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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의 비밀 (딤전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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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어제 폐막된 제61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우리나라 김기덕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 “빈 집”으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베니스 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나라 영화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것은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 감독은 소감을 말하면서, “이 영화를 함께 만든 스태프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제가 살아온 인생에 감사를 드린다” 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인생의 한 정점에 서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경외하는 대상이 함께 일한 사람들, 가족들을 떠올리게 되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감사할 수 있음에 잔잔한 감동을 마음으로 느껴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경건한 자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먼저“나는 경건한 자인가?”하는 질문을 통해 각자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건하다고 판단이 되면 “왜 경건한가?”를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기계문명은 고도로 발전해서 육신적으로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게 살게 되었지만 이상한 것은 마음은 더 불안하고 인간소외현상을 자아내고 있으며 위대한 성취도 많으나 헤어 나올 수 없는 좌절감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현대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에게서 더 합니다.

모든 젊은이들이 비관적인 사회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만 다녀도 부모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공연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대학에 다니는 학생은 교수에게 지식을 사는 것으로 족하지 그 이상의 어떤 지도를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어른의 간섭을 싫어하고 학교에서 엄격한 규칙을 요구하면 반항하며 시험 치르는 것을 원치 않고 고된 훈련을 싫어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실상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삼위일체인데 사람은 정신을 가졌기에 교육이 필요하고 몸을 가졌기에 음식이나 옷 그리고 집이 필요하고 영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 맡길 수 있는 분이 필요합니다.

비인간화되어 가는 이 세대는 경건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과장합니다. 자만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고 경건하지 않습니다. 무정합니다. 원한을 풀지 않고 서로가 비방하고 절제할 줄을 모르고 난폭합니다. 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신합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교만합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니 우리에게 "너는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하면서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그의 자비하심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는 것이 경건한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경건의 생활이 오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압력, 세속적인 압력, 성적인 압력이 강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이에 대한 경의, 존경, 예배 또는 순종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연습하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존경, 예배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기본 태도를 바로 가지기를 연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경건을 연습하는 것,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예배와 순종이 우리 생활에 습관이 되고 전통으로 젖어 버릴 만큼 수없이 되풀이하는 연습이 얼마나 풍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경기든지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협력과 연습이 요구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질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꾸준한 연습이 없이는 경기에 승리 할 수가 없습니다. 경기뿐만 아닙니다.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하는 것도 악보만 가지고 나와 노래하는 것 아니고 운전이나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연주를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수 없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한 만큼 됩니다.

교회에서 피아니스트나 올가니스트들이 반주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늘 연습을 하는데 그들이 곡을 몰라서가 아니고 연주하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연습은 아는 것을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훌륭한 대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 만한 노력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연습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서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 편합니다. 앉아있기 보다 누워 있으면 더 편합니다. 누워 있는 것보다 잠을 자면 더 편합니다. 사실 자는 것보다 아주 자면 더 편합니다. 우리의 이 육신을 쉽고 편한 것만 찾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나 본능이 하자는 대로 말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본능은 쉽고 편한 것을 찾지만 힘들어도 귀찮아도 연습의 생활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금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 교회를 예정대로 빨리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을 우려해서 몇 가지 긴급한 목회적인 지시를 합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게 함이니…"

바울은 가능하면 빨리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 교회를 직접 방문하고자 하는 소원을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 성취가 불확실한 전망 때문에 그 대안으로 디모데 전서라는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바울로서는 문제가 발생한 에베소 교회에 직접 가서 도와주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그를 놓아주지 아니했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방문이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바울은 2장1절부터 당면한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목회적인 지시를 했는데 이제 그 여러 가지 지시의 결론으로서 바울은 교회의 본질을 언급하고 경건의 비밀의 핵심으로서 예수님 사건을 말합니다.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성도로서 처신하는데 유익하다고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디모데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믿고 있는 진리의 비밀이 무엇인지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바울은 교회의 존엄성을 밝히면서 교회를 삼중으로 설명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

교회는 뜻이 맞는 사람끼리 조직한 계모임이 아니고 취미나 특기가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야 되는 동호인 모임이 아니며 마음대로 회원이 될 수 있고 원하면 쉽게 탈퇴도 가능한 자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오늘 왔다가 내일 떠나갈 수 있는 그런 조직이 아니며 원하는 물건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물건을 사는 상점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건물은 교회가 회집하는 처소에 불과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있어야 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금이 있어야 시작을 하는 사업이 아니며 모이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건물도 필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이 모인 장소는 예배당, 교회당으로 불러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면 우리는 곧 바로 이 종탑 두 개의 건물을 연상하지만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처소"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소유하시고 주인이신 집이요 가정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집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모임에 임재하시고 있다는 의미로 생각해야 옳습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왜 부르는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양자되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 자신이 벽돌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가정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각기 인종도 다르고 의무와 책임도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큰 가정에는 가정을 돌보는 집사가 있어서 각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주인의 뜻을 이루도록 감독을 했습니다. 가정이란 구성원이 서로 의존해있고 상호간의 행동을 용납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것으로 주님의 목표를 이루는 교회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거기 속한 자의 안전과 보호를 보장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집, 교회에 속해 있다면 안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족이라면 가장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질 것입니다. 가족을 이끌어 나가는 책임을 혼자 지기가 정말 힘 드는 시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하신 가장이십니다. 우리가 가족이라면 가장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식구이기에 악한 세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회중"

벙어리 우상 앞에 복을 달라고 절을 하는 바보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생명 없는 우상과 대조적인 표현인데 신앙공동체의 생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나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신앙공동체의 생명을 결정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는 성도들과 공동체에게 새로운 활력을 공급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회중이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가 신앙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해야 합니다. 몇몇 사람들의 의사가 교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공동의회든, 당회든, 제직회든 사람들의 의사가 교회의 방향을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공동의회든, 당회든, 제직회든 그 구성원들은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지시에 민감할 때 교회가 제 구실을 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의회나 제직회나 당회가 모일 때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대한 의식이 떠나가 버리면 그런 모임은 아무런 필요가 없는 모임입니다. 모든 문제를 사람이 가지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이 누구든지 무엇 하는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계신 주인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져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민주주의가 그 정치에 최고 이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입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숫자보다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선되는 교회여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기둥과 터"

교회는 오늘 출석한 자들로서 구성되는 모임이 아니라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그 마음속에 '아멘'으로서 받아드리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포되는 진리를 '아멘'이라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이 진리를 파수하고 널리 선포하여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말로서, 그리고 행동으로 파수하고 옹호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되고 진리의 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기둥 뿐 아니라 터라고 합니다. 기둥은 지붕을 받치는 반면 터는 집 전체를 받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진리를 떠나면 교회는 교회될 수 없습니다. 기둥이 무너지고 터가 사라진 곳에 건물이 존재할 수 없듯이 교회는 그 생명이 진리 파수와 진리 선포에 있습니다. 그 진리에 서 있지 않는 교회, 그 진리를 선포하기를 중단한 교회는 교회되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 진리, 교회가 사활을 걸고 파수하고 선포해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를 16절에서 밝힙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모든 성도가 수긍하며 고백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를 나머지 구절에서 찬양을 통해 밝히는데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지상 사역을 노래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바 되었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음이라" (16절 하반절).

이 찬양을 통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경건의 비밀과 신앙의 진수를 살펴봅니다. 그것을 기억하게 될 때 성도들은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경건의 비밀의 내용

그리스도의 성육과 부활에 대한 고백입니다. 성육하면 오늘 처음오신 분들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회가 고백을 합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신은 본래 신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몸을 가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삶을 함께 나누신 것입니다. 그것을 몸을 입으셨다는 말을 간단하게 성육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가사에서는 성육과 부활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육신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저주아래 오셨습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의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진수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믿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은혜를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세상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신앙공동체가 그 영광을 알아보았을 뿐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으며 십자가로 내몰아졌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를 부인하고 내쫓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고 받으셨습니다.

경건의 비밀에 대한 전달방식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그의 부활에 대해서 천사들도 증인입니다. 복음서 곳곳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천사들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노래했습니다. 천사는 또한 광야에서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실 때 수종 드셨습니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의 부활 소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받은 구속을 철저히 살피려고 합니다(벧전 1:12).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초대교회는 선교의 사명에 불탄 교회입니다. 그 시대에 사람 사는 모든 문명 세계에 복음을 전한 무리들입니다. 복음은 결코 한 지역이나 한 민족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만국에서 전파되시고"라는 이 구절은 선교 사명의 완수를 고백합니다.

선교하기를 그친 교회는 교회되기를 중단하는 교회입니다. 선교비는 교회 경상비를 먼저 지출하고 남으면 지출하는 항목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백성이라면 온 세상이 주님을 믿기까지 선교를 향한 우리의 노력은 끝나지 않아야만 합니다. 만약 선교를 중단한다면 교회가 교회되기를 중단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교회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만국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음이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미치는 범위를 보여줍니다. 땅 위 만국 뿐 아니라 하늘에까지 그 영광이 미치고 있습니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8, 11). "해 뜨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구약의 시인의 소원이 이뤄진 고백입니다.

영광 가운데 올리우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천사와 능력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오른 손에 잡으시고 그 세우신 사자를 통해 교회를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 이끌려 나가는 정치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 주인의 장중에 있습니다. 주일마다 세우신 종들을 통해 말씀하셔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주인이신 분, 영광중에 올리우신 그 분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오늘도 간절히 당신을 찾는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십니다. 자기에게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찾는 공동체에게 무한한 능력을 부어주시길 기다리고 있으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찾고 있습니다.

편안함과 평안함

속도 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빠른 것보다 바른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방향 설정이 잘못 되어 있으면 빠를수록 불행한 것입니다. 바르게 가고 있다면 느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빠른 것에 익숙하여 있습니다. 빨리 성공하고 싶고 빨리 부자 되고 싶고 빨리 해결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속도에 집착하다 보면 방향과 의미를 놓치게 마련입니다. 이러므로 바르지 못하고, 빠른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또한 오늘날의 문제는 쾌락과 쾌감은 있는데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재미와 기쁨이 다르듯, 쾌감과 감동은 다른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재미를 쫓다가 기쁨을 놓쳤고 쾌감에 가리어서 감동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감동 받는 것보다 손쉽게 쾌감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 다음,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성숙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느냐 보다 얼마나 더 성숙해 졌는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성취에 너무 집착 하다 보면 성숙을 놓치게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덜 이루었다 해도 성숙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다음 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이 말은 보여 지는 것보다 보여 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세대는 '내가 누구냐' 보다 '어떻게 보여 지느냐'에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실속보다 겉치레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합니다. 물건보다 포장에 더 신경을 쓰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겉 사람 보다 속사람을 육신보다 영혼을 더 귀히 여기고 있음에 주목 해야 합니다. 겉 푸름 보다 속 푸름에 우선순위와 거룩한 욕심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편안(便安)함 보다 평안(平安)함이 힘이며, 진정한 축복 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끝없이 편안함을 요구 합니다. 우리는 그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복종 하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편안함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평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편안함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평안함은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편안함이 세상의 것이라면 평안함은 하늘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속도, 성취, 재미, 쾌감, 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의미와 성숙 그리고 감동과 열매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은사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빠른 속도로만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하늘의 것들은 놓치고 땅의 것들을 움켜쥔 채 사는지 모릅니다. 남들이 뛰니까, 안 뛰면 불안 하니까, 느리면 소외 되니까, 그냥 어제처럼 오늘도 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달리다 보니 멈춰서거나 느려지면 불안해 지고 조급해 하고 큰 일 나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토록 빠른 속도로 달리게 하고 쉼을 잃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영암교회가 능력 주시기 위해서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 띄기만 하면 영암교회는 과거 50년의 역사를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라고 주께서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약속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그 분의 영광을 응시하므로 그 분의 영광을 나타냅시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교회가 위탁받은 진리의 위대함을 깨닫고 경건의 비밀을 잘 지켜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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