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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하나님, 나의 집 (요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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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중표 목사 (한신교회)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근심과 걱정, 염려가 떠날 때가 없습니다. 염려는 이 시대에 공인 감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나름의 근심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더합니다. 옛날 농경 사회와는 달리 고도의 문명 속에서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감수해야 할 스트레스가 적지 않습니다. 전에는 먹고 살기 바빠서 스트레스를 인식할 틈도 없었다면 오늘날에는 조그만 일에도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때문에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근심, 걱정은 떠나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속에 찾아든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가난한 시대였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은 민중들에게 큰 염려요,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 끝없는 욕망에 대한 추구, 인간의 탐욕 때문에 오는 염려와 근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을 저들이 들었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아!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 또 주님을 잃어버린 이 마음의 공허와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뿐만 아니라 당시에 사회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핍박하던 공포감이 그들의 마음에 엄습했기 때문에 마음의 불안감을 씻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고 제자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고 있을까요?

근심이 끼치는 해악

(1) 마음을 병들게 함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불안, 초조, 마음에 쌓이는 염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병들게 하는 좌절감, 부정적인 인간, 굴절된 자아상, 이런 것들은 다 불안감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모든 평안을 빼앗아가는 것이 근심인데 이것이 바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저들은 심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그러면서 "들에 피어있는 백합화를 보라 이는 수고도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이 입은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했다.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치나 더 한 자가 있느냐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365일동안 매일 매일 살면서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의미에서 그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염려함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염려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 영혼을 병들게 함
염려는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걱정과 근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 근심, 걱정, 염려, 불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네 모든 짐을 지고 네 모든 염려를 맡을 것이니 너는 자유하라"는 의미입니다.
근심은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정신적 독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근심과 걱정이 아니요, 평안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 심령속에 끊임없이 근심의 독약을 뿌려서 우리를 불안하고 좌절하게 만들어서 완전히 실패자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
의인에게는 평안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평화를 빼앗아 가는 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반항, 대적하는 반항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싸움을 선포할 때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염려보다 더 큰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는 사람을 무능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모든 뜻을 우리 속에서 좌절시키는 무서운 악입니다.
근심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실패자로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어서 울도록 만드는 무서운 악이요, 우리의 신앙을 죽은 신앙으로 만드는 원수 마귀의 무서운 무기입니다.

(3) 육체를 병들게 함
'염려'는 헬라어로 '메림노'라는 말인데 이 말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겨놓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두 마음을 품게 함으로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실패, 좌절, 열등 인생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염려가 결국 인간의 육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모든 병은 다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옵니다. 육체가 병이 들지만 그 뿌리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고혈압, 류마티스, 심장병, 두통 이런 것들은 다 마음의 불안, 스트레스, 염려, 근심에서 발병한 것입니다.
한 의과대학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환자의 약 20%는 근심과 스트레스에서 병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고 말합니다.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렌스 카렐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했습니다. 위장병은 음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심, 걱정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사람을 늙게 만드는 기본적인 요소가 근심입니다. 근심을 한달쯤 하고 나면 얼굴이 팍 늙어버립니다. 그래서 근심은 여자를 늙게 만들고 아름다움을 빼앗아 갑니다. 많이 웃는 사람이 장수합니다. 여자들이 맛사지 해서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지만 자꾸 웃으면 저절로 아름다워집니다. 여자들은 웃을 때 얼굴에 주름 생긴다고 손으로 얼굴을 잡아 당기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웃어서 생긴 주름은 괜찮습니다. 웃어서 윤기나게 만들어야 됩니다.
제가 얼마전에 어느 교회 부흥회를 갔는데 머리가 하얀 분이 나한테 오면서 "목사님 목사님" 그래요. 저는 '웬 할머니가 나를 부르나' 했는데 할머니가 아니라 제가 시골교회에 있을 때 만났던 처녀에요. "목사님, 저 아시겠지요?"  "누구신데요?"  "목사님께서 시골교회에서 목회할 때 목사님을 도와 일했던 아무개입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완전히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어요.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저도 50대 전까지는 사람들이 제 나이로 안봤습니다. 10년 이상을 더 많게 봤습니다. 그래서 열 살인데 스무 살이냐고 그랬고, 스무 살 되었을 때는 서른 살이냐고 그랬습니다. 하마터면 장가도 못갈뻔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이 우리를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불안감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제 나이 보다 더 들어 보였던 것입니다. 제가 수술을 세 번 한 것도 제 인간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세라는 하나님의 신비한 은헤를 받으면서 '내가 염려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의 예정대로 간다'는 것을 안 이후로 제게서 근심, 걱정이 해소되면서부터 수술이 끝났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내 나이를 10년 밑으로 봤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목사님 그때 뵈었을 때랑 똑같네요." 저를 청년 때 본 사람들은 "많이 갔네요." 그러는데 80년대에 나를 본 사람들은 "목사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그럽니다. 염려, 근심, 걱정을 덜해서 제가 이 정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부도가 나면 나는 겁니다. 무너지면 그대로 살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배짱입니다.
블란서 의사들 종합적인 최고의 명약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각종 제약회사에서 좋은 약을 다 만들어내지만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명약은 웃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웃을 때 동맥의 혈전증이 녹아내립니다. 웃을 때 심장이 풀어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자는 부인이 있어야 오래 살고 여자는 남편이 없어야 오래 산다." 남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여자는 빨리 과부 되어야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저는 남자들이 참 이해가 안가는 것이 남자들은 아내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아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홀아비를 누가 좋아합니까 자식이 좋아합니까 며느리가 좋아합니까 홀아비는 아무도 안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아낄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 텍사스주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7년간동안 2만 2천명을 대상으로 사람의 수명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불신자와 신자에 대한 수명을 연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은 신자는 평균 수명이 82세였고 불신자는 75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신자가 불신자보다 7년을 더 산다는 얘기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받아서 스트레스를 풀고 모든 염려, 근심, 걱정 주님께 맡기고 주 안에서 평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찬양만 들어도 온갖 불안과 초조가 다 사라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의 즐거움이 보약이라는 것입니다.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무서운 말입니다. 근심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집이 되신 하나님
어떻게 염려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고 근심없이 살면 좋지만 믿어도 근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어도 근심이 생기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제자들이 근심에 싸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 이런 근심에 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죽는다고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듯이 나를 살아 있다고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처소는 물론 천국을 말합니다. 또 다시 온다는 말은 재림한다는 성서적 해석입니다. "내가 천국에 가서 천국을 만들고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 이것이 성서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내가 다시 온다"는 말은 다시 부활하여 올 것이라는 해석이 있고 승천한 다음에 성령으로 온다는 해석도 있고, 마지막에 재림하여 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해서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근심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먼 역사적인 후의 얘기인데 그 안에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그런 약속만 믿고 근심을 극복할 수가 있을까 여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너희는 내가 떠나가면 없는 줄 아는데 아니다. 내가 죽으면 부활하여 부활의 영으로 너희 안에 임재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육체와 육체가 만나기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고 너희들이 내 품속에 들어올 수 없었지만 내가 성령으로 오시면 그때는 이 성령 안에 너희가 다 머물게 됨으로 너희는 곧 하나님을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사는 은혜가 올 것이다."
하나님은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가 아닙니다. 마치 공기가 내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공기가 있듯이 만나고 헤어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너무 너무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마땅히 누울 잠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을이나 봄이 좋다고 그러는데 저는 여름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름에는 아무데나 누우면 내 집이 되니까요. 아무데나 누우면 내 집이니까 여름이 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오면 추우니까 두꺼운 옷 입어야죠, 방에 피워야죠, 얼마나 걱정스러워요. 제가 어렸을 때 너무 배가 고파서 물로 배를 채우고 잔디밭에 누워서 "배는 물로 채웠으나 가슴은 하늘로 채워다오." 그랬는데 성장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늘을 품는다는 것은 곧 하늘을 마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숨을 쉴 때 하늘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대기권인데 우리는 이 대기의 공기에 코를 대고 숨을 쉬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숨을 쉬면서 하늘을 마신다는 것을 알았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 깨달은 것은 하늘을 마신다는 그 단계를 넘어서서 성령을 마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은 온 우주에 편재한 하나님의 영인데 그 영을 내가 마시므로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인간이 사는 것은 하나님을 마시는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되는 상태입니다. 하늘을 지붕 삼는다는 말은 하늘이 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지붕 삼고 삽니다. 그러나 하등 동물은 땅을 집을 삼고 삽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잘 때도 하늘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있어도 코는 열고 하늘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밥은 40일간 안먹어도 삽니다. "무엇을 마실까" 물은 두 주간 안마셔도 삽니다. 그러나 코에 들어가는 공기는 4분간만 안마시면 죽습니다. 그래서 공기는 나를 살리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듯이 사람은 공기를 떠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공기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말로 말하면 하나님이 나의 집이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성령으로 다시 와서 너희를 다 집으로 삼아줄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인간의 삶의 삼대 터전이 있습니다. 배움터, 일터, 쉼터인데 인간의 전 과정의 터전입니다. 어렸을 때는 무슨 집을 주로 중점하고 있느냐? 배움의 집입니다. 배움의 집이 끝나면 또 하나의 집이 시작되는데 일하는 집 직장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이 집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영원한 집을 사모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 집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무덤을 집으로 삼고 그 안에 들어가면 끝납니다.
우리가 여행할 때 이집트라든지 필리핀, 중국에 가보면 무덤이 잘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잘 꾸며 놓았으냐? 무덤에 있는 사람이 더울까봐 에어컨을 틀어놓을 정도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피라밋은 무덤의 집입니다.

평안을 얻는 믿음
저는 어떤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세상에 태어났다.' 옛날 우리가 성장할 때는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부모들이 전혀 간섭을 안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공부에 대한 부담감에 싸여 있습니다. 이 무한 경쟁 속에서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근심, 불안, 초조가 쌓이고 있습니다. 또 대학 나온 사람들은 직장에 취직이 안되는 것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 한 청년이 시험을 쳤다고 그래서 "무슨 시험을 쳤느냐"고 했더니 임용고시라고 그래요. 일곱 명을 모집하는데 800명이 왔다는 것입니다. '어이쿠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백수밖에 못했겠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집값 폭등 때문에 불안합니다. 다른 지역은 잘 오르지 않는데 서초동, 강남, 도곡동, 압구정동은 집값이 1년만에 배로 뛰었습니다. 그래서 전셋집에 사는 전세값이 오를까봐 늘 불안합니다.
제가 옛날 전셋집에 살 때 그것을 느꼈습니다. 88올림픽이 끝나고 나니까 집값이 세 배로 뛰었습니다. 잠이 안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이 집값이 폭등할 때마다 이 불안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염려가 됩니다.
아이들은 공부 때문에 불안합니다. 다른 지역은 경쟁을 않기 때문에 평준화로 만족하는데 강남은 평준화 속에서도 경쟁하니까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불안과, 근심과, 걱정이 가장 심화된 지역이 강남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어떻게? '온 우주에 하나님이 충만하듯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라. 내가 성령으로 올테니 그 안에서 너희는 평안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자녀들에게 공부시키되 불안,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라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너는 그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그 말을 해야 됩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야 그 아이를 스트레스와,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유명한 대학에는 도서관이 있는데 그 위에 높이 교회당을 마주보게 지어놓습니다. 땅속으로 도서관이 들어갈지언정 절대로 도서관 위로는 못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든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되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떤 집 속에 있을지라도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전셋집에 살면서 집값이 폭등할지라도 그 속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지붕 삼고 산다.' 이런 믿음을 고백할 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집은 잠을 자는 곳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요, 쉼을 얻는 곳이요, 놀라운 하늘의 보화를 얻는 곳이요, 꿈꾸는 곳입니다. 별장에 간다고 쉼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집에 산다고 잠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잠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재작년에 친구와 함께 보스턴에 있는 로드아일랜드를 갔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철도 회사를 경영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천만불을 들여서 지었다는 집을 보러 갔습니다. 그때 당시의 천만불은 지금의 천억불에 해당되는 집입니다. 모든 자재를 블란서에서 들여왔고 나폴레옹의 궁을 본받아서 지은 집인데 관광객들이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100m의 줄을 서 있어요. 저도 100m 후방에 서서 따라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하나 하나를 보니까 얼마나 투자를 많이 했는지 천장도 조각을 해놓았고, 수도꼭지, 화장실도 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보면서 속으로 '나는 여기에 누워서 한 밤도 못자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안해서 못자겠어요. 그런데 관람이 끝나고 내려오니까 가이드가 그래요. "이 집에 산 사람은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다. 이 집을 지은 사람도 결국 이혼해버렸고, 또 이 집에 들어온 다음 사람도 불안감 때문에 일찍 죽었고,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려고 집을 갖는 것입니다. 집을 갖기 위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집을 재산으로 소유하려고 하는데 집의 세 가지 원리를 알아야 됩니다.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집, 편안한 집, 하나님을 잘 모실 수 있는 집, 우리는 어느 집에 이사를 가든지 세 가지 원리 위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좋은 집,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집, 편리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집에 살아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 머리에 가시관 쓴 성화를 안방에 걸어놓은 사람은 떼내십시오. 안방에 가시관 쓰신 예수님의 성화가 걸려있으면 잠이 오겠습니까 이런 성화는 거실에 거시고 안방은 단순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불안감을 주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 누우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은 하나님을 집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나를 집으로 삼으라"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처소는 집, 주거지, 안식처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처가 될 때 참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헤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모시고 나의 집으로 삼고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렇게 되는 것이 믿는 자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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