최선을 민족 앞에 드려야 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영국 백성을 전쟁 앞에서 하나되게 하였고 그들은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성전건축의 새로운 역사 앞에 서있는 영신교회 교우들도 새로운 각오와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먼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합시다. 가끔 집안일로 주일 예배에 빠지던 분이라면 이제 빠지지 않기를 다짐하십시오.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던 분이라면 주일 오후예배에도 참석할 것을 다짐하십시오. 수요예배까지만 참석했던 분이라면 새벽기도나 금요일 심야기도회까지도 참석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구역예배에도, 남여신도회 모임에도 더 열심을 내도록 하십시오. 새로운 각오와 헌신만이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할 것입니다.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유명한 패튼 장군은 그의 부하들에게 늘 이렇게 연설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의 후손이 여러분에게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자신있게 대답하라. 나는 영광스런 패튼 전차부대의 일원이었다고”

  교회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기도할 때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겠습니까? 그냥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계실 것입니까? 아니면 그 역사의 와중에서 함께 동참하며 명예스러운 영신교회 성도로 남을 것입니까?

  두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려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본문말씀 3절입니다.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언약궤는 법궤 또는 하나님의 궤, 증거궤로 불리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가 보관되어 있었고 이는 곳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행진할 때마다, 혹은 전쟁 때에는 늘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으며 이는 곳 백성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징표였습니다.

  특별히 본문 4절에 백성과 언약궤는 2000규빗의 거리를 두도록 하였습니다. 한 규빗은 손가락 끝에서 팔목까지의 길이입니다. 보통 45센티를 의미합니다. 2000규빗은 약900미터의 거리입니다. 200만의 인구가 언약궤를 따라가려면 이만한 거리를 둘 때만 온 백성이 언약궤를 바라보고 행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은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도 언약궤를 바라보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너희 길을 알려주실 것이고 너희의 길을 인도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십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인생의 초점을 맞추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지표로 삼고, 그분께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만 주목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마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개가 루터의 손에 빵이 있는 것을 보고 그 빵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빵을 든 루터의 손이 입으로 가면 시선이 입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 손이 움직이는 데로 개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때 루터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도 저 개처럼 모든 시선이 주께로만 향하게 하옵소서”.

  지금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려면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우리가 만약 요단강 앞에 서있다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엉뚱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고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사업이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나님, 직장이 흔들려요, 방법을 알려 주세요” “하나님 저희 가정에 아픔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때 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하라!”

  여러분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겠습니까? 진정한 능력은 성결임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작은 그릇도 쓰시고, 못생긴 그릇도 쓰십니다. 그러나 더러운 그릇은 그냥 쓰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반드시 깨끗하게 하셔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인생의 난관 앞에서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가 갑자기 추락하였습니다. 지나가던 선교사가 궁금하여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독수리는 총이나 활에 맞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발을 벌려본즉 족제비 한 마리가 그 배에 붙어서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수리는 먹이를 찾다가 족제비를 낚아채어 가슴에 안고 공중에 올랐으나 그 족제비가 오히려 독수리의 심장을 찢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성공의 문턱에서 주저앉기도 하고, 정상에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기도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심장을 갉아먹는 죄악된 습관과 생각을 멀리 던져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을 것은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됩시다.

  이제 공동체적으로도 분열과 갈등, 미움과 반목, 질시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 되어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세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위대한 도전 앞에서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번째로, 요단강을 건너려면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말씀 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본문말씀 13절입니다.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단강을 건널 수 있는 전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먼저 강에 들어가면 흐르던 물이 멈출 것이고. 그때 백성들은 건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물을 갈라놓은 뒤에 건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물이 넘실대면서 흐르고 있지만 거기에 믿음으로 발을 담그라는 것입니다.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담그면 그때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장벽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우리의 기도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십일조도 잘하고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먼저 충성하고 봉사하라. 그러면 내가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의 기사가 소개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예수님은 바로 돌아오실 수 없었고 나사로의 장례가 마친 후에나 돌아오시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슬퍼하였습니다. 이를 민망히 여기신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문을 옮기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벌써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40)고 하셨습니다.
영광과 기적은 믿는 자 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라! 그러면 영광을 볼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다면, 새로운 결단의 시점 가운데 있다면, 이제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망설이거나 쭈볏 거리지 말고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 디딤으로 요단이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단을 건너려면 앞장서서 헌신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말씀 17절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특별히 기적의 선두에 서있는 제사장들의 헌신이 눈에 띱니다. 제사장들은 중간 지도자들로써 온 백성이 다 강을 건널 때까지 언약궤를 메고 요단가운데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갈라진 요단을 마른 땅같이 밟고 건너는 백성들의 기쁨과 놀라움을 목격하는 보람도 있겠지만 역시 무거운 언약궤를 메고 수 시간을 정지된 채로 서있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간지도자들인 이 제사장들이 두려움을 모르고 믿음으로 나갔고 헌신함이 있었기에 백성을 안전하게 도강시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성전건축의 대 역사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과 제직들이 앞장서서 전진하고 무거운 짐을 먼저 지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가 위기를 넘어 기쁨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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