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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주님을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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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금요일 심야기도회 때 4층에서 근무하는 김정은 자매님이 올라오셨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간다고 하더니 지금 자기의 심정이 무척 고민되어 기도하고 싶어서 올라왔다고 하면서 지금 갖고 있는 고민을 잠시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불교 집에서 혼자 예수를 믿는데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들이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핍박하시면서 예수 믿으려면 혼자 나가 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믿지 않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와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믿기 전에는 별로 마찰이 없고 갈등이 없었는데 예수 믿은 다음부터 서로 의견이 안 맞고 마음이 멀리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직원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깝고 때로는 마음이 불편하고 그래서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몰랐다면 이러한 갈등이 없었을 텐데 요즘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고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맡기고 싶으면 싶을수록 갈등이 더 심하다고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은 거룩한 고민입니다. 예수님이 안에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참으로 깜짝 놀랄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4-38)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검을 주고 불화를 주고, 십자가를 주고, 싸우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비유로 해석될 말씀이 아닙니다. 은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검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해가 안되지 않습니까?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그분은 화평이십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4절에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검을 주려고 오셨다는 말씀은 좀 상반된 말씀이 아닙니까?
여기서 검은 분명한 칼이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 칼이 무딘 칼이겠습니까? 그 칼은 예리하고 날카롭고 도려내고 찔러대는 날선 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칼을 우리에게 주신다니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으면 검을 받는 것입니다. 이 검은 우리를 찌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세상에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은 그런대로 화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살 때에는 그런대로 마음도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부터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또 피 흘림과 고통과 고민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까? 여러분 전설에 의하며 모든 제자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검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 검은 양심의 검입니다. 갈등의 검입니다. 
예수 믿지 전에는 갈등이 되지 않던 일들이 예수 믿기 때문에 갈등으로 다가옵니다. 예수 믿지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하던 곳도 예수 믿으면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아무렇게나 유턴하고 신호도 무시하였었는데 다시 한번 조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여러분 말씀의 검이 우리를 찌릅니다. 양심의 검이 우리를 찌릅니다.
그러므로 검이 여러분에 마음을 찌를 때에 즐거워하십시오. 왜냐하면 내게 아직도 예수님의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 많이 고민하십시오. 더 많이 아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무딘 심령을 주의 검으로 찔러 자극을 받으십시오. 그런척하지 말고 오히려 고민하면서 때로는 몸부림하면서 신앙 생활하십시오. 이것은 거룩한 고민입니다. 이것은 제자의 삶에 필요한 칼입니다.

칼은 어린 아이에게는 무서운 도구이지만 어른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생활용품입니다. 여러분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검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검을 감사하면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검은 우리를 정금과 같이 만들 것입니다. 이검은 우리를 순결하게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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