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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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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

성경말씀 누가복음 16:19~31  2004년 9월 12일  남포은혜교회  주일설교.

빌립 브룩스라고 하는 미국의 감리교 감독 한 분이 나이가 많은데다가 중병을 얻어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누가 와도 안 만나 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렸을 때에 학교를 같이 다니던 잉글슨이라는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빌립 감독이 그렇게 여러 번 전도를 했건만 끝까지 무신론자이기를 고집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만남을 다 거절하던 사람이 이 친구는 만나주는 것이었습니다. 잉글슨은 빌립 감독과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갔습니다.

가족들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귀한 분들은 다 거절하시면서 왜 그 변변치 못한 무신론자 친구는 만나셨습니까?” 그러자 이 감독이 아주 유머러스하게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천당에 가서 만날 것이니 인사 안 해도 되지만, 저 친구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니 마지막으로 인사나 하려고 만났지.” 여러분, 현재 보령시 같은 지역, 같은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이 많으나 모두가 같은 의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면 동화나 소설속의 이야기를 한다고 우습게 생각합니다. 아마 너무 많이 들어서 불감증에 걸렸나 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늑대와 소년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처음에는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소리에 마을사람들은 재빠르게 반응합니다. 저마다 농기구를 갖고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아마 그 동네가 평소 늑대가 나타나서 많은 피해를 본 마을이었던 듯싶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의 장난으로 판명된 후 사람들은 소년에게 욕을 하고 겁을 준 후 되돌아갔습니다.

이 소년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대단한 힘이 있는 것을 알고 또 다시 장난을 칩니다. 다급한 소년의 목소리에 역시 사람들이 모였지만 거짓말임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이제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정말 흉악한 늑대가 눈을 번뜩이며 나타났습니다. 소년은 다급하게 “늑대다!”라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속아본 사람들은 “또 거짓말이겠지 이젠 안속아!”라며 아무도 내다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들도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수준은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지옥은 ‘늑대와 소년 이야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적 이야기입니다. 그 천국과 지옥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은 현재 우리 마음속에 이미 천국이 와 있다고도 말씀합니다.

오늘은 천국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반대되는 ‘지옥’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옥의 실상과, 지옥의 고통을 통해 ‘정말 지옥은 가서는 안 되는 곳이구나 ’다시금 천국이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라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지옥은 불꽃 중에 고민하는 곳이다.

무신론자의 생애만큼 하나님의 실재를 잘 말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1694-1778)는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글을 많이 썼고, 인쇄소를 세워, 그러한 책을 펴내고 열심히 팔기도 했습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년만 지나면 하나님을 믿는 따위의 어리석은 자는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그는 또한 말솜씨가 좋아서, 불신앙에 빠진 시민들은 그의 무신론 연설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신이 난 그는 파리의 대로에서 하나님을 향해 욕을 퍼부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이렇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나를 이 자리에서 쓰러뜨려 보시오!” 그렇지만 그도 나이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점점 늙어 갔고, 결국 병들어 죽음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진 온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만약 내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켜 주신다면 전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합니다. “볼테르 선생님! 선생님의 생명은 6개월은 고사하고 이제 6시간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원기 왕성하고 확신에 찼던 무신론자의 마음은 의사의 선고에 의해 흔들렸습니다. “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구나.”

그는 뒤늦게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를 쳐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공포에 떨며 소리치기도 했고, 마지막엔 지옥의 불이 보인다며 외쳤고, 미쳐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볼테르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호언장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신론의 책을 펴냈던 그의 인쇄기는 성경을 인쇄하는데 사용되었고, 지금, 그의 저택은 성경 보관 창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지옥을 뜨거운 불꽃 속에 고통 받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나 뜨거운 불이나 물에 데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데었을 때 그 뜨거움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는 변변한 놀이기구가 없었습니다. 야구 놀이를 할래야 제대로 된 도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글러브는 고사하고 야구 배트도 나무를 깍아서 만든 방망이를 썼고, 제일 중요한 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닐을 뭉쳐 불을 붙인 다음 다져서 야구공을 만들곤 했습니다.
하루는 공을 만들기 위해 비닐에 불을 붙였는데 잘못하여 비닐 불똥이 손가락에 튀었습니다. 어찌나 뜨거웠던지 놀라서 손을 흔들었는데 뜨거운 비닐 불똥이 이쪽 저쪽 손가락에 마구 붙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손가락에 작은 흉터가 남아있는데, 나는 지금도 지옥의 뜨거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상상이 갑니다. 그런데, 영원히 계속되는 불의 고통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그런데도 지옥의 고통을 말하면 여유 있게 웃으며 “죽은 다음에 있을 일을 알게 뭐요?”라고 태평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아마 휴대용 가스라이터를 켜서 손가락 끝에 대보자고 하면 화를 벌컥 낼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의 고통은 비닐 불똥이 문제가 아닙니다.

휴대용 가스라이터가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고통입니다. 이 일이 까마득한 장래의 일이 아니고 조만간에 우리 모두에게 닥칠 일입니다. 영원한 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할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릴는지 우리가 선택해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부자는 불꽃 중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죽은 후의 실상이 정말 이렇다는 것을 이 부자가 알았다면 그는 지옥을 선택하지 않았겠지요. 지옥에서 눈을 들어보니 저 멀리 낙원에, 자기 집 문간에서 바닥에 떨어진 더러운 음식을 주워 먹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하게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이웃,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부자의 잘못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부귀가 스스로의 뛰어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 믿으며 가난한 자들은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돌려버리기 쉽습니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 더 특권 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기의 재산은 자신의 능력으로 만든 것이기에 오히려 못사는 사람을 경멸하고 천시합니다. 자기 주변에 못사는 사람들은 하루 먹고살기에도 어려운 실정이지만 자신은 노력의 댓가이기 때문에 돈 쓰기가 떳떳합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았던 부자는, 이 땅에서는 왕과 같이 잘 먹고 잘살았지만 현재는 지옥불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보니 저 멀리 낙원에 낯익은 얼굴이 보입니다. 자기는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자기 집에서 기르던 개들이 부스럼투성이의 몸뚱이를 핥아주던 거지였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거지는 낙원에서 자기 민족의 조상으로 불려지는 아브라함의 품속에 누워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아버지여, 저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묻혀서 제 혀끝을 서늘하게 해주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이런 간청을 합니까? 얼마나 뜨거우면 ‘물 한 방울’을 요청합니까?
우리가 지천으로 쓰는 물 한 방울이 절실한, 그 뜨거운 지옥에 누가 갑니까? 예수를 모르고, 이웃을 모르며, 자기 한 몸뚱이, 자기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갑니다.

자기가 벌어들인 재물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먹고, 사고, 쓰는 것이지만 이웃을 돌아보지 않은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공평하게 공기를 주시고 햇빛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변을 돌아보며 살라고 부탁하십니다.

나눔은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전도의 한 방법입니다. 불신자와 똑같이 아무런 자선도 베풀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줄 길이 막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이 말씀은 ‘보상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베푼 선한 행동이 자신이 어려움에 빠질 때 다른 사람의 자선과 구제의 손길을 통하여 되돌아온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우리가 청해야 할 손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식사를 준비하여 손님을 청할 때 잘 사는 이웃을 초대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절름발이와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합니다. 이유인즉 잘 사는 사람은 다시 우리를 초대하여 갚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꾸어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이웃을 친절히 대했을 때입니다. 지옥불 속에서 고난 받는 이 부자는 이것을 소홀이 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난한 이웃에게 손을 폅시다.

더 나가서 저는 이 말씀을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핍절하고 배고픈 자에게 손을 벌려 자선하면 여러 날 후에 그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사소한 친절로 영혼을 구원한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주변의 예수를 모르고 천국도 모르며 살아가는, 세상의 저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리고, 모든 인류가 하나의 형제자매이고, 우리 모두는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을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방법의 첫 단추가 이웃을 돌아보는 자선일수 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경을 영혼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할 때 이미 구원받고 천국의 백성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이웃을 돌아보는 관심일 것입니다.
이웃을 돌아보지 않아 고통 받는 부자를 거울삼아 이웃도 돌아보고 영혼도 구원하는 우리가 됩시다. 할렐루야!

* 지옥은 고민을 받는 곳입니다.

24절에는 그가 '불꽃'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속의 지옥의 상태는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영원한 고통 상태’로 말합니다(막 9:43). 즉, 의인들이 풍성하고 사랑 가득한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그 마음속에 있는 엄청난 탐욕 때문에 지옥불 속에서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옥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차디찬 지옥의 냉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 가슴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 언제나 계산이 앞섭니다. 이익이 없는 곳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땅을 사는 현재도 지옥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은 분명히 현재도 천국을 누려야합니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쁨이 살아있기에, 천국의 영생이 있기에 따듯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이 천국의 불씨는 환경이 끄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천국의 소망을 끌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생명의 길을 가십시오.’라는 우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향해 이제는‘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해 보십시오.’라고 말해야 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살아서 천국을 경험시켜야 합니다. 천국의 핵,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그 마음속에 있는자는 이미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는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예수가 그 마음속에 자리한 사람은 이미 천국백성입니다.

이미 기쁨의 나라가 그 마음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살전 5장 16~18절 까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주님께 모든 일을 의논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의논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또 주님이 그 마음에 충만한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이웃을 향해 경고하고 실상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과 똑같이 책임을 물으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죄 있는 모습 이대로는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죄 있는 이 모습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수많은 죄가 천국 가는 길을 막아섭니다.

그래서 우리 죄 많은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름 아닌 예수를 알려주라는 애타는 소리입니다. 인생들은 미련한 존재인지라 생명 되시는 예수를 부정하며 어리석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불꽃 중에 들어갈 당신의 주변의 소리는 지금도 외칩니다. “생명의 주 예수를 알려주라!, 구원의 주 예수를 알려주라!”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일에 부름 받은 천국의 전도꾼들입니다. 우리 다 같이 성령 충만히 받아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시다. 할렐루야!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아주 중요한 전도의 사명을 이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부자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며 이승을 살아가는 자기의 다섯 형제를 구원시키기 위해 거지 나사로를 형제들이 살고 있는 땅에 보내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모세로 상징되는 성경말씀과 선지자로 상징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과 목회자 즉 목사들, 전도사들에게서 구원의 도리를 듣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이 있어도 권함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진정한 자선과 이웃사랑의 도리를 다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알려주어서 고통과 저주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알려주어야 합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을 구원하는 길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우리의 관심입니다.
그 영혼들을 향한 애타는 기도와 실제적인 사랑을 나누고, 소유를 나누어 그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왜 진작에 예수를 알려주지 았았어!!”라는 지옥의 함성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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