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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입은 긍휼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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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어렸을 때에는 거지들이 많이 있었다. 주택이 교회하고 붙어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사람의 거지들이 찾아오곤 했다. 기억에 남는 거지가 있는데 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나타나는 거지였다. 밥을 차려주면 현관에 걸터앉아 급하게 밥을 먹고 시를 한 수씩 써주고 갔던 거지가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라서 한문으로 쓴 시였기에 봐도 무슨 글 인지 몰랐다. 현관에 걸터 앉아서 급하게 먹는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다. 다 쓰러져가는 움막에 살던 친구가 있었다. 사는 그 모습이 거지같은 모습이었다. 하루는 장난감을 갖고서 그 집에 가서 놀다가 그 친구가 그 장난감을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지 아직도 그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던 어느 날 움막같은 집이 철거된다기에 이사갈 수 밖에 없었다. 트럭이 와서 그 친구와 엄마를 싣고서 어디론가 사라진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래도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이 나온다. 다윗의 자손 예수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도 불쌍히 여기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말씀을 읽는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다는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인가?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마음에 잘 와서 닿지를 않았다. 나는 내가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도 있고, 입을 옷도 있고, 장난감도 있고, 학교에도 다니고, 어디가 아프지도 않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표현은 거지에게나 해당하는 표현이요, 움막에 사는 친구에게 해당하는 단어처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베푸시는 긍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 바울이 고백한다. “내가 긍휼을 입었도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나를 세워주셨다는 바울의 고백이다. 우리도 같은 고백을 하기 바란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지금까지 나를 지켜 주셨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님의 긍휼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을 통해서 나타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니라.” 바울은 이렇게 포악한 일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기셔서 즉시 진노하지 않으시고 바울의 죄 값을 용서해 주셨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었다. 도저히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 죄의 값을 분명히 치러야 한다.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 아니면 갚을 수 없기 때문에 감옥에서 몸으로 때워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사람을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준다. 갚지 못하는 죄의 값을 탕감해 준다. 갚지 못하는 죄를 용서해 준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나가서 모두 탕진한다. 거지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처량하다. 불쌍하다. 아버지는 아무 조건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용서한다. 긍휼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같이 주님의 긍휼하심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참고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이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면서 사는가?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죄의 내용을 열거하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없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주님은 참으시고, 주님은 용서하시고, 주님은 받아주시고, 주님은 우리를 용납하여 주신다. 그러나 하루 하루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 때문에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성 프랜시스의 제자가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갔다. 많은 보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보좌는 눈에 띄게 높은 보좌이었다. 그래서 그는 천사에게 물었다. "저건 누구 것입니까?" 천사가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을 보좌이지요." 그 말을 듣고 그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환상을 깼다. 그 제자가 어느 날 조용한 시간에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말을 듣고 제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건 바로 위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강도, 살인자 등 온갖 악인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가장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바로위선이 아닙니까?" 하고 대들었다.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정말 나는 악한 놈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셨으니까 오늘 날 내가 된 것일 뿐이라네. 만약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그 사람은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하고 진심에서 울어나는 말로 이야기했다. 그 제자는 그 때에야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큰절을 했다.

우리는 지금 용서하시는 주님의 긍휼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마음데로 죄짓고 살아도 멀쩡한데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자기의 죄를 알고, 주님께서 용서하시는 긍휼의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로 나타나는 주님의 긍휼하심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너무나도 세밀하게 도와주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가진 것도 빼앗기고, 실컷 얻어 맞아서 스스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강도가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이 지나간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간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슴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간다.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선한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 사람.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에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못 본척하면서 거리를 두고 멀리서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다.

탕자의 비유를 보라. 아버지는 죄를 짓고 돌아오는 탕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여기에 바로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다가와서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 바울이 주님에게 받은 긍휼은 너무나도 세밀하게, 자세히 돌아보시는 것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주님께 긍휼을 받으며 산다. 나는 지금 너무나도 세밀하게, 자상하게, 자세히 내 사정을 돌아보시는 주님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경영학에서 세계적인 석학 로리 베스존스가 쓴 "최고 경영자 예수 (JESUS CEO)"라는 책에서 그는 인간이 자기 삶의 세 가지 경영방식이 있다고 소개한다. 그 하나가 알파 경영방식인데 이는 어떤 일을 잘 추진은 하나 세밀하지 못한 단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가 베타 경영방식으로서 이는 섬세하지만 추진력이 없는 것이 흠이라고 한다. 일을 너무 많이 재어보니까 때를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이 양자를 극복하는 경영방식이 오메가 경영방식인데, 자기 삶에 이 경영방식을 택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완벽한 오메가 경영방식을 통한 삶을 사셨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큰 일을 행하시면서도 세밀하게, 섬세하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다윗 왕에 얽힌 이야기이다. 다윗 왕은 평소에 거미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벌레로서 장소도 가릴 줄 모르고 아무 곳에나 거미줄을 치는 더러운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 중에 그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빠져나갈 길을 잃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어떤 작은 동굴로 피신했다. 그런데 그 동굴 입구에는 마침 한 마라의 거미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를 추격해 온 적군의 병사는 일단 동굴 앞까지 이르렀지만, 입구에 거미줄이 쳐있는 것을 보고는 동굴 안에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그냥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세밀하게 도우신다. 하나님은 너무 구체적으로 우리를 돕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긍휼하심의 모습이다. 어느 교인이 스킨스쿠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바다 밑을 보는 멋있는 레저이다. 새벽기도 가기 위해서는 못일어나도 스킨스쿠버를 위해서라면 시간에 상관없이 일어난다. 얼마나 스킨스쿠버를 좋아했는지 함께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했다고 한다. 대개 이것은 주일날 하기 때문에 교회에 갈 수가 없었다. 부인이 이렇게 저렇게 설득해도 남편이 듣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어서 커다란 가방 속에 들어있던 스킨스쿠버 장비를 몽땅 훔쳐가고 말았다. 그 장비들은 사용자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체형을 밀착한 본을 떠서 공장에서 그 사람 것으로 만들어 아예 이름까지 찍혀서 나오기 때문에 어디다 팔아 먹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입을 수도 없는 옷인데 도둑이 갖고 갔다. 그런데 탁자 위에 십일조 봉투가 있었는데 그 봉투는 그대로 남겨둔 체 스킨스쿠버 장비 일체를 도둑이 갖고 나갔다. 그 후에 남편은 주일 성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잃어버렸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밀하심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본다. 지금은 남편도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
그러기에 때로는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긍휼일 수도 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때로는 세밀하신 하나님의 긍휼일 수도 있다.

이같이 우리가 믿는 긍휼하신 하나님은 멀리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다. 내 삶의 환경에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나를 간섭하시고, 세밀하게 돕고 계신다.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
우리 교회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성전을 짓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추진력있게 일하시며 세밀하게 일하는 모습을 실감하며 지내고 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각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긍휼하심은 멀리서 바라보시기 보다는, 가까이 다가오셔서 세밀하게 챙겨주시고, 상처받은 내 마음을 세밀하게 어루만져 주신다. 주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챙겨주신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가 지금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살아간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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