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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사랑 절대헌신 (약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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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ꡒ절대사랑, 절대헌신ꡓ이란 제목으로 여러분의 삶의 ꡒ행복의 조건ꡓ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마음을 모아서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야고보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보다 왜 그 말을 하느냐를 아는데 있다고 지난 번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각 구절의 내용보다는 앞뒤 연결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야고보서를 가리켜서 무슨 전체적인 흐름이 있는 편지라기보다는 그냥 설교제목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냐는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구절 한 구절을 파고들면 풍성한 생명수가 터져 나옵니다. 30분 설교 가지고는 다 펼칠 수 없는 말씀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구절 하나하나가 야고보 선생에게는 설교의 하나하나의 주제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아래 쓰여진 공동 서신 제 1호가 앞 뒤 연결이 없이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심한 이야기 일 것 같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앞뒤의 그렇게 배열해야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우리의 수준이 야고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해서 그것을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앞 뒤 연결 안 되는 서신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내가 야고보의 심정을 따라 잡지 못해서 이해가 잘 안되구나 하고 살펴야 그게 성경을 대하는 바른 자세가 아닐까요? 

우리의 천박한 수준 때문에 오늘 본문 4장 5절도 왜 그 말을 하는지 잘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동시에 오늘 이 5절은 내용조차도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설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제가 겁을 낸 부분이기도 합니다. 1장 1절부터 시작해서 5장 마지막 절까지 설교를 하려고 하면 언젠가는 4장 5절을 설교해야 되는데 그때 가서 어떻게 설교를 할까 고민을 했던 부분입니다. 그런 본문을 가지고 설교해야 되는 제 입장도 입장이지만 ꡒ이 구절은 어렵다 더라ꡓ집에 돌아가면서 그것만 생각하고 가서는 여러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겸손히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우선 본문을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도움을 주는 방법 중 하나가 여러 성경 번역들을 한번 살펴보는 겁니다. 그래서 개역 성경부터 시작해서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표준 새번역 등 이런 여러 성경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 뿐 아니라 영어 성경들도 살펴 볼 수 있지요. 영어 성경은 한글보다 더 많은 번역들이 나와 있으니까요. 어떤 때는 개인이 번역해 놓은 성경들도 탁월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Phillips나 Barclay 같은 번역을 읽어보기도 하고 어떤 데는 아예 풀어써서 번역을 해놓은 Living Bible 과 같은 것을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보통 성경은 번역위원들이 형성되어 팀이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큰 실수를 하지 않을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실수하는 것은 쉽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실수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큰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동시에 한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 번역은 그런 면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탁월성을 나타내 보이는 성경이 되기도 합니다.

영어성경뿐만 아니라 어려운 부분을 만나면 저는 제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외국어 성경들을 다 펼쳐 놓기도 합니다. 그 중에 아프리칸스 성경번역도 있지요 먼지를 오랜만에 털고 읽어보는데 대개는 이것저것 읽다가 보면 성경말씀이 이해가 되어져 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외인 것 같더라고요. 읽으면 읽을수록 본 뜻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해집니다.

가장 행복할 때는 개역 성경 하나만 읽었을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하나만 알 때에 자신 있게 무언가 말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 이런 말을 사람들이 하는 모양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 종류만큼이나 각기 다른 번역 앞에 본래 뜻이 뭘까? 이런 궁금 중이 더 커지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ꡐ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한다.ꡑ라고 기록한 성경 말씀이 헛되다고 생각하느냐?ꡓ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5절을 잘 살펴보면 야고보 선생은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것 같아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 한다’라고 기록한 성경 말씀이 헛되다고 생각하느냐? 읽어보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 한다’ 는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살펴봐도 그런 구절은 나오지 않습니다.

비슷한 의미를 가진 구절을 혹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뜻이 무얼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보니까 달려드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론만이 무성합니다. 인용이라 할 수 있는 그 내용을 어떻게 파악해야할지 해결의 실마리가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역시 어렵긴 어려운가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렇게 하도록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구절이 어렵다는 것만 알고 듣고 돌아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든 번역을 대조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생긴 모양이 다 가지가지 이지만 피부 색깔 가지고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이렇게 나눈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 그 가운데 두 종류의 번역들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각 경우에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어떻게 적용해야하는지 살핌으로서 무언가 집에 돌아 갈 때는 영적 유익이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한글 번역을 서로 대조해 봅시다. (개역성경) ꡒ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이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ꡓ 분명히 내가 읽은 이 성경은 한글 맞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도대체 누가 시기한다는 건지 헷갈리지 않습니까? 개역성경의  장점이자 단점은 애매모호하게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딱 집어서 ‘이거 잘못 했다’라고 아무도 말 못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번역한 성경들을 보면 그렇게 하지 않고 한쪽으로 확실하게 해 버립니다.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만, 그 말을 알기는 아는데 틀리는 번역일수도 있다지요. 개역 성경은 그렇게는 되어있지는 않지만 애매모호하게 처리를 해 놓았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고 저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데 얼마만큼 사랑하시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랑한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상한 표현입니다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시샘을 할 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영혼을 사랑하신다하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구나 하는걸 알게 되면 조금 그래도 은혜가 됩니다. 그렇죠?

공동번역을 읽어봅시다. ꡒ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어 주신 영혼을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ꡓ는 성서의 말씀이 공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영“이라는 단어를 개역성경에는 성령으로 번역이 되었고 여기서는 인간의 영혼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질투하기까지 사랑하는 대상은 바로 우리 안에 창조하신 영혼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ꡐ영’이라는 말은 영어로 Spirit이고 헬라말로 프뉴마인데 Spirit도 그렇고 프뉴마도 그렇고 이게 대문자로 쓸 때는 성령을 가리키고 소문자로 쓰면 인간의 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옛날의 성경들은 소문자로 쓰면 처음부터 끝까지 소문자 대문자로 쓰면 끝까지 대문자로 씁니다. 그러니까  원어로 아무리 옛날 것으로 살펴보아도 그게 무언지 구별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앞 뒤 문맥을 살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 번역 팀은 프뉴마를 성령으로, 공동번역 팀은 영혼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여간 우리 영혼을 무척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우리 영혼에 대한 끔찍이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을 봅시다. ꡒ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게 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하찮은 말로 생각하십니까?ꡓ 하나님이 우리 속에 살게 하신 성령님은 우리를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신다고 번역하면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성령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은 역시ꡐ우리ꡑ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기까지 성령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점에서 앞의 두 번역과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든 성령이든 우리영혼을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신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경우에서는 하나님(성령님)은 우리 영혼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대로 ꡒ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ꡓ이라는 표현대로 입니다. 질투하리만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질투한다는 말을 하나님께 갖다 붙이면 우리가 듣기에 거북합니다. 우리는 지난 500년 동안 유교전통 가운데서 “질투” 이건 해서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칠거지악 중에 하나라고 넣어 놨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질투하면 그것은 쫓아내도 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죠? ‘하나님이 질투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질투할까? 그것은 속 좁은 여자들이나 질투를 하지 이렇게 생각하려는 남자들 사고구조 속에는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지 모릅니다. 표현이 귀에 어색할지  모르지만 의미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연인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뜨거움과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은 배타적이 되는 겁니다. 나는 널 사랑하고 너는 날 사랑하고 두 사람이 서로 죽고 못하는 관계 그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지 두 사람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던지 말든지 전혀 괜찮다고, 그러고 만나서 데이트하면서 “내일은 너 옛날 애인 만나러 간다면서 잘 갔다 와” 그런다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자식을 골고루 사랑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연인사이, 부부사이의 사랑은 배타적입니다. ‘세상에서 오직 너만 알겠다’ 그렇게 나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천하 만민 가운데서 너희만 택했나니 그렇게 말씀하시거든요.

잘 생각해 보면 부부가 되는 것이 그렇게 사흘 만에 이혼 할만한 하찮은 사건이 아닙니다. 천하에 인류 가운데, 수십억 인류가운데서 거의 절반은 여자가 아닙니까? 여자가운데서 딱 한사람만 골라서 내가 사용하기로 했고요. 거의 절반은 남자인데 그 중에서 우리 집사람은 나 하나를 고르지 않았습니까? 엄청난 사건인데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이 딴 데 가면 “그래 데이트 갔다 와 내일 너를 만나주지.” 이런 사랑을 하나님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두 연인의 사랑이 배타적이듯이 우리하나님은 우리만을 끔찍하게 사랑하십니다. 세 가지 번역은 그런 의미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번역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신약학자로서 유명한 Barclay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주석을 신약 주석을 썼는데 그 주석이 영어로 쓰였는데 내용이 좋으니까 수년 전에 벌써 한글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석만 썼을 뿐 아니라 이분은 마태복음부터 시작해서 계시록까지 자기가 혼자 성경을 다 번역했습니다. 그 번역이 아주 탁월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ꡒ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 안에 심은 영의 사랑의 헌신을 질투하리만큼 사모하십니다.ꡓ 이제는 우리 편에서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애타게 바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질투를 어디 갔다 붙였느냐 하면 이제는 우리 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답하는 자리에다 관련시킵니다.

앞에 나온 세 번역과 크게 다른 점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보다 우리 편의 사랑의 헌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 그 영의 헌신을 질투하리만큼 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기를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만 그렇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저가 읽는 두 종류의 아프리칸스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ꡒ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주신 삶을 전적으로 그를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성경말씀이 헛되다고 생각하십니까?ꡓ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기로 원한다고 하는 것이 그게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이야기이죠. 다른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ꡒ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거하게 하신 영이 전적으로 자신만 위하기를 원하신다는 성경말씀이 아무 이유 없이 한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ꡓ 강조점은 우리 편의 사랑의 헌신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오로지 하여 창조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길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보면 주님 말씀이 기억이 나지요. 십계명의 요약인 주님의 가르치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요점이 무엇입니까? ꡒ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ꡓ(마22:37)

우리 편의 전적 헌신-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한 사랑의 헌신을 요구하고 사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혹은 그가 우리 안에 두신 성령께서도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설명을 이 만큼하고 요약과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크게 두 부류의 해석을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을 포함해서 첫 번째 세 가지 번역들은 강조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을 질투하리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두신 성령께서 질투하리만큼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사랑을 쏟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공통된 강조점은 우리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그 끔찍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곳곳에 하나님은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번역들은 본문의 강조점을 ꡒ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전적 헌신ꡓ에 두고 있습니다. 온 마음과 힘을 다한 사랑의 헌신을 사모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고 사모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의 번역은 서로 강조점이 다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끔찍이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헌신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형식상 서로 강조점이 다른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맥이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이 두 부류의 번역들을 생각하면서 요약해서 ꡒ절대사랑, 절대헌신ꡓ이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은 사랑은 절대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헌신도 절대헌신입니다. 사랑은 그래야 재미가 있어요. 저는 애써 설교하는데 여러분은 앉아서 꾸벅 꾸벅 하고 있으면 내가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죠? 부부간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랑은 아침 일찍 일어나기 힘든데도 새벽잠이 깨어서 출근해서 제 4공장에 가서 일한다고 웬 종일 애쓰는데 아내는 그 시간에 제 5공장에 가서 탄 짓 피우고 있으면 그 집안의 부부사랑이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남편 출근시켜놓고 돌아오기까지 그냥 해바라기가 아니라 남편 바라기가 되어 남편 오기까지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은 다니면서 볼 것 못 볼것 다 쳐다보고 다니고 이래가지고 그 집안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부부 사랑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배타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절대 사랑하면 우리도 절대 헌신으로 반응이 되어져야 그게 쨍~하고 별이 반짝하는 거지 한쪽에서는 엄청 사랑하는데 한쪽에서는 하품하고 앉아있고 이래가지고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절대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절대헌신의 사랑이라야 하나님이 마음에 흡족하시지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전체다 나는 너만 알고 살았다.” 이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남자는 말이지 감춰놓은 여자가 따로 있어 그러면 완전히 뚜껑 열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사랑은 서로를 향해서 배타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베푸셨기에 모든 것을 초월한 헌신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생명보다 아까운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명을 다한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입니다. 보통 종교는 초하루 보름에 한차례씩만 공양미를 이고 왔다 갔다 하면 그냥 “오~케이” 충분해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냥 나와서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부를 때 찬송 같이 부르고 기도할 때 남 “아멘” 할 때 놀라서 같이 아멘 하고 이래 가지고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니 까요. 무한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에게 상응하는 헌신을 우리에게 기대하십니다. 

동시에 사랑은 배타적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만 백성 가운데 오직 너만 택하였느니 그러면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었으며 우리한테 어떤 기대를 하시냐 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에 절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당신만 바라보도록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만을 사랑하시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ꡒ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ꡓ이라 그렇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표현이나 요구가 아닙니다. 사랑은 그 자체의 특성이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부모사랑하고. 부부의 사랑은 다르다니 까요. 부모는 자식을 있는 데로 다 사랑해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부부 사랑은 딱 당사자 한사람 이여요.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 여인의 온 마음을 원합니다. 오직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동시에 그 남자의 전부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고, 우리의 남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신랑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는 아무 다른 사람도 끼어들어서는 안돼요. 어떤 위대한 사역자도 백성의 마음을 빼앗아서 가면 도적 행위입니다.

마치 압살롬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앉아 가지고 임금한테 재판을 하러 오면 호응을 해 주면서 “고생 많지 무슨 일이 있어? 자네 일 임금한테 가지고 가도 임금이 바빠서 자네 일 이야기 안 들어 줄 거야 나한테 이야기 해 내가 도와주지” 그래서 백성들 하나하나를 그냥 자기한테 와서 모든 일을 말하게 하고. 임금을 향한 백성의 사랑을 중간에서 도적질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죠.

목사가 설교를 아무리 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사랑을 중간에서 농락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인데 ‘누가 더 좋더라’ 이런 말하면 안돼요. 여러분은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지 누가 키가 커서 멋있고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좋아 멋있고 이것 따지라고 지금 교회에 교역자들이 15명씩이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데요 거기 가면 기도 받으면 확실히 알 수 있다고 제가 50년 예수 믿었습니다. 25년 가까이 목회 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그런 사람이 종종 있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가 직통전화를 놓은 것같이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나한테 찾아와서 “목사님 제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이 떠나 가지고 어디 가서 사역하라고 합디다.” 이러면 저는 대책이 없더라고요. 하나님하고 이야기를 했다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내가 중간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이야기가 있습니까?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몇 년 뒤에 돌아와서 그때 잘못했다고 뉘우치더라고요. 세월 잃고 신앙의 정조를 유린당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요.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공적으로 말합니다. 울산교회 교인을 다른 데로 데려가는 일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저도 50년 예수 믿었어요. 25년 이상 사역을 해 왔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삶의 대해서 점쟁이 점하듯이 말해 주는 것은 거짓말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솔깃하지요? 우선 내가 아픈데 가 있으니까 우선 내가 답답한 데가 있으니까 가짜 약 사는 사람들 보세요. 왜 팔립니까? 자기 스스로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여기도 쫓아가고 저기도 쫓아가고 그 딱한 문제를 보면 정말 저도 안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로서는 오늘 이해가 다 안 되지만 왜 그런 병에 왜 그런 딱한 처지에 두게 하셨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돼요 내가 하나님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어요. 바로 돕고 싶어요. 그렇지만 우리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어떤 질병, 어떤 사고는 그 결과와 더불어 평생을 같이 가야 되는 일들도 있어요. 그걸 순식간에 몇 달 만에 어떻게 하려고 하면 결국 여기 쫓아가고 저기 쫓아가고 이렇게 해 가지고 유혹을 당하게 되어 있다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김없이 자신을 쏟아 부은 사랑을 우리에게 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해야 됩니다. 중간에 어떤 사람도 개입시켜서는 안돼는 겁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 주 하나님만을  향하고 예배하고 찬송해야지 어떤 사람이 시키는 대로 이것하고 저것하고 이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주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울산교회는 교회가 크다보니까 사람의 숫자가 많잖아요. 그리고 전체가 다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외로 울산교회 교인이 여기도 가보면 있고 저기도 가보면 있다고 보고들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까 그러나 그런 일에 집사들이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우리교회 교인으로 남아 있는데 대해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어리고 배워야 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로 인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성도들의 사랑을 가로채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랬잖아요. 사람들의 눈빛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다 눈빛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답을 했어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하고는 정말 비교가 안돼는 분이십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도록 그렇게 소개했습니다. 사역자가 하는 일은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목숨을 주신 분은 주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도 어떤 전도사도 어떤 기도의 은사를 가진 집사도 여러분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절대 헌신을 여러분으로부터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 헌신할 때에 절대 평안히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향할 때에 여러분은 행복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절대사랑, 절대헌신, 그것은 인간의 행복의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에 부은바 될 때에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할 때에 다른 어떤 일에서 얻을 수 없는 보람과 만족을 사람은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것으로써 만족하지 못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조건입니다. 

오직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 여러분 안에 새 영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으셨고 여러분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여러분도 하나님이 전적으로 헌신할 때 에 비로소 왜 사는지 의미를 발견하고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것과 여러분을 바꾸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보다 더 여러분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만을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자신만을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온통 마음을 쏟아서 사랑해야할 분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아내도 있고 남편도 있는 겁니다. 우리 사랑의 0 순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1순위는 자기의 배우자 입니다. 그 다음 2순위 3순위 가야 자식과 부모라니까요. 늘 사람들이 잘 구별을 못 해요.

한번은 집사람이 저한테 좀 삐졌나 봐요. 마음이 별로 안 좋아서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이 내가 영원히 바라보고 살아야할 대상이 아닌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내가 “나도 그래” 그랬지요. 나도 그렇거든요. 삐쳐서 한말이긴 하지만 거기도 진리는 있다고요. 맞잖아요.  0순위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데요. 1순위의 사랑은 세상 모든 여자들 뛰어 넘어서 그 사람에게 바치기로 헌신하기로 하나님 앞에 서약했잖아요. 살다보면 순간적으로는 내 아내보다 예쁜 사람을 볼 수 있고 잘나 보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사람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 여자 사랑하기로 작정했잖아요. 그러면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서약한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이 살면 신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0순위로 사랑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편 갖다 놓아 보세요, 자식 갖다 놓아 보세요. 갖다 놓고 ‘you are my sunshine’하고 노래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전부를 드려서 사랑하실 분입니다. 부부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기 때문에 첫사랑에 입각해서 사랑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까? 시한 한시적입니다. 

누가 서약할 때에 두 당사자 세워놓고 뭐라고 합니까?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을 받습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까지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했잖아요. 그러면 죽음이 찾아와서 한사람 데려가면 결혼관계는 더 이상 결혼 서약을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중단되고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여자 분들이 그런데 관심이 있는 분이 많더라고요. “당신 내 죽고 나서 결혼 할거야 안 할거야” 이런 것 묻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도 6개월 채웠느니 일년을 못 채웠느니 그러는데 그것은 상관없어요.  성경적으로 아무 하자 없어요.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기까지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지 약속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죽고 난 후에 사흘 만에 가든 한 달 만에 가든 그걸 왜 신경을 써요 그것보다는 살아 있을 동안에 잘 하려고 하세요. 아직도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말고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맺어 줬더니 그거 안하고 죽고 나서 신경 쓰면 어떻게 해요. 죽고 나서는 산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그것까지 골치 아플 것 뭐 있어요?

우리의 절대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그분만이 나의 절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이시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의 질서에 따라서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도 사랑하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서로 사랑하기로 했지만 이것은 시한부 사랑입니다. 죽음이 서로를 나누면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석 달 안에 다시 재혼하더라도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살아 있을 때는 배우자 외에는 한눈조차 팔지 말라니까요. 부부 사랑은 살아있는 한 서로에게 대해서 신실한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마음 전부를 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다음 말씀에 따라서 배우자를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엉뚱한데 마음을 쓰게 되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사랑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여러분 안에 호흡을 주시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안에 영적인 새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ꡒ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할렐루야!ꡓ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새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노래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입술의 열매, 찬미의 제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칭송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변화한 마음에서 맺힐 수 있는 가장 귀한 열매 그것은 감사와 찬송입니다.

이미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여러분의 죄악을 사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제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은 하나님만 위해서 일편단심 사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절대 사랑하시기에 절대헌신이 여러분으로부터 나오기를 기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맛보고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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