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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옥에서 보내는 응원 (빌 1: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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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찬송가 474 장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2절은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3절이 더 자극적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이 세상에 죽을 일이 쌓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둘러보면 죽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온갖 사고가 터지고 있습니다. 공해가 심하다보니 병에 걸릴 확률도 높아 졌습니다. 그래서 제 수명을 다하고 죽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누구든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트레스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장 강한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공포 괴기 영화를 즐깁니다. 죽음의 스릴을 즐기는 것입니다. 공포 괴기 영화를 보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즐깁니다.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왜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살인마나 귀신 나오는 그런 영화 보지 마십시오. 우리 영혼이 상처를 입습니다. 영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직 죽을 때가 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21 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또 사는 것과 죽은 것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하면 죽는 것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23 절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바울은 죽는 것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먼저 육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동시에 죽음은 그리스도에게 가서 그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농도가 더 진하게 함께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죽어서 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땅보다 더 좋습니다. 천국은 구원을 누리는 곳입니다. 천국은 영화로운 곳입니다. 천국은 기쁨이 넘치는 곳입니다. 천국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천국은 근심이 없습니다. 눈물도 없고, 질병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천국은 이렇게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는 것보다 죽어 천국 가는 것이 더 좋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석방될지 사형언도를 받고 죽을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과 죽은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태이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쉽게 판단하지 못합니다. 평형 저울에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달아봅니다. 어느 것이 더 유익한가?

개인적으로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생각하면 아직 더 살아서 할 일이 있었습니다.

24 절은 바울이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자신에게 더 “좋은 것”과 교회에게 더 “필요한 것”에 끼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은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이 땅에서의 고난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울이 더 살아야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계속 복음을 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곧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믿음을 더 양육해야 합니다.

이것이 25 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믿음의 진보란 구원의 확신을 가진 교인들의 믿음을 더 강하게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굳센 믿음을 위해 아직 바울이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이 석방되어 빌립보교인들과 함께 할 일이 있습니다. 26 절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을 풍성하게 하려고 합니다. 여기 성경 번역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번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죄 석방되어 나와서 빨리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복음 전도는 빌립보교회와 함께 해야 할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살든지 죽든지’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삶입니다. 살면 복음을 전하니 좋고, 죽으면 천국 가니 더 좋다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오늘을 살면서 곧 죽음을 예비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면 삶이 진지해집니다. 시한부 삶을 철저히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계산하고 사는 삶이 지혜입니다.

시편 90편은 모세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죽음을 정확하게 안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습니다. 자기 사명은 거기까지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느보산으로 올라가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모습을 멀리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모세가 쓴 시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0,12>

우리는 모세처럼 죽는 시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을 내 인생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죽음을 준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론적 삶을 사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뚜렷합니다. 바울은 사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뚜렷하면 사는 태도가 정해집니다.

본문 27절부터 마지막 30 절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여기서 ‘생활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폴리테우에스타이’입니다. 이 단어는 정치적인 단어입니다. r,그 뜻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빌 3:20 에도 시민권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폴리테우마’라는 단어입니다. 모두 ‘폴리’라는 어근가지고 있습니다. ‘폴리’는 도시를 뜻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대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쓴 것은 빌립보 도시의 특성을 살린 것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군대에 있다가 제대한 군인들이 정착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민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빌립보 시민들은 트라케라는 야만족을 몰아내고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야만인들에게 높은 도시 문명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말하는 시민권이란 로마 백성이 아닌 천국 시민권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로마법보다 성경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세상보다 훨씬 높은 가치관과 도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교인들은 천국시민답게 고상하게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정신과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해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또 바울은 본문에서 스포츠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27 절 마지막에 보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했습니다. 여기서 ‘협력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운동경기 때 쓰는 스포츠 용어입니다. 특히 혼자하는 경기가 아니라 한 팀을 이루어 투쟁한다는 의미입니다. 럭비나 미식축구 같은 경기에서 선수들이 스크럼을 짜고 한 덩어리가 되어 상대와 대항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빌립보 지방은 고대 올림픽이 시작된 곳입니다. 그래서 이런 스포츠 용어는 실감나게 이해를 돕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군사 용어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27 절에 “일심으로 서서”라고 했는데 이 말은 군대가 방패를 들고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 있는 굳건한 자세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영화를 보면 로마 병사들이 대오를 지어 적과 맞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28 절에 보면 “두려워하다”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도 역시 군사 용어입니다. 달리는 말이 장애물이나 적군을 만나 두려움에 움찔하는 것을 뜻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적대자들과 맞설 때 두려워 움츠려들지 말고 하나로 뭉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안으로 내분이 있고, 밖으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30 절는 이것을 싸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이 싸움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당해야만 합니다. 저들은 교회 공동체를 적대하므로 멸망을 받게 됩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싸우는 과정은 고난이 따르겠지만 견뎌야 합니다.

바울도 감옥에서 동일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보고 듣습니다. 바울이 굳건하게 복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도 같은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동병상련의 심정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는 같은 심정으로 서로 위로를 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몸은 떨어져 있지만, 빌립보교회를 안타깝게 여기며 힘내라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을 겪는 것이 은혜입니다.

29 절을 보면 고난을 은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두 가지가 은혜입니다. 믿는 것이 은혜이고,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고난이 왜 은혜입니까? 이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바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그치고 죽는 것이 더 좋다고 여깁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천국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생각하면 아직 남은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또 교인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석방이 되어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넘어선 삶을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직 복음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목적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만 합니다.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훼방하는 세력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손해를 봅니다. 사단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응원하십니다. 굳세게 하나가 되어 이 싸움에서 승리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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