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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히 감당하리라 (고전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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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상복 목사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가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10:1-13.

  지난 주 중에 러시아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이 한 학교에 난입해서 학생들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압과정에서 1천 명 정도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테러범 50여 명 때문에 1천명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질들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루아침에 일어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젊은 가정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불륜에 빠진 가장 때문에 아내와 가족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고통을 당할 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집니다. 답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은 일주일에 몇 차례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기도를 합니다. 목사님들이 각자의 교구와 사역에서 올라온 여러 기도제목들을 내어놓으면 그것을 모두 적고 함께 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주도 우리 성도들 삶 속에 고통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어느 때는 기도 제목을 보면서 “아, 우리가 이렇게까지 고난을 당하며 사는구나, 우리 인생에는 이렇게도 고난이 많은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한 가정의 고난이지만 우리 교회의 각 가정이 가진 고난을 모두 꺼내놓고 보면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여러분 개인에게는 고난이 오고 또 지나가기도 하지만 우리 목회자들에게는 고난이 계속 이어집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고난을 피할 수는 없는가? 아니면 줄일 수는 없는가?”

  그러나 여러분과 저처럼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세계를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난의 의미는 좀 다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13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 와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섬기고, 믿음으로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어떤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할 수 있다고 믿고 삽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어야 합니다. 안 믿는다고 별 수가 있습니까? 고민하고 방황하고 자살하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는 고난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하지만 답이 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야고보는 “너희가 온갖 종류의 시련을 당하거든...”이라고 했는데, 시련의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련뿐 아니라 교회적인 시련, 가정적인 시련, 나라와 세계적인 시련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시련이 닥칩니까? 예부터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 고난에 대해 많이 생각해봅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알면 조금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왜 고난을 당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파괴되고 있는 자연현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부터 인간과 자연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죄는 반드시 파괴를 일으킵니다.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8절)고 했습니다. 간음하는 자들을 뱀이 물었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독입니다. 마귀에게 물리면 죄의 독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와 우리를 파괴시키고 결국 죽게 만듭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이 우주만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탄식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탄식한다(groan)는 말은 너무 아파서 끙끙 앓는다는 뜻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만물이 다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우주적입니다.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왜 나만?” 하지만 나뿐 아니라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다 고통을 당하며 삽니다.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긴가 짧은가의 문제일 뿐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우리의 신음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육신을 가지고 이 죄악세상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겠습니다. 빨리 나를 데려가 주시고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일으켜주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평화가 속히 오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절규입니다. 병원심방을 하면 육신의 고통을 겪는 환자들이 병실마다 가득 차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여러분이 하루라도 병원에 있지 않은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병이 낫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지만 아프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 몸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장 날 수 있는 부속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은 부속품들이 고장 나지 않고 오늘 하루 편안하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느 날 몸 한 구석이 삐그덕 하면 온 몸이 드러눕습니다. 이것은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퇴화하는 자연 현상입니다. 오늘 아침에 여러분 모두가 참 멋있어 보입니다. 교회에 오기 전에 샤워하고, 얼굴에 무언가 바르고, 깨끗한 옷을 입는 등 여러분 몸에 건설적 에너지를 공급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좋은 에너지를 계속 공급해주지 않으면 자연히 보기 싫게 됩니다. 저와 제 아내는 2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겉으로는 아내가 15살 정도 아래로 보입니다. 아내는 자신을 위해 강력한 에너지를 계속 공급했고 저는 그냥 버려두었기 때문이지요. 좋은 에너지를 계속 공급하지 않으면 저절로 망가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오늘 아침에 주님의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1주일에 한 번은 성가대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습니다. 어디 가서 이런 음악을 듣겠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찬송과 가사를 들을 때마다 우리에게 선한 에너지가 공급됩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영양분과 휴식과 운동을 계속 공급해주지 않으면 저절로 망가집니다. 좋은 에너지를 열심히 공급하십시오. 그래야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내 잘못으로 나와 주변사람들이 고통을 겪거나,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도 계속 고통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어떤 경우는 말조심을 하지 않아서, 때로는 무지해서, 실수해서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고통에는 내적인 고통과 외적인 고통이 있는데, 내적인 고통은 죄의식입니다.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양심이 있어서 내가 잘못하면 내가 나를 처벌합니다. 괴롭고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잘못하면 누구나 고통을 느낍니다. 어떤 경우는 사람이 악해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생각을 잘못하거나 게으르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연약해서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느 젊은이가 와서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비자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불법체류자가 되어 경찰의 추적을 받고 이민국에서 조사를 받는 등 몇 년 동안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말미에 그 청년이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왜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불법체류를 하고선 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우리 스스로 잘못하고선 고통이 심하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잘못하고 마귀를 원망하기도 합니다.

  남이 잘못해서 우리가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난주에도 어느 교회 성도 10여명이 갑자기 저를 찾아왔습니다. 몇 달 전만해도 서로 참 좋게 지내던 성도들 사이에 오해가 시작되고 말을 실수하면서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참 불쌍한 일입니다. 스스로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자신과 남의 유익을 위해 고통을 당합니다. 선한 목적을 위해 당하는 것입니다. 제일 가까운 예가 부모님의 고통입니다. 엄마가 비명을 지르고 몸을 찢은 결과 아기에게 새 생명이 주어집니다. 자식을 위한 선한 고통입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합니까? 자식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들이 장성해서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기 시작하면 비로소 부모의 수고를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고통을 감수해나갑니다. 자기를 위한 고통이 있고, 남을 위한 고통이 있으며 교회와 하나님을 위한 고통이 있고 나라와 세계를 위한 고통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중에도 아마 남을 위해 참고 고통당하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씨가 되어 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을 위해 새벽마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그 학생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줄을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험생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쉬지도 못하고 밤늦게까지 고생합니다. 학생시절에 자기계발을 위해 그렇게 혼신을 다해 공부를 하면 그것이 일생 유익이 됩니다. 자기를 위한 희생이므로 불평하지 말고 꾸준히 고생하면, 젊었을 때 그런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고생을 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성 때문에 범하는 죄로 인해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습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고난을 통해 “다 이루었다”하는 그 때에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받습니다. 또 무지로부터, 지옥으로부터,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구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인내하시고 끝까지 고난을 참으십시오. 여러분의 수고 때문에 반드시 선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고난마저도 반드시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내가 무엇을 잘못 했나?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살펴본 것처럼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 잘못이나 실수나 연약함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자연이나 환경이나 여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올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직접적인 이유가 내게 없어도 나 자신을 살펴봄으로써 내게 변화와 성장과 성숙이 있습니다. 성숙해질수록 실수와 잘못이 줄어들고 우리 삶에 고통이 적어집니다. 우리가 성숙해지면 행복해지고 삶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며 살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반듯하게 훈련 받으면 현재의 시련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절대 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직장이나 어디서든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고 믿음이 없어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분명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께서 힘 주셔서 감당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서 직접 간섭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못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감당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 인생에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 믿지 않으면 더 오래 고생합니다. 믿으십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을 믿고, 성령의 도우심을 믿음으로써,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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